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80
교랑의경 680화
태후가 웃으면서 눈물을 훔쳤다.
“울긴 왜 우나. 울어도 소용이 없는데.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태후가 긴 한숨을 쉬었다.
“마마, 부디 봉체를 보존하시옵소서. 황태손 또한 마마의 손으로 키우셔야지요.”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문밖에서 상소문을 품에 안은 내시 하나가 황급히 들어왔다.
“마마, 중서문하성에서 전해 온 것입니다.”
내시가 무릎을 꿇고 상소문을 바쳤다. 태후가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댔다.
“그놈들의 눈에는 애가가 옥새나 다름없는 게지?”
태후가 옥새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애가는 동의할 수만 있고, 반대할 수가 없어. 그런데도 막상 애가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그놈들은 허구한 날 반대만 한다 이거야. 황상도 이리 억울했을까?”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뭐냐에 따라 다르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선을 넘었다면, 제아무리 중서문하성의 재상이라도 폐하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고능준이 말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시가 옥새를 가져오자, 상소문을 펼치던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진안 군왕을 경성 밖으로 보내라는군!”
태후가 상소문을 홱 내던졌다.
“고얀 놈들. 저치들은 할 일이 그렇게 없어서 주야장천 저런 거나 쓰나? 황실 일에 이래라저래라 아주 끝도 없이 간섭하려 드는군.”
태후는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고능준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냉큼 도로 내가거라.”
태후가 내시에게 옥새를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 이때, 갑자기 고능준이 손을 들고 내시를 제지했다.
“잠깐.”
고능준이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을 경성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태후가 흠칫 놀랐다.
“왜 또 나쁘지 않다는 게야?”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면 안 된다고 했던 이유는 태자 전하의 몸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태자 전하께서 행방이 가능하다는 게 확실해졌으니, 진안 군왕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지요.”
고능준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상소문은 진소가 쓴 것이니,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입니다.”
좋은 기회라고?
태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능준은 더는 말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태후를 향해 손을 뻗으며 옥새를 찍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후가 내시에게서 옥새를 받아오며 말했다.
“사실 내보내는 게 더 좋긴 하지. 애가도 더는 그 애를 보고 싶지 않았으니.”
옥새 인장이 상소문 위에 진하게 찍혔다.
이제 그만, 썩 꺼지거라.
물건들이 쏟아지는 소리와 탁자가 쿵 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군왕부로 돌아온 시종의 보고를 들은 고 선생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의 옷에 걸린 탁자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과 책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러나 고 선생은 쓰러진 탁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께서, 군왕 전하가 경성을 떠나는 것을 윤허하셨다고?”
고 선생이 다시 한번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옥새까지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중서문하성에서 명을 하달할 테고요.”
시종은 고 선생의 행동에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하긴, 놀랄 만도 하지.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미처 대비할 겨를도 없었어.
“진 상공이 올린 주청이라고 합니다.”
시종이 한 마디 덧붙였다.
왕비가 진 상공의 저택을 찾아가 사람을 때렸다는 이유로? 결국, 왕비 때문에 전하께 불똥이 튀었군.
고 선생이 시종 앞에서 체면을 신경 쓸 겨를도 없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참으로 공교롭구나.”
고 선생이 안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속으로 외쳤다.
참으로 공교롭구나! 너무도 공교로워!
고씨 저택 앞은 짐을 싣고 오가는 마차로 시끌벅적했다.
“왜들 저러지? 이사라도 하나 보네?”
지나가던 행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이사긴 이사지요. 소문도 못 들으셨습니까? 고 대인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대요.”
노점 점포의 점원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러자 행인이 몹시 놀랐다.
“고 대인이 사직을 청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리 대단한 가문의 어르신이 왜 사직을 하겠소?”
“고 대인은 진 상공에게 내쫓긴 겁니다. 고 대인은 외척이니까요.”
점원이 그에게로 바짝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조정의 중대한 비밀을 몰래 알려주는 것처럼 우쭐한 눈빛으로 말했다.
“에헤, 모르는 소리. 진 상공도 외척이잖나?”
행인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꾸했다.
아, 그렇네.
갑자기 말문이 막힌 점원이 혀를 내둘렀다.
“그, 그래도 같은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나 있을 수는 없는 법이잖습니까. 이제 진 상공이 외척이 되었으니, 고씨 가문을 내쫓는 거겠죠.”
“다 똑같은 외척인데, 무슨 배짱으로 누가 누굴 내쫓겠나?”
행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했다.
“진 상공은 좋, 좋은 외척이니까, 할 수 있지요.”
점원이 입술을 삐쭉이며 억지를 부리자, 행인이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좋은 외척, 나쁜 외척이 어디 있소? 왕망이 한나라를 빼앗을 때도, 양견이 북주(北周)를 빼앗을 때도, 나라를 빼앗기 전에는 다들 그들을 청렴결백하고 좋은 관리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었소.”
행인이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점원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떠나가는 행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저, 저, 저 사람이 지금.
“진 상공이 반역을 일으킬 자라고 욕하는 거잖아?”
점원이 행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반역? 이런 말을 내가 입에 올려도 되는 건가?
점원은 여전히 분주한 고씨 저택의 문 앞을 슬쩍 내다보고는, 서둘러 어깨를 움츠리고 노점으로 돌아갔다.
진 상공 저택 앞도 시끌벅적하긴 마찬가지였다. 고씨 저택과 다른 게 있다면, 진 상공의 저택 앞은 그를 만나기 위해서 줄을 서는 관리들로 가득했다는 점이었다. 태자의 국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문 앞에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진소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진소를 찾아온 관리들 또한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행랑에 앉아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자리를 뜨면, 또 다른 무리가 들어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진씨 저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리들의 마차들로 붐볐다.
“바깥에 있는 이들은 대인께서······.”
서재 안, 수하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진소가 손을 들어 그가 더 말하려는 것을 끊었다.
“말할 필요 없다. 바깥에서 무슨 말이 도는지는 본관도 이미 잘 알고 있어.”
수하가 알겠다고 하자, 옆에 있던 막료가 그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수하가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대인, 고 대인은 정말로 짐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모양입니다.”
막료의 말에 진소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알고 있네. 그자가 왜 이렇게 깔끔하게 떠나려는 건지도 잘 알아. 고능준이 잠시 예봉을 피하고자 한다면, 나 역시 이참에 해야 할 것들을 하면 되네.”
막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자가 없는 틈을 타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자의 사람들을 내치면 됩니다. 내년에 고 대인이 경성으로 돌아와도 생각만큼 쉽게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진안 군왕 쪽에서 시간을 끌며 아직도 경성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수왕비가 경성으로 온다니, 모친과 형제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떠나고 싶다나요.”
“신경 쓸 필요 없네. 태후마마께서 이미 청을 거절하셨으니.”
진소가 말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사환이 누군가를 막으려는 듯이 작게 불렀다. 하지만 진소 부인은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안에 있던 막료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다들 물러가게.”
진소의 말에 막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진소가 진소 부인을 보며 물었다.
“부인, 여기는 어쩐 일이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단랑과 태자의 국혼이 결정된 후로, 진소 부인은 진소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웬만하면 진소를 마주치지 않으려 늘 그를 피하던 진소 부인이건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먼저 진소를 찾아왔다.
“교랑을 내쫓는다고요?”
진소 부인이 자리에 앉지 않고 여전히 문가에 서서 물었다. 진소가 몸을 일으켰다.
“그 일은······.”
진소 부인이 진소의 말을 끊었다.
“내게 무슨 도리니 이치니 말할 필요 없어요. 내가 아는 도리란 딱 한 가지예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와서 문을 두드려도 무섭지 않다는 거죠.”
진소 부인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홱 돌리고 방을 나갔다.
“칠랑.”
진소가 재빨리 진소 부인의 팔을 붙잡으며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이건 정 낭자에게도 좋은 일이오. 경성에 남아 있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정 낭자가 경성에서 계속 이렇게 분란을 만든다면, 언젠가는 그 기고만장함이 낭자 스스로를 해치게 될 거요.”
진소 부인이 몸을 돌렸다.
“아니요. 당신이 틀렸어요. 정 낭자가 말썽을 피우는 게 아니에요. 늘 다른 사람들이 정 낭자에게 시비를 거는 거죠.”
진소 부인이 진소의 손에서 팔을 힘껏 빼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진소 부인이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흐느꼈다.
“어머니, 어머니.”
진단랑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진소 부인이 서둘러 소매로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짜내며 진단랑을 맞이했다.
“어머니.”
진단랑이 해맑게 웃으면서 활을 손에 쥐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그걸 들었니? 발 조심해. 아주 무거운 활이니까.”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활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진단랑은 활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니, 이건 우선 어머니한테 맡겨 둘래요. 궁에서 온 사람들이 어찌나 성가시게 굴던지. 다들 저더러 활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소리밖에 안 하더라고요.”
진단랑이 투덜대자, 진소 부인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나중에 이걸 가지고 놀고 싶을 때, 어미한테 오렴.”
진단랑이 기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며칠 가지고 놀지도 못하겠지.
진소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다시금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건 정 언니가 저한테 선물해 준 거예요.”
진소 부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진단랑은 웃으며 바닥에 놓인 활을 매만졌다.
“조부님께서 그러시는데, 정 언니의 궁술이 엄청나대요! 저더러 천천히 잘 배우라고 하셨어요.”
진단랑이 고개를 들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니, 열심히 연마하면, 저도 정 언니만큼 훌륭한 궁술을 익힐 수 있겠죠?”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진단랑이 헤헤 웃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활의 이곳저곳을 만졌다. 진소 부인은 손을 뻗어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참자 미소가 일그러졌다.
진안 군왕부 역시 떠날 준비로 한창이었다. 진안 군왕이 방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봤던 다른 여인들은 어딜 간다 하면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데, 당신은 정리할 게 별로 없나 봐요?”
반근과 소심도 그리 분주해 보이지 않자, 진안 군왕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니 별로 챙길 게 없네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반문했다.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나야 뭐. 빈손으로 여기에 왔으니, 당연히 여기에 있는 물건들도 내 것이 아니지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정교랑을 향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우린 역시 잘 맞네요.”
바깥에서 얼마 없는 짐을 정리하고 있던 반근과 소심이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는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안에 있던 정교랑도 웃으면서 진안 군왕의 새빨개진 귀를 쳐다보았다.
“아씨, 이건 몸에 지니고 가시겠어요? 아니면 마차에 실어 둘까요?”
반근이 상자 하나를 들고 와서 물었다. 정교랑이 상자를 힐끔 보고는 대답했다.
“몸에 지니고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