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62
교랑의경 662화
정교랑의 몸이 살짝 경직되면서 얼굴에 있던 웃음도 굳어졌다가, 곧 원상태로 회복됐다. 사내의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기분 나쁜 거 아니에요. 난 다만······.”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이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것 또한 그녀에게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진안 군왕은 부채를 내려놓고, 나머지 한 손을 마저 뻗어 두 손으로 정교랑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다만 뭐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동작은 다소 기이했지만, 그의 질문은 진지했다.
“난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녀의 삶이 자신보다 더 비참했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불평이나 원망이라 할 수도 없는 간단한 말 한마디에, 진안 군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동시에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릴 적 육가아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앳된 목소리로 형님이라고 불러 주었던 때 받았던 느낌이었다.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
진안 군왕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긴 눈썹, 반짝이는 눈, 작고 오뚝한 코를 바라보던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기울여 앞으로 다가갔다. 어린 육가아를 껴안아 주었을 때처럼, 입을 맞춰 주고 싶었다.
촉촉한 입술을 볼에 갖다 대면서 부드러운 피부와 탄탄한 피부가 서로 맞닿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순간 몸이 경직됐다.
이, 이, 이건, 육가아한테 뽀뽀해 주던 느낌과 달라.
온몸에 기름을 끼얹은 후 불을 붙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르르 불타오르듯 들끓는 피가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문득 그녀를 처음 껴안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깊은 밤이면 절로 그 순간이 기억나 밤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은 선 채로 그녀를 껴안을 때와는 또 달랐다. 몸 아래 눌린 몸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진안 군왕의 목구멍에서는 꿀꺽하는 소리가 났고, 입에서는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났다. 손을 뻗어 몸 아래 깔린 허리를 끌어안자, 볼에 갖다 댔던 입술이 그대로 미끄러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창 아래 쪼그려 앉아 있던 반근과 소심 또한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뒤로 넘어갔다. 둘은 허둥지둥 일어나 도망치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지만, 반근과 소심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나무 아래로 도망친 둘이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두 분은 부부잖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반근은 뭐라 맞장구를 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새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이런 일에 나 끌어들이지 마.”
소심이 반근을 째려보며 말했다. 반근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소심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막 웃고 있는데, 마당 문 밖에서 경 공공이 허둥지둥 들어오며 소리쳤다.
“전하, 전하.”
반근과 소심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뻗어 막았다.
“중요한 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하와 부인께서는······ 바쁘세요.”
반근이 새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두 분이 바쁠 일이 뭐가 있다고!
경 공공이 발을 굴렀다.
“성가시게 굴지 마라. 정말 중요한 일이야.”
경 공공이 앞을 막아서는 반근을 밀치며 말했다. 어릴 때 입궁하여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무공까지 잃은 건 아니었기에 여자 둘의 힘으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경 공공은 둘을 가볍게 제치고 층계를 올랐다.
소심과 반근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다행히 경 공공은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서 예를 표했다.
“전하, 전하.”
전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낭패인 모습으로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내실을 빠져나온 진안 군왕은 금세 후회가 됐다.
얼굴이 어떤지 모르겠네. 옷매무새는 가지런한가? 욕실에 들어가 정리를 좀 하고 나오는 게 낫겠어.
경 공공은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잘도 떠드는 사람이잖아. 에라, 모르겠다. 물어보면 호통을 쳐 입을 막아 버리지 뭐. 내 집에서 내 옷이 좀 흐트러진 게 무슨 대수라고······.
진안 군왕이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없던 그때, 경 공공이 휘장 너머에서 힐끔 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 진안 군왕은 욕실로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하.”
경 공공은 평소와 달리 진안 군왕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같은 시각, 귀가한 진소는 찻잔을 탁자 위로 내동댕이치며 불쾌함을 토로했다.
“안 좋을 게 뭐 있냐고?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시오?”
진소 부인이 억울한 듯 따졌다.
“글동무를 하러 입궐하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노야께서 싫으시다니, 십팔랑한테 십구랑을 데려가지 말라고 할게요.”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글동무를 하러 입궐하는 건 나쁠 게 없지. 내 말은, 지금은 시기가 안 좋다는 뜻이오.”
진소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태후마마께서 태자비를 고르고 계시오. 단랑의 나이라면 피하는 게 좋아.”
무슨 말인지 퍼뜩 깨달은 진소 부인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걱정하셨군요, 노야.”
진소 부인은 다시 차를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태후께서 단랑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해도, 우리 쪽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태후께 그런 마음이 있다면, 자연히 노야한테 물으시겠죠. 노야가 어디 태후의 말에 감히 반박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던가요?”
태후는 관두고 황제의 말에 반박하고 나선 것도 한두 번이 아닌 진소였다. 진소는 찻잔을 받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만 만에 하나······.”
진소가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시녀가 급히 들어왔다.
“노야, 노태야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며 부르세요.”
진소가 말을 멈추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옷 갈아입고 가려던 참이다.”
진소가 말했다. 진소 부인이 태후가 단랑에게 상을 하사한 일을 말하면서 잠시 시간이 지체된 터였다.
진소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집사가 급히 달려왔다.
“노야, 궁에서 조서가 내려왔습니다.”
진씨 저택에서 황궁의 조서를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허둥댈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서가 내려오다니?
보통의 경우 조서를 내리는 건 형식적인 일에 불과했다. 조서를 내리고 그 조서를 받는 건 전부 사전에 어느 정도 소통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었다.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연통도 없이 무슨 일로 갑자기 조서를 내리지?
“큰일이라니?”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경 공공은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후께서 태자비를 정하여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누구더냐?”
진안 군왕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안 군왕보다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의 목소리였다. 어느샌가 정교랑이 나와 있었다. 진안 군왕은 하던 말도 잊은 채 몸을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태후가 태자비를 정하면서,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이 경 공공을 보며 재차 물었다.
부군의 말을 끊기까지 하고······ 너무 무례하시네.
경 공공은 못마땅한 듯 속으로 투덜대며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태후마마께서 진소 상공 가문의 십구랑 낭자를 태자비로 간택했다며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질문에 관한 내용에 더 힘을 실어 대답했다.
진소 상공 가문!
진안 군왕은 놀란 표정이었고, 정교랑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이 천천히 되뇌었다.
대청에 선 진 노태야가 손을 놓자, 손에 들려 있던 장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다랗고 무거운 활이 지면에 닿으면서 육중한 소리를 냈다. 안팎에 있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진 노태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서라······.”
진 노태야가 중얼거렸다.
“진 상공 댁 십구랑 낭자가 틀림없습니다.”
반근과 소심은 문밖에 서서, 대청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홍조를 띠고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진 상태였다.
진단랑이! 태자비가 된다고!
태자비가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경사였으나, 지금의 태자는 바보이니······. 바보에게 시집가는 건 결코 경사라 할 수 없었다.
어쩌다 진단랑이?
“단랑이 오늘 황궁에 갔었지?”
“네. 오전에 갔었습니다.”
경 공공이 정교랑의 물음에 대답했다.
정교랑은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휘장 너머로 마당을 물들인 노을빛이 보였다.
“하룻밤도 안 지났는데, 참 빠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당연히 서둘러야지. 이런 일은 지체하면 안 되거든. 시간을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같은 시각 고능준은 회랑 아래에 서서,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첩실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오늘 처한 상황은 달랐으리라.
“진소 부자의 기민함이라면 분명 진 낭자의 입궁이 석연치 않음을 눈치챌 거야. 태자와 놀아 준 덕에 태후께서 상을 내리신 걸 알면, 분명 대책을 세우겠지.”
그래서 지금이어야 해. 저들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선수를 쳐서 기선 제압을 하면 저들은 수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거든.
진소도 이런 맛을 느껴 봐야지. 월식 사건 이후로, 내가 화를 아주 오래 참았단 말이다. 속 좁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맛이지.
“조서는 진작 작성해 놨었습니다. 오늘을 기다렸지요. 이렇게 빨리 쓸모가 생길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막료 하나가 웃으며 말하자 고능준도 웃음을 터트렸다.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고능준이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진씨 가문의 십팔랑이 아주 과단성 있더군.”
“무엇보다 태후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시잖습니까.”
막료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단순히 태후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고능준이 손을 휘휘 젓자, 한쪽 옆에 있던 시녀가 얼른 부축하여 의자에 앉게 해 주었다.
“진소가 어떤 자던가.”
늦여름 저녁 무렵의 마당엔 바람이 머물고 있었다. 고능준은 한숨을 토하고 홀가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치는 이해관계를 따져야지, 어찌 좋고 싫음으로 결정한단 말인가. 마음에 드는 일이 여러 개라 한들 전부 다 할 수는 있고? 당초 폐하도 그자의 질책과 반박으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해 못마땅해하셨던 게 한두 번이 아니야. 그렇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그자 또한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나라와 정치에 얼마나 이로운 일인지 봐야지.
진 상공은 충신이야. 나는 그자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 점은 부인하지 않아.”
막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고능준을 치켜세웠다.
“대인은 포용력이 뛰어나십니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진 대인으로서는 꽤 뜻밖일 겁니다.”
어디 뜻밖 정도겠는가. 놀라고 분노하다 못해, 필경 반대하고 나서겠지.
“세상사가 어디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던가.”
고능준은 미소를 지은 채 다리를 흔들며 흡족한 속마음을 표현했다.
“딸자식도 이치를 깨닫고 결단을 내렸으니, 아비도 응당 그리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