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49
교랑의경 649화
동이 트고, 문이 열릴 무렵이었다. 경 공공은 사람들을 데리고 정교랑의 거처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교랑이 시간에 맞춰 나오자, 경 공공 등이 공손히 문안 인사를 올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반근과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당에 있던 소심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여종들에게 오늘 출타할 때 챙겨야 할 것들을 지시하고 있었다. 마당 안으로 경 공공이 들어오자, 소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전하께서 아직 주무시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심의 말에, 경 공공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참으로 다정하시네.”
소심이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고는 경 공공에게 차를 올리라고 시녀에게 지시했다.
“저는 보양탕이 잘 끓고 있나 보러 갈게요. 부인께서 특별히 전하를 위해 끓이라고 당부하셔서요.”
경 공공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소심 낭자, 어서 가서 볼일 보게나.”
경 공공은 대청 안에 서서 편안하게 숨을 골랐다.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가 더없이 상쾌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어딘가에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제야 봤네. 풍경을 언제 달았대.”
경 공공이 작게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신방을 꾸밀 때는 없었는데. 역시 여인은 여인이야. 이런 작은 장식품에도 신경을 쓰고 말이야.
경 공공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곳곳에 신경 쓴 티가 나는군.
향로, 나무와 새가 그려진 병풍, 그리고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낮은 받침대.
저런 자그마한 가구들을 들여왔을 뿐인데, 방 안의 분위기가 사뭇 편안해졌네. 그래, 이런 곳이야말로 집이지.
몇 사람이 대청 안에 서서 기다리던 중, 내실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공공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다.
휘장 안쪽에서 삐져나온 손이 휘장을 걷으려는 듯 버둥거렸다.
“전하.”
경 공공이 기뻐하면서 잰걸음으로 침상에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갑자기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셨는지, 진안 군왕이 음,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입이 떡 벌어진 표정으로 휘장에서 손을 놓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다 경 공공은 연민이 섞인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내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이번에도 윗옷을 입지 않은 채 침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이번에는 어깨뿐 아니라 등 전체에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어제 손으로 꼬집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같은 곳을 또 마구잡이로 꼬집었는지, 몇몇 곳에서는 혈흔까지 보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네. 그래서 부인께서 보양탕을 끓이라고 하셨구나. 정말 제대로 보양하셔야겠어.
“목욕을 하고 싶네.”
진안 군왕의 낮은 목소리가 이불 사이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경 공공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어린 내시들을 재촉하면서 따뜻한 물을 준비하게 했다.
“너무 뜨겁게 하진 말거라. 상처가 따가우실 테니.”
경 공공이 조용히 당부하고는, 방을 나가는 내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태의에게 약이라도 좀 받아 와야 하나?
궁에는 그런 약이 많기는 한데, 다 여인들에게 쓰이는 것이었어. 사내에게 쓰는 약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감히 폐하의 옥체를 이런 식으로 상하게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경 공공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떄, 그의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경 공공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 듯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윗몸을 훤히 드러낸 채, 속바지만 입고 휘청거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한 걸음씩 내디디며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전, 전, 전, 전하!”
경 공공이 말을 더듬으면서 소리쳤다.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부축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진안 군왕의 성가시다는 표정과 불쾌한 말투에 경 공공은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댔다. 그러고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하! 아이고, 전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경 공공이 허리를 숙이고 엎드린 채 울먹였다.
적절한 온도로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목욕통에 몸을 담그던 진안 군왕의 몸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아프시지요?”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이런 건 아픈 축에도 못 낀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하긴, 이 상처들을 만들어 낼 때가 더 아프셨겠지.
경 공공이 울상을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남녀 사이의 그런 일들이 꼭 다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네.
경 공공은 진안 군왕에게 연민의 눈빛을 보내며 더욱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었다.
따뜻한 물 속에 편하게 누운 진안 군왕은 조금 전보다 고통이 덜한지, 천천히 몸에 힘을 빼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실내에서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낯선 이유는 그가 군왕부에서 지내며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했던 향이기 때문이고, 익숙한 이유는 요 며칠 내내 은은하게 맡았던 향이기 때문이다.
진안 군왕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욕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옆에 세워진 옷걸이에는 여인의 치마저고리가 걸려 있었다.
이제 여기는 나 혼자만 쓰는 곳이 아니구나. 같이 쓰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어.
“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밖에서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보양탕이 준비되었어요. 부인께서 먼저 드셔 보시겠어요?”
부인!
진안 군왕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내, 부인!
“전하? 괜찮으십니까?”
경 공공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괜찮다. 요즘 계속 혼미한 탓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구나. 여기서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읊어 보거라.”
경 공공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진안 군왕이 목욕통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진안 군왕이 말하면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아직 몸이 허하시고, 여긴 욕실이라 바닥도 미끄러울 텐데, 어찌 그리 바삐 움직이십니까.
경 공공이 재빨리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진안 군왕이 욕실에서 걸어 나오자, 대청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멈췄다. 구슬발 너머에서,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둘러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리던 시녀들은 진안 군왕이 두 발을 땅에 딛고 욕실에서 혼자 걸어 나온 것을 눈치채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시 고개를 홱 들었다.
진안 군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채의 창가에 앉았다. 경 공공이 그의 곁으로 가서 꿇어앉았다.
두 시녀와 내시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빠르게 욕실을 정리했다.
“부인, 이제 씻으시러 가시지요.”
정교랑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경 공공이 아, 하고 짧게 감탄했다.
아침마다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니, 당연히 땀을 씻어내셔야지.
“왕비께서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역시 보검은 연마해야 다듬어지고, 매화향은 한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피어나는군요.”
“전하, 보양탕을 드시지요.”
진안 군왕의 시녀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왕비께서 전하를 위해 특별히 만들라고 하신 겁니다.”
경 공공이 웃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진안 군왕이 손으로 그릇을 받아오면서 말했다.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하자.”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진안 군왕의 기세는 많이 회복된 듯했다. 경 공공은 감격스럽기도, 기쁘기도 하여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녀들이 자리를 비키고, 경 공공이 조용조용 말하는 소리만이 실내를 채웠다.
같은 시각 욕실 안에서는 반근이 신난 얼굴로 재잘댔다.
“아씨, 전하께서 정말로 다 나으셨나 봐요!”
반근이 정교랑의 머리카락이 젖을까 봐 조심스럽게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있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잖아.”
정교랑이 가볍게 물을 두어 번 끼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느릿느릿 나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반근이 헤헤 웃으면서 하얀 천으로 정교랑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옷걸이에서 새로 꺼낸 치마를 정교랑에게 입혀 주었다.
“나았으면 됐지요.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교랑은 치마저고리를 건네받고 천천히 입으며, 헤실대는 반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 안 나을 줄 알고 걱정했어? 그럴 리가 있겠니?”
반근은 마냥 좋다는 듯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었다.
“죽은 건, 한 명으로 족해.”
정교랑이 말하고는 치마저고리를 마저 입고 욕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은 건, 한 명으로 족해.
사공자님 한 명이면 족하지.
반근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으면서 눈가에 슬픔이 드리워졌다.
정교랑이 욕실에서 나오자, 경 공공은 하던 말을 멈추고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청으로 걸어갔다.
“이제 알겠으니, 그만 물러가거라.”
진안 군왕의 말에 경 공공이 흠칫 놀랐다.
아, 아직 못다 말씀드렸는데요?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춘 정교랑을 슬쩍 보고는 잠자코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지금 밥 먹을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보양탕 그릇을 내려놓았다.
“밥상을 들여라.”
정교랑이 말하자 문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네는 어째 툭하면 자리를 비우는 것인가?”
풀이 죽은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오는 경 공공을 본 고 선생이 물었다. 경 공공이 소매 안으로 손을 넣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고 선생은 경 공공이 암울한 표정으로 한숨까지 쉬자 깜짝 놀랐다.
“왜 그러나? 전하께 또 무슨 일이 생긴 겐가?”
고 선생이 다급하게 물었다.
“전하께서 변하셨습니다.”
경 공공이 또 한숨을 푹 쉬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하의 몸 상태가 또 변했다는 겐가?”
고 선생이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전하의 몸 상태가 변한 게 아니라, 전하께서 변하셨다고요.”
경 공공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하자, 고 선생이 멈칫했다.
“예전의 전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는 걸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시끌벅적한 걸 싫어하셨지요. 심지어는 선생 같은 막료들과 대화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실 정도로요.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내게 이야기하시고,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내 이야기만 들으시고, 내게만 말을 거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왕비만 보였다 하면, 내 말도 끝까지 안 듣고 밖으로 내쫓으신다니까요.”
경 공공이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푹 쉬면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내게 눈길 한 번을 안 주시지 뭡니까. 내가 방해라도 된다는 듯이.”
경 공공의 말을 듣던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때 문밖에서 사환이 뛰어 들어왔다.
“주씨 가문의 공자님이 오셨습니다.”
신부의 친정을 방문하는 날에는 신부의 오라버니 중 한 명이 직접 찾아와 집으로 초대를 하며 신부를 데리고 가야 했다. 하지만 정사낭이 없다 보니, 주복이 그를 대신해서 정교랑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고 선생은 서둘러 사환에게 주복을 안으로 모시라고 한 뒤, 경 공공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만 울게나. 손님 맞이할 시간이네.”
경 공공이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내가 손님맞이 할 게 뭐 있습니까?”
경 공공은 노비 신분이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할 필요 없이, 신부의 사촌 오라버니가 당도했다고 안에 통보하기만 하면 됐다.
고 선생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벌써 스스로 시어머니처럼 굴고 있지 않나. 그러니 당연히 친정의 사촌 오라버니를 직접 맞이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