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69
교랑의경 669화
“그렇다고 꼭 단랑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좀 더 기다리고, 참아 보자. 고능준을 처리하고 나면, 모든 게 쉬워질 게야.”
진 노태야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자, 진소가 부복한 채 대답을 올렸다.
“아버지, 소자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못 기다리십니다.”
멈칫하던 진 노태야는 곧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내년에도 태자의 혼사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정말 아수라장이 될 겁니다.”
내년이라······.
내년에 폐하께서 붕어하시고 바보 태자의 국혼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황손조차 없으면, 조당은 또다시 시끄러워지겠지. 지금은 잠시 물러나 있는 양자 입적 찬성파도 다시 앞으로 나올 테고.
그때쯤이면 폐하께서 병석에 누우신 지도 오래이니 그나마 남아 있는 경외감마저 전부 소진될 터. 딴마음을 품는 작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안 봐도 훤하지.
진 노태야는 진소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 일에서, 가장 초조한 건 네가 아닐 것이다. 조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따라야 할 건, 실상 군자의 도가 아니니라.”
태자가 황제로 등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초조해야 할 사람은 고능준이었다. 앞으로 나와 대책을 내놓아야 할 사람도 고능준이지, 진소가 아니었다.
이 일은 고능준이 권세를 이용해 음해한 것이 자명했다. 진소의 충정과 염치, 군자의 도를 능욕하며 오물을 끼얹고, 명성을 짓밟은 일이었다.
만백성과 문무백관에게 욕을 들으면서도 새 황제가 등극하여 강산을 안정시키도록 도와야 하되, 강산이 안정을 찾으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사람이 바로 진소였다.
소인배의 간계에 당했음을 알면서도 군자의 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막다른 길밖에 없었다. 지금 취해야 할 태도는 군자의 도를 버리고, 상대가 썼던 방법을 그대로 써서 반격하는 것이리라.
군자의 도를 버리라······.
진소는 고개를 들고, 결연한 표정으로 부친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스스로 돌이켜보아 의롭지 아니하면 상대가 보잘것없고 비천한 사람이라 해도 두려워하겠지만, 스스로 돌이켜보아 의롭다면 천만이 가로막아도 나는 나아가리라(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증자의 약조를, 소자는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 * *
앞뒤로 선 두 사람은 진안 군왕부의 연무장 안을 벌써 몇 바퀴나 돌았다. 소심은 벌써 군왕부의 일을 처리하러 갔고, 홀로 남은 반근은 더 이상 걷기는 무리라는 생각에 다른 시녀들과 함께 한쪽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정교랑을 밖으로 끌고 나온 진안 군왕은 막상 연무장을 돌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걷기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기이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진씨 가문에서 이러는 게 가소로워 보여요?”
정교랑이 불쑥 질문을 던지자, 진안 군왕은 멈칫하여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니.
“가소롭다니요?”
딸자식이 바보한테 시집가는 일인데······.
“가엾다고 해야겠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가엾다라······.
정교랑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고개를 들고 똑바로 직시할 수밖에 없다. 함정에 빠진 걸 알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해야 하니 가엾은 건 사실이지.
정교랑의 걸음걸이가 갑자기 빨라졌다.
그래도 가엾다고 하긴 또 좀 그렇네.
걸음걸이가 다시 느려졌다.
“막다른 길에 몰린 건 또 아니잖아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을 뿐이죠. 원하던 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안 군왕도 걸음을 늦추었다.
“그렇다면, 존경할 만하네요.”
존경?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도의를 위해 의연히 나아가는 게 존경스럽다는 말인데, 만약 그 도의가 옳지 않은 거라면?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도가 어떻게 옳지 않을 수 있죠?”
진안 군왕이 따스한 어조로 물었다. 정교랑이 놀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이.
요 며칠간 정교랑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담담해 보였지만, 소식을 들은 후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곤 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진안 군왕은 그녀가 홀로 멍하니 있지 않도록 귀찮게 말을 걸고, 함께 걷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 혼자 쓸쓸하게 넋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서.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요. 당신 옆엔 내가 있어요.
군주에게 충성하는 도를 옳지 않다고 볼 순 없지.
정교랑은 다시 침묵을 지키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 정씨 가문에서 굳게 믿은 천도처럼, 틀림이 없어.
대경 말엽 사방이 혼란에 빠졌을 때, 즉위할 만큼 정통성 있는 황족은 네 갈래로 나뉘었다. 그중 세간 사람들의 눈에 가장 유능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순왕(順王)과 녕왕(寧王)이었는데, 정씨 가문은 황실 혈통과 전혀 상관없는 양국공을 택했고, 모반과 찬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 가며 새 황제를 옹립했다.
그건 천도가 선택한 군주고, 정씨 가문에서 인정한 군주였으니까.
오명을 뒤집어쓰고 전장을 누비며 십 년간 분투한 끝에, 마침내 새 황제가 등극하며 천도를 이행하게 되었지만, 정씨 가문에 돌아온 건 멸문지화였다.
존경해야 하나? 가엾어해야 하나? 가소로워해야 하나?
진 노태야의 마당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진소가 고개를 들자, 대청 안으로 돌아가는 진 노태야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진소가 부친을 부르며 비통한 심정으로 다시 엎드렸다. 진소의 귓가에 되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며느리와 단랑은 준비를 마쳤느냐?”
진 노태야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소는 몸을 움찔했다. 한쪽 옆에서 노복의 대답 소리가 들렸다.
“그럼 마차에 오르고 출발하자. 그래야 날이 저물 때쯤 역참에 당도할 게야.”
“아버지!”
진소가 고개를 들고 목멘 목소리로 외쳤다. 순간 진 노태야의 손에 들린 검이 보였다. 진 노태야는 진소가 고개를 들자마자 손을 휘둘렀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진소의 앞으로 장검이 떨어졌다.
“충과 효를 함께 이룰 수 없는 거라면, 넌 충을 다하고 나서 효를 다하거라. 그럼 네 바람대로 될 게야. 넌 군주께 충성을 바쳤다는 명성을 지킬 수 있겠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오명은 내가 짊어지마.”
진소가 화들짝 놀라 쳐다봤지만, 진 노태야는 더 이상 진소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층계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잘 계산해라. 우리가 나갔다 돌아올 시간 말이다.”
진 노태야가 진소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한 말이건만, 오늘 날씨를 말하듯 가벼운 말투였다.
“노태야!”
노복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진소가 부친을 부르며 부복하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오열했지만,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는 남고 싶으면 남거라. 누구든 남고 싶은 자는 남아도 좋다.”
진 노태야가 느릿느릿 말했다. 오열하던 진소가 일어나 손을 뻗어 장검을 집어 들었다.
“노야!”
노복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진소를 막았다.
“나는 아들을 넷 두었다. 하나는 죽었고 셋만 남았는데, 세 아들 모두 자질이 평범하다지만 상관없어. 내게는 손자도 있거든.”
진 노태야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손자들도 별 볼 일 없다 치면, 증손자도 있지. 이번 대에 안 되면, 다음 대가 있기 마련이야. 청렴결백하게 지내면, 언젠가는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를 자손이 나오겠지.”
진소는 검을 쥔 채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조부님!”
밖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마당에 있던 세 사람은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진단랑이 보였다.
진단랑은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친 차림이었는데, 급히 달려온 터라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단랑, 여긴 왜 왔느냐?”
진 노태야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할아비랑 가자.”
진단랑은 진 노태야의 손을 잡는 대신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조부님, 전 남고 싶어요.”
진단랑이 들어오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진소가 그 말에 복잡한 심경으로 돌아보았다.
“단랑······.”
진소가 중얼거렸다.
진단랑은 고개를 들고 진 노태야를 보며 생긋 웃었다.
“조부님, 저 남을게요.”
진 노태야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단랑, 네가 남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알아요. 다들 쉬쉬했지만, 전 다 들었어요. 제가 태자한테 시집가는 거잖아요.”
진 노태야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진단랑이 손을 뻗어 진 노태야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저 태자한테 시집가고 싶어요.”
진 단랑이 커다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전 태자가 좋아요.”
그 말에 진소는 다시 얼굴을 가렸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단랑의 손을 붙잡았다.
“단랑, 너는 태자를 좋아하지 않잖느냐. 그런 말로 할아비 기분을 맞춰 줄 것 없다. 자, 할아비 말 들어. 할아비랑 같이 가자. 가면서 얘기하자꾸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전 정말로 태자를 좋아해요. 태자는 좋은 사람이에요. 무섭지도 않고요. 제가 웃어 주면, 태자도 저한테 웃어 줘요.”
진단랑이 큰 소리로 말하는데도, 진 노태야는 잠자코 진단랑을 잡아끌었다.
“고얀 것들, 너희는 대체 단랑을 어떻게 돌본 것이야!”
진 노태야가 이번에는 밖에서 불안에 떨며 들어온 여종들에게 소리쳤다. 여종들은 얼른 단랑을 안고 나가려 했지만, 진단랑은 여종들의 손을 뿌리치고 진 노태야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조부님, 조부님은 단랑을 가장 아끼시잖아요. 조부님은 제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죄를 평생 짊어지고 살길 바라세요? 정말 저한테 그러실 거예요, 조부님?”
진 노태야의 몸이 굳어졌다.
“조부님, 전 태자한테 시집가고 싶어요.”
진단랑은 고개를 들고 진 노태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부님, 정말로 제가 원하는 일이에요. 억울하지 않아요.”
샘물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보고 있던 진 노태야가 처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단랑, 너는 모른다. 말이 쉽지, 장차 얼마나 힘겨운 나날들을 견뎌야 할지 넌 몰라.”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몰라요. 하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진 노태야는 고개를 흔들며, 손을 뻗어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리석은 것, 넌 후회하게 될 거야.”
진 노태야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나중에 후회하고 말고는 나중 일이에요. 어쨌든 지금 후회하지 않으면 돼요.”
진단랑은 진지하게 말하고 나서, 다시 한번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지금 이 선택, 전 후회하지 않아요.”
진 노태야는 그런 진단랑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한쪽 옆에 있던 진소는 벌써 꺽꺽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마당 문 밖에 있던 진소 부인은 몸을 휘청이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된 진소 부인이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했다.
대청에 등불을 밝힌 후, 반근은 시녀들과 함께 물러갔다.
“그게 다더냐?”
진안 군왕의 물음에 경 공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진 대인이 오후에 입궁했으나, 오래 머물진 않고 금방 나오셨습니다.”
진안 군왕의 시선이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한쪽 옆에 앉은 정교랑은 이들의 대화를 못 들었다는 듯 등불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다른 소식은 없었습니다.”
경 공공이 나지막이 말하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진 대인이 교지를 거역한 상황이니, 곧바로 동의하고 나설 순 없겠지. 진 대인이 이만큼 양보를 했으면, 태후도 체면을 세워 주실 거야.”
“네, 다만 오래 끌지는 않을 겁니다. 이틀이나 사흘 내로 정해지겠죠.”
진안 군왕은 눈을 떨구며 음 하고 대꾸한 후, 찻잔을 쥔 채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태자 전하께서는 혼인을 하게 되셨군요. 진씨 가문의 여식이면 다른 이보다 훨씬 낫······.”
진안 군왕이 찻잔을 쾅 내려놓았다.
“그만 물러가라. 쉬어야겠다.”
경 공공은 머쓱해하며 알았다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대청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