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718
교랑의경 718화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태자가 내시들에게 둘러싸여 왕부를 떠나자, 소심과 반근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복은 창가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는 방에 누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너무 황당하잖아. 전하께선 공자님이 저러는 걸 용인해 주시다니.”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입술을 삐죽였다.
“전하께서는 아씨를 포용해 주시잖아. 아씨께서 소중하게 여기시거나 좋아하시는 건, 전하께서도 늘 아끼고 포용해 주셔.”
소심이 나지막이 말했다.
반근이 잠시 입을 꾹 닫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아씨께서 어서 깨어나셨으면 좋겠다.”
동이 틀 무렵, 성문이 평소보다 일찍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탄 채 성 밖으로 질주했다. 조용한 경성 거리 위로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말굽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전하,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아직은 너무 위험합니다.”
방백종을 바짝 따라가던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괜찮다. 위험할 때는 이미 지났어. 곧 태자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고, 조정의 일도 잠시 중단됐으니, 혼자 잠시 나갔다가 와도 무방할 것이야.”
바람이 날리자 두모를 눌러쓴 방백종의 얼굴이 보이다 안 보이다 했다. 경 공공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방백종이 돌연 말고삐를 당기며 말을 세우고 한 방향을 내다보았다.
“아, 전하. 저쪽은 태자비께서 무원산 형제들과 정사낭을 위해 세운 무덤입니다.”
경 공공이 조용히 말했다.
정사낭.
방백종이 작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를 보러 가지 않았구나. 따지고 보면 정사낭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인데.”
“전하,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경 공공이 고개를 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방백종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무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덤 앞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주위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방백종이 말에서 내려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전하께서는 아직 무원산 비석의 글씨를 보신 적이 없으시지요? 가히 천하제일 행서라고 불릴 만합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방백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원산 형제들의 비석을 차례로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저건, 뭐지?
방백종이 다급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이게 뭐지?
“이게 무엇이냐?”
방백종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방백종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경 공공이 그의 곁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이건, 정(程) 자입니다. 엇, 그런데 왜 한 글자만 새겨져 있지요? 이것도 태자비께서 새기신 것인가? 아직 글자를 못다 새기신 같은데요?”
경 공공의 말이 끝나자, 방백종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화들짝 놀란 경 공공이 몸을 살짝 떨고는 경악한 표정으로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방백종은 고개를 젖히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바람에 두모가 벗겨지면서 환하게 웃는 방백종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는 새길 수 있겠구나.”
방백종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다 새길 수 있겠어!”
이제, 다 새길 수 있겠어!
이제! 다 새길 수 있단 말이다!
날이 밝아오고, 성 밖을 오가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몇몇 행인들은 무덤 앞에 있는 방백종 일행을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전하.”
경 공공이 주위를 살피고는, 무덤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방백종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돌연 큰 웃음을 터트리고 난 후, 방백종은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 ‘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비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왜 저러시는 거지?
근래 들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기도 했고, 너무 갑작스럽게 모든 일이 일어나기는 했어. 고씨와 진씨가 태자를 음해했고, 선문 태자께서 돌아가시자 전하께서는 곧바로 황자로 입적되어 황태자로 책봉되셨지.
그런데 이 와중에 태자비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온갖 일들이 정신없이 들이닥쳤어. 세간에 떠도는 갖가지 낭설들은 무시한다 해도, 전하께서는 너무도 고단한 나날들을 보내고 계셔.
가장 힘드신 일은 아마도 태자비께서 계속 깨어나지 못하시는 거겠지?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하께서는 요새 통 사람들과 대화도 하지 않으시고, 오늘은 급기야 이렇게 이상한 행동까지······.
안 그래도 집에서 혼수상태인 태자비를 지켜보느라 마음이 좋지 않으신데, 바람을 좀 쐬러 나왔다가 하필 태자비께서 새겨 둔 비석을 보게 되어 더욱 슬프신가?
“이 글씨들 좀 보게.”
방백종이 자신의 앞에 놓인 비석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히 보았습니다. 태자비 전하께서 글씨를 참 잘 쓰시지요.”
방백종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원산 글씨들을 기억하느냐?”
“당연하지요. 그 몇 글자는 무려 천하제일 행서라고 불리는걸요.”
경 공공이 대답했다.
“아니, 내 말은, 이 글씨들이 어떻게 쓰인 건지 알고 있느냔 말이다.”
방백종이 손을 뻗어서 비석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서무수.”
방백종이 글씨를 읊자 경 공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그때 태자비께서 얼마나 배짱이 크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그때 전하께서 나서서 폐하 앞에서 태자비를 감싸 주셨던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가 아니셨다면, 태자비께서 격노하신 폐하를 몇 번이나 더 도발하셨을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무섭습니다. 그리고 전하가 아니셨다면, 태자비께서는 그렇게 빨리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인정받고, 그렇게 빨리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하셨겠지요.”
옛일을 회상하는지, 방백종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께서 참 오랜만에 저런 미소를 보이시는군.
“억울함을 해소했다고 해서 끝이 난 게 아니었지.”
방백종의 말에 경 공공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억울함이 해소된 게 무슨 대수라고요. 태자비가 형제들의 억울함을 푸는 걸 막았던 사람들도 다 끝이 좋지 않았지요. 고능준에게 보란 듯이, 서북 군정을 손에 쥐고 있던 강문원을 기어이 쓰러트리셨으니까요. 태자비께서는 강문원을 해치우고 나서야 이 비석에 이름들을 새기셨······.”
경 공공이 말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래, 생각났어.
무원산 무덤의 비석은 본디 무명비였지. 무원산 형제들이 명예를 되찾고 강문원이 지방으로 좌천된 후에야 비석에 글씨가 새겨졌어.
형제들이 명예를 되찾고 강문원이 지방으로 좌천된 후, 그러니까 억울한 게 있다면 그 억울함을 풀고 나서, 복수할 게 있다면 복수를 끝내고 나서야······.
비석들을 차례로 훑어보던 경 공공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정사낭의 비석.
경 공공은 당초 정사낭을 안장할 때,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그 비석에 새겨진 ‘정’이라는 한 글자가 날카로운 바늘처럼 그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언제 새겨진 거지?
정사낭의 장례를 치렀을 때, 온 경성의 사람들이 태자비께서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친오라비인 정사낭의 이름을 드높일지 궁금해했지만, 태자비께서는 정사낭을 위한 술을 빚지도, 그를 위해 불꽃놀이를 하지도 않으셨다.
태자비께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으셨어. 정사낭이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잊을 리가 있나. 절대로 잊을 리가 없지. 비석에 글씨를 새기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이다.
술이나 불꽃놀이 따위로 어찌 친오라비의 죽음을 기릴 수 있으랴.
피로 맺어진 원수라면, 피로 갚아야 하는 법.
고십사가 죽고, 이젠 고능준까지 죽었으니.
경 공공은 갑자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으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리가 후들거린 경 공공은 결국 털썩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니 이제는, 다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방백종이 무덤 앞을 천천히 떠났다.
“전하!”
경 공공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방백종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방백종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밤바람이 매섭게 불어오자, 활짝 열린 창틀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소심이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닫았다.
그때 누군가가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왔는데, 오늘 밤에는 왕부로 돌아오지 않으신대. 내일 선문 태자의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라, 오늘은 선문 태자의 빈소를 지키시겠대.”
반근의 말에 소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주복이 침상 옆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자님도 오늘은 일찍 쉬세요. 오늘 밤에는 저랑 반근이 여기에 있을게요.”
소심이 주복에게 다가가 말하자, 주복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됐다. 내가 여기 있겠다.”
반근과 소심은 이젠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실 작정인 거지?
설마 아씨께서 평생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공자님도 평생 이렇게 아씨의 곁을 지키시려는 건가?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자, 반근은 화들짝 놀라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왜 그래?”
소심이 깜짝 놀라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냐, 아냐. 모기가 있어서.”
반근이 웃으면서 대꾸하고는 정교랑의 몸을 옆으로 돌려 주었다.
늦가을에 모기가 어디 있어.
소심이 반근의 마음을 눈치챈 듯 작게 탄식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반근을 도와 정교랑의 자세를 바꿔 주었다.
정교랑의 몸은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혹여 욕창이 생기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이 태의는 수시로 정교랑의 자세를 바꿔 주고 안마해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소심과 반근이 침상에 걸터앉아 정교랑의 손과 발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지금까지 아씨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다들 그 주제를 회피하려는 것 같아.
아씨가 깨어나실 거라는 말을 해 주는 사람도 없어. 어쩌면 아씨는 정말 이대로 평생 깨어나지 않으실지도 몰라.
아씨께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어떡하지? 아씨야 육공자님께서 평생 지켜 주신다지만, 태자 전하는?
반근이 정교랑의 귀밑머리를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기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곁눈질로 탁자 위에 놓인 태자비 책봉 조서를 바라보았다.
반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정교랑의 다른 손을 잡고 안마하기 시작했다.
안 울어. 다시는 울지 않을 거야. 괜찮아. 내가 쭉 아씨의 곁을 지킬 테니까.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강주의 정씨 저택이 시끌벅적해졌다.
“어떻게 된 것이냐? 대낭, 도대체 무슨 일이야?”
떨리지만 힘 있는 노파의 목소리가 마당 안에 울려 퍼졌다.
정 대노야가 서둘러 마당으로 걸어 나오자, 지팡이를 짚고 정 이노야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정 노부인이 보였다.
“대낭, 교교가 곧 황후가 된다고 하던데, 우리는 왜 아직도 경성으로 가지 않는 것이냐? 교교의 혼사도 놓쳤는데, 교교의 황후 책봉식까지 놓치면 되겠느냐.”
정 노부인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자,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준비하고 있습니다.”
“형님, 누굴 속이려는 겁니까? 안 갈 준비를 하는 건 아니고요?”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 노부인을 부축했다.
“어머니, 이번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정씨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직 폐하께서 건재하시니 그런 말씀은 삼가셔야 합니다.”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자, 정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나도 알다마다. 얼마나 큰일인지 굳이 일러 주지 않아도 알아.”
정 노부인이 정 대노야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옛날에 점쟁이가 말하기로는, 교교가 아주 귀한 명을 타고났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일찍이······.”
정 노부인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건지 모를 옛날 일을 중얼거렸다. 노모의 말을 들은 정 대노야는 속으로 탄식하면서도, 겉으로는 정 노부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