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91
교랑의경 691화
범강림의 대답을 들은 황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혹여 정교랑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주복이 여기까지 찾아와 범강림과 술을 마시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황씨는 주복이 정교랑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주복이 있을 때를 피해 이 일을 물어보았다. 주복이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눈이 뒤집혀 칼을 들고 쫓아갈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우리도 알고 있는 자들이오. 누구인지 한번 맞혀 보겠소?”
범강림이 술잔에 술을 채운 뒤, 황씨를 향해 물었다.
황씨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요?”
우린 경성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황씨가 긴장한 기색으로 범강림에게 물었다.
“누군데요?”
범강림이 여유롭게 술잔을 들어 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고 관인.”
놀란 황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라고요?”
황씨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의 셋째 아들이자 고씨 집안의 열넷째, 정사낭과 기루에서 화괴 다툼을 했던 그 고십사 말이오.”
범강림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확실한 설명을 들은 황씨는 더욱 놀란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이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어요?”
마적 따위가 어떻게 고씨 가문의 자제인 고 관인을 죽일 수 있지? 아니다. 고십사가 어쩌다 마적의 손에 죽임을 당한 거야?
값비싼 수레를 끌고 장사를 하러 다니는 거상도 아니고, 호위도 없이 혼자 다니는 서생도 아니고, 무려 고 관인인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성씨를 가진 그 고씨 가문의 고 관인이?
“그럴 리가 없기는. 당초 아우들이 죽었을 때, 그 빌어먹을 놈들은 공로와 명예까지 빼앗아 갔소. 그때 당신은 아우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명예를 회복할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이나 했소? 걸음마도 안 뗀 소보아가 관직을 얻을 거라는 예상은? 무원산 형제들의 미담이 경성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거라는 예상은? 그렇게 많은 서생이 우리 형제의 이름을 수없이 외쳐대며 글씨 연습을 할 날이 올 줄 알았냔 말이오.”
범강림의 말에 황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죠. 그럴 날이 올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요. 우리처럼 미천한 사람들은 죽으면 죽는 거고, 죽고 나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게 당연지사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형제들의 미담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문인들의 글귀에 쓰이고, 비석에도 새겨졌어요. 자신의 이름을 청사에 길이 남기겠다는 포부도, 그런 걸 말하는 거겠죠.
“그러니, 이 세상에 그럴 리 없는 일은 없소.”
그 여인이 있는 한.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히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공주부 진(秦)씨 저택.
진 부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서재로 향했다. 하지만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문 앞에 여종이나 사환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 부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서재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진 시강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진 부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무슨 일이오?”
“십삼은 어디로 뭘 하러 간 거예요?”
진 부인의 얼굴에서는 평소 같은 웃음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했잖소. 오표(吳彪)의 생일을 맞아 나 대신 축하를 하러 갔다고.”
진 시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 부인이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십삼한테 미안해요. 내가 십삼을 불구로 낳아서요. 십삼을 그렇게 낳은 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잘못이에요.”
진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 시강이 몸을 일으켜 진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게 어떻게 당신의 잘못이라는 것이오?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당연히 나의 잘못이거늘.”
진 시강이 다정하게 진 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하자, 진 부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그의 손을 피했다.
“만에 하나 십삼이 죽게 된다면, 진칠낭, 당신은 평생 속죄해도 그 죄를 못 씻을 거예요.”
진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진 시강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괜한 생각 마시오. 멀쩡히 살아 있는 애를 두고 왜 죽느니 사느니 하는 말을 하는지, 원.”
진 시강이 다시 진 부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진 부인이 진 시강의 손을 홱 내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서 고십사가 죽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바로 십삼이에요! 십삼은 정교랑을 좋아하는 만큼, 고십사를 증오한다고요! 자기 목숨을 고십사의 목숨과 맞바꾸라고 해도, 십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큼 그렇게 하겠다고 할 아이예요.”
진 부인이 진 시강의 옷깃을 잡았다.
“십삼은 이미 미쳤어요. 그런데 당신까지 같이 미치면 어떡해요?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이 어떻게 십삼한테 그리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있냐고요! 빨리 내 아들 십삼을 돌려놔요. 빨리 돌아오라고 하란 말이에요!”
진 시강이 진 부인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 토닥이려고 할 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렸다.
진 시강은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진 부인도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이곳은 진씨 저택 안이었다.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 중에 이렇게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들이닥친다는 것은······.
“아이쿠.”
문가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젊은 사내가 몸을 돌리면서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자고로 예에 어긋난 것은 보지 말아야 하는데, 소자가 결례를 보였습니다.”
진 시강이 목구멍을 꽉 막는 듯한 숨을 드디어 토해냈다. 진 부인이 진 시강을 밀쳐내고 한달음에 진호에게 달려가 그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 못난 녀석아. 그 여인을 위해서라면, 이 어미도 필요 없다는 게냐? 이 불효막심한 것.”
진호가 헤헤 웃으면서 진 부인을 토닥였다.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아들의 마음을 쿡 찌르는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소자에게 무슨 여인이 있다고요. 소자에게 여인이란 오직 어머니뿐입니다.”
진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제게 무슨 여인이 있다고요. 저한테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진 부인은 그 한 마디가 더욱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진 부인이 목놓아 울면서 진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이 바보 아들아.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고십사가 죽었다고?”
같은 시각, 소식을 들은 진소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고십사가 마적에게 살해됐다니? 그럴 리가 있나?”
진소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마적의 소행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청원현에서 보내온 사람의 말로는 마적의 소행이라는데, 고씨 가문에서는 절대로 마적에게 당한 게 아니라고,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십사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이지요.”
수하가 대답했다. 진소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정말로 고십사가 죽었다고? 게다가 마적의 손에? 그것도 귀향길에서?”
진소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너무 공교롭······.”
공교롭다는 단어가 나오자, 진소는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마적! 청원현!”
지금 청원현을 지나는 사람은 고씨 가문뿐만이 아니야!
진안 군왕도 있잖아.
아니지, 아니지. 진안 군왕뿐만 아니라, 진안 군왕과 함께 송평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
진소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병풍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설명되는군.
고능준이 깔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던 건, 가는 길에 진안 군왕을 해치우기 위함이었어. 며칠 전부터 경성에 소문이 자자하던 청원현 마적 이야기도 고씨 가문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테고.
이래서 세상에 공교로운 일이란 없다는 것이야. 모든 게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긴 하나, 다 어느 한순간을 위해 미리 짜 둔 계획인 게지!
“언제 일어난 일이냐?”
진소가 물었다.
“어젯밤입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어젯밤이라면, 비바람이 있던 평범한 밤이었는데, 그리 큰일이 벌어졌었다니.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을지.
진소가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하지만 결국 죽게 된 건 다른 사람이군.
진소가 병풍 앞에 멈춰 서서 그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능준이 깔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던 건, 가는 길에 진안 군왕을 해치우기 위함이었다지만, 그 여인과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겠다고 했던 건 무엇 때문이지?
그 생각이 스치자, 진소는 눈앞이 번쩍 뜨였다.
정교랑이 진씨 저택을 찾아와 소란을 피운 탓에, 진소는 결국 굳은 결심을 하고 진안 군왕과 정교랑에게 경성 밖으로 떠날 기회를 주었다.
정교랑이 경성을 떠나는 일에 동의했으니, 고능준으로서는 진안 군왕을 해치울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고능준에게 상대를 해치울 기회가 주어짐과 동시에 정교랑에게도 상대를 해치울 기회가 주어졌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니까.
“고능준이 계획을 세우고, 나도 계획을 세웠지만, 이 모든 건 결국 그 여인의 계획 안에 들었던 것이로구나.”
진소가 병풍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붓에 먹물을 찍고 병풍 위에 진한 동그라미 하나를 천천히 그려 넣었다.
“부인께서 일찍이 계획하셨던 거로군요.”
마차 안, 고 선생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번에 진소가 군왕 전하를 탄핵하여 경성 밖으로 내쫓은 것 또한, 부인께서 진소와 미리 상의하신 일이었습니까?”
고 선생이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정말로 경성을 떠나고 싶었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진 상공과 생각이 같았던 거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어 성공할 수 있었던 일이로군.”
진안 군왕이 끼어들어 말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 선생을 흘깃 쳐다보았다. 고 선생은 진안 군왕의 성가시다는 표정을 못 본 척하고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물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요. 부인께서는 진 상공이 원했던 것과 고씨 가문이 원했던 것을 모두 알고 계셨기에, 이번 일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그, 무슨 창 같은 걸 준비하여 매복에 대비하셨던 거고요.”
고 선생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고 관인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고 선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이게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야. 당시 매복 현장에서 고 관인은 보이지 않았거든.
“화약 안에 향료를 하나 섞어 넣었어요. 도망친 사람들이 제 주인을 찾아가 보고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넝쿨을 더듬다 보면 참외를 따기도 하는 법이니 단서를 줘야죠.”
고 선생이 아, 하고 감탄했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그래서 부인께서 저희더러 그자들을 쫓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거였습니다!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 그 소굴을 찾아내신 겁니다.”
정교랑이 잠자코 있자, 진안 군왕이 마른기침했다.
“전하, 경 공공이 특별히 두 분을 위해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달였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
고 선생이 얼른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조금 잠이 오는군.”
졸리다고까지 말했으면, 제발 말귀를 좀 알아들었으면 하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