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34
교랑의경 634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방 안의 창문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밖과는 다르게 방 안은 숨 막히는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시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구석에 놓인 얼음 대야를 쳐다보았다.
“가서 새것으로 바꿔오거라.”
시녀가 얼음 대야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대야 안에 아직 얼음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하지만 따져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시녀는 조용히 얼음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내시가 좌우를 살피더니 등 뒤에 숨겨온 보따리 하나를 풀어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잰걸음으로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전하?”
내시가 나지막이 진안 군왕을 부르며 휘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내시를 쳐다보자, 내시가 헤헤 웃으면서 휘장을 반쯤 걷었다.
“전하, 이것 좀 보십시오.”
내시가 말하면서 보따리에서 꺼내온 옷을 펼쳤다. 반쯤 걷힌 휘장 너머로 짙은 붉은색 혼례복이 햇빛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저건······.
“혼례복이 완성되었습니다. 몰래 가지고 와서 보여 드리는 겁니다.”
내시가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모습으로 말했다.
온통 붉은색인 혼례복 위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금빛 무늬가 햇빛에 비치며 눈부시게 빛났다.
진안 군왕이 눈을 감았다. 내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 시녀가 들어와서 내시를 불렀다.
“경 공공, 고 선생께서 찾으십니다.”
내시가 황급히 혼례복을 진안 군왕의 몸 위로 던져 두고 휘장을 내렸다.
“또 무슨 일로 날 찾는 것이냐? 글쎄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궁에서 온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좋을 대로 하라지. 어차피 우리 관저에서 뭘 어쩌지는 못할 텐데.”
내시가 구시렁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시녀들은 내시가 나가는 것을 배웅하고는 새 얼음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시녀들이 나지막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진안 군왕의 귓가에 들려왔다.
“신방 봤어?”
“여기를 신방으로 꾸미지 않고?”
“고 선생이 여기 말고 저쪽 반대편에 있는 처소에 마련했어. 얼추 다 꾸민 거 같던데? 되게 예쁘게 해 놨더라.”
“왕비께서 몇 명이나 데리고 들어오시려나?”
왕비라······.
진안 군왕이 눈을 떴다.
왕비.
진안 군왕은 이불에서 손을 꺼내고 자신의 몸 위에 덮인 혼례복을 찬찬히 만졌다.
혼례복. 이게 혼례복이라는 거구나.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시녀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경 공공.”
인기척이 느껴지자, 진안 군왕은 서둘러 손을 다시 이불 속으로 넣고 눈을 감았다.
내시는 휘장을 들어 올리고, 잠든 듯한 진안 군왕을 쳐다보고는 서둘러 혼례복을 다시 보따리 안에 넣고 물러났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진안 군왕은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베개 아래서 나무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꼭 쥐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사와 저택을 관리하는 아낙, 그리고 주복의 시중을 드는 사환과 시녀밖에 남지 않은 주씨 저택이었지만, 주씨 저택의 마당은 시끌벅적했다.
“공자님, 이것들이 노야께서 남기고 가신 전부입니다.”
집사가 문서 몇 장을 건넸다.
“이건 고방에서 고른,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들과 비단 옷감이에요.”
다른 아낙이 말했다.
“안 봐도 된다. 전부 다 보내거라.”
주복이 성가시다는 듯이 대꾸했다.
집사와 아낙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낙이 집사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사람은 더는 말하지 않고 알겠다며 물러났다.
마차를 꾸미고, 예단이 담긴 함을 마차로 옮기느라 마당 안이 또 한 번 왁자지껄해졌다. 주복은 잠시 마당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마당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던 두 시녀가 주복을 보고는 서둘러 그의 시중을 들러 다가왔다.
“저리 가, 가라고.”
주복이 시녀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젓자,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시녀들은 웃으며 물러났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주복은 잠시 넋을 놓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뒤,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옷궤를 열고 몸이 다 들어갈 정도로 깊숙한 곳에서 상자 한 개를 끌고 나왔다.
주복은 맨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상자에 달린 자물쇠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뒤통수를 스스로 팍 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복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좌우를 살폈다.
“열쇠를 어디에 뒀지?”
주복이 중얼거리면서 탁자와 책장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공자님, 뭘 찾으세요?”
사환이 문밖에서 고개를 내밀고 묻자, 깜짝 놀란 주복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가!”
주복이 갑자기 화를 내자, 사환이 화들짝 놀라고는 혀를 내밀면서 물러났다.
주복은 문가로 다가가 주변에 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하고, 다시 대청 중앙에 섰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침상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주복이 그 안에 든 열쇠를 보고 기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복이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상자 뚜껑을 젖혔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은 지난번에 주복 혼자서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던 때보다 물건 몇 개가 더 늘어 있었다. 물론 여인들이 쓸 법한 아기자기한 물건들이었다.
주복이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어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주복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물건들을 보고 읊조렸다.
“이건 상사(上巳: 삼월 삼짇날) 때 산 선물이고.”
“이건 단오절 때.”
“음, 이거는 보자마자 사야겠다 싶어서 산 거고.”
주복이 상자에 있던 모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서 조용히 읊조린 뒤, 자신의 소매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작은 상자 안에는 팔보여의(八寶如意) 금비녀가 놓여 있었다. 주복이 조심스럽게 비녀를 집어 들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새빨간 보석과 눈부신 금빛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금비녀를 손에 쥐고 한참을 감상하던 주복이 천천히 비녀를 조그마한 상자 안에 넣어두고 손을 놓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비녀가 든 상자는 온갖 장신구와 아기자기한 물건이 담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혼인 축하해.”
주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인 축하한다, 정교랑.
여종들이 몇 차례나 마차를 오가며 분주하게 상자들을 내렸지만, 아직도 짐을 다 옮기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 이부인은 조용히 불경을 읊었다.
방 안에서는 정 대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그 계집이 준 걸 원한다더냐!”
정 대부인이 휘청거리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마당에 놓인 상자 몇 개를 들어 힘껏 집어 던졌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장신구들이 바닥에 쏟아지자, 금은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거렸다.
여종과 몸종들이 재빨리 바닥에 널브러진 장신구들을 주우려고 했지만, 정 이부인이 한발 빨랐다. 정 이부인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장신구들을 치마폭에 주워 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정 대부인이 울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내 아들의 목숨을 판 것이야! 내 아들의 목숨을 판 돈이라고!”
정 이부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 이부인은 옆에 서 있는 여종과 몸종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장신구들을 챙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목숨을 팔기는 무슨. 사낭은 기루에서 기녀에게 죽임을 당했다던데, 그게 우리 교랑과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우리 교랑한테 불똥만 튀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군왕의 왕비가 되는 건데 이렇게 촉박하고 초라한 혼례를 올릴 리가 있겠어?”
중얼거리던 정 이부인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는지 서재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정 대부인이 숨넘어갈 정도로 우는 통에, 몸종과 여종들은 모두 정 대부인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부축하고 다독이고 있었다. 정 이부인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자신이 주운 것들을 품에 안고 자리를 떠나고자 몸을 돌렸다.
문가에 서 있던 두 몸종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 이부인을 바라보았다.
“이부인.”
몸종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정 이부인을 부르자, 정 이부인은 도리어 눈을 부릅뜨고 몸종들을 흘겨보았다.
“왜? 이건 우리 교랑이 보내온 게야.”
정 이부인이 바닥에서 주운 상자 두 개를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나는 교랑의 계모인데, 이 정도도 가지면 안 돼?
몸종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라 가만히 선 채로 멀어져 가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재 안. 정 대노야도 정 대부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야, 이것들은 저희 아씨께서 무엇을 보상하고자 보내신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조귀가 입을 열자, 정 대노야가 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끊었다.
“긴말할 것 없네. 나도 잘 알고 있어.”
정 대노야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교랑이 정말로 무정한 아이였다면, 그때 나더러 서둘러 가족을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겠지. 경성에서 교랑이 얼마나 많은 위험과 험난한 상황들을 겪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됐네. 내가 교랑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할 뿐이야.”
조귀가 정 대노야를 향해 예를 표했다.
“대노야께서 아씨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조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정 대노야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사낭도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은 거지, 교랑이 해친 게 아니야. 교랑이 그의 목숨을 구하고 명성까지 안겨 줬지만, 결국 사낭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어. 사낭의 명줄은 딱 거기까지였던 게야. 무엇보다도, 교랑이 이 일로 자기 탓을 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리고 이것들은······.”
조귀가 큰절을 올리자, 정 대노야는 그가 내민 문서들을 내려다보았다.
“곧 혼례를 치를 텐데 시간이 이리도 촉박하다는 것은, 황실에서 교랑의 체면을 조금도 챙겨 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것들을 강주로 보내와서 뭐 하겠나? 최소한 경성에 남겨 두고 교랑의 기를 세워 줬어야지.”
조귀가 고개를 저었다.
“아씨께서 그런 겉치레를 신경 쓰시는 분도 아니잖습니까. 아씨께서는 본디 집안 어른께서 보관해야 할 문서이니, 집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관부를 거친 문서인데, 판결을 무시할 수는 없잖습니까. 아씨께서는 소인에게 아씨의 모친께서 남기신 혼수만 경성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습니다.”
조귀의 말에, 정 대노야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고, 실행하면 반드시 끝을 본다.
그 애는 농담도 안 하고 에둘러 말할 줄도 몰라. 무슨 일이든 대강하는 법이 없고.
“알겠네.”
정 대노야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랑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교랑이 피땀 흘려 얻어낸 이 재산들을 절대로 망치지 않겠다고.”
“예. 그럼 소인은 내일 경성으로 떠나겠습니다.”
조귀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다 데리고 갈 건가? 자네가 데리고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몇 명뿐이니, 집에서 시종들을 더 데려가게.”
“괜찮습니다. 아씨께서는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으시니까요.”
사람 수만 많은 것보다는 일을 잘하는 사람 하나를 더 좋아하시지요. 예를 들면, 저처럼요.
조귀가 조용히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였다.
정 대노야가 한숨을 쉬면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례가 모레라고 들었는데, 자네가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혼례에 참석할 수는 없겠군. 우리도 그 전에 도착하기는 글렀고.”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절대로 노야께서 경성으로 오시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조귀가 서둘러 말했다. 정 대노야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내가 가면 안 될뿐더러, 우리 집안 자제들도 경성으로 가지 못하게 잘 감시해야지. 한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주를 떠나지 못하게 해야겠어.”
정 대노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당에서 노부인과 정 이노야의 대화가 들려왔다.
“지금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마차부터 준비하지 않고. 우리 교교가 혼례를 올린다잖아. 황실의 종친한테 시집가는데 친정에서 안 가면 쓰겠느냐?”
“어머니,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아비라는 자가 군왕과 혼사를 치르는 걸 뻔히 알면서 강주로 돌아온 게냐?”
“어머니, 그게 다 형님 때문 아닙니까!”
대화를 듣던 조귀가 동정 섞인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바라보았다.
“그럼, 노야께서 말씀 좀 잘 해 주십시오.”
조귀가 몸을 일으키고 예를 표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홀로 차디찬 강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노부인과 아우를 상대하러 갔다.
교랑이 이렇게나 많은 재산을 주었는데, 내가 우리 정씨 가문의 안위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대노야 소리를 듣기도 창피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