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731
교랑의경 731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잠에서 깼다.
아니, 지금은 진소 부인이 아니라 진아리(陳阿李)라고 불린다. 죄가 있는 사람의 부인은 속칭으로 불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성이 진씨고, 친정의 성이 이(李)씨이니, 그녀는 진아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화로에 있던 숯은 진작 타서 재로 변해 있었다. 텅 빈 침상 옆자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진아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랑.”
진아리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조정이 진소의 죄를 묻고자 삼족의 가산을 몰수하고 벌을 내릴 때, 진씨 가문 여인 중 몇 명은 집안의 변고를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단랑은 줄곧 침착한 모습으로 자신을 잘 따랐지만, 그래도 그녀는 불안하기만 했다. 혹여라도 단랑이······.
진아리가 고개를 들고 벽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회백색 벽에 장궁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문밖에서 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낡은 솜옷을 입은 진단랑이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
“눈이 와요!”
눈을 치우는 소리가 저택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깨웠다. 잠에서 깬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서 진아리와 진단랑이 눈을 치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밤새 두껍게 쌓인 눈 때문에 모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셋째 형수님, 제가 하겠습니다.”
한 사내가 나서서 모녀를 도우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그의 아내가 그를 흘겨보면서 말렸다.
“어제 짊어지고 온 장작도 다 안 팼잖아요. 어서 가서 장작이나 패요.”
사내가 민망한 듯 나지막이 대꾸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니잖소.”
여인이 눈을 부라리며 다 들으라는 듯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평생 장작이나 패야 되는 처지가 된 게, 누가 지은 죄 때문인데요!”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커다란 저택 안, 여러 방의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다들 모녀가 눈을 치우는 모습을 흘끔 보기만 할 뿐, 두 사람을 도우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아리 모녀는 사람들의 냉랭한 태도를 보지 못한 듯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쓸기만 했다. 문 앞, 마당 안, 담벼락 구석까지 빠짐없이 치웠다.
“단랑, 힘들면 잠시 쉬거라.”
진아리가 말했다.
진단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나무 아래로 눈을 힘껏 밀어 쌓았다. 눈더미를 잠시 바라보던 진단랑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홱 돌리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단랑? 손으로 눈 만지지 마라. 그러다 동상 걸려.”
진아리가 소리쳤다.
“괜찮아요.”
진단랑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굴리기 시작했다.
“십구 누이.”
문밖에서 누군가가 진단랑을 불렀다.
진아리가 고개를 돌렸다. 젊은 사내 하나가 삽을 든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십육낭이구나.”
진아리가 미소 띤 얼굴로 진십육낭을 맞이했다. 진십육낭이 진아리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리고 손에 든 삽을 고쳐 들었다.
“백모님, 누이와 함께 잠시 쉬시지요. 여기 있는 눈은 제가 마저 치우겠습니다.”
진아리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옆으로 가서 잠시 쉬었다.
“너희 집에 쌓인 눈은 다 치웠니? 어머니 병세는 좀 어떻고?”
진십육낭은 진아리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동시에 능숙하게 삽을 다루면서 마당 곳곳에 남은 눈을 깨끗하게 치웠다.
“십육 오라버니, 눈덩이 하나만 뭉쳐 줘요.”
진단랑이 옆에서 소리쳤다.
“괜히 네 오라비 귀찮게 하지 말아라.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진아리가 얼른 진단랑을 나무랐지만, 진십육낭은 벌써 진단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진단랑에게 눈사람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진단랑과 함께 무 꼬리와 나뭇가지 등을 주워와 눈사람을 장식했다.
“진짜 예쁘다!”
진단랑이 손뼉을 치면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 다 만들었으니, 그만 들어가 봐.”
추워서 새빨개진 진단랑의 두 손과 볼을 보자 마음이 아팠는지 진십육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단랑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마당 앞을 지나가면서 진단랑과 진십육낭이 만든 눈사람을 보고는 입술을 삐쭉였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됐는데, 어쩜 저렇게 즐거워할 수가 있담. 정말 뻔뻔하고 양심도 없지.”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진십육낭이 미간을 팍 찌푸리면서 따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진단랑이 재빨리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라버니, 이거 동상 연고예요. 경성의 이춘당에서 만든 거고요.”
진단랑이 진십육낭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이춘당의 동상 연고는 서북 군영에만 납품하는 약이었다. 군인이 아닌 사람이 이춘당의 동상 연고를 사려면 엄청난 값을 내야 하기에, 경성에서도 쉬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십육낭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알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누가 선물해 준 거예요.”
진단랑은 설명을 덧붙이면서도, 누가 선물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진십육낭은 무언가 눈치챈 듯 더는 묻지 않고 동상 연고를 다시 진단랑에게 돌려주었다.
“오라버니는 추위 안 타니까, 남겨 뒀다가 너 써.”
“그럼, 사촌 언니들은 평소 손 씻을 때 동상 걸리기 쉬우니까, 언니들한테 줘요.”
진단랑이 말했다.
진십육낭이 더는 거절하지 않고 웃으면서 진아리를 향해 예를 표했다.
“백모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육 오라버니, 돌아가면 조부님께 말해 줘요. 밥 먹고 나서 활쏘기 연습하러 조부님께 갈 거라고요.”
진단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십육낭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삽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떠났다.
날씨가 춥다 보니, 둔보(屯堡: 파병된 군대가 강제 이주된 민간인과 함께 자급자족하는 군사적 취락)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사내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언짢은 기색으로 걸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날씨에도 밭에 나가야 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이람.”
사내들은 진십육낭을 보자, 그를 흘겨보면서 핀잔을 줬다.
“십육, 뭐하러 그 모녀를 챙겨 주고 있어?”
“그래.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건데.”
다른 사내가 맞장구치면서 발을 굴렀다.
진십육낭이 그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친족이라는 게 뭔가요. 영광이 있다면 함께 누리고, 손해를 본다면 함께 봐야지요. 다들 함께 영광을 누릴 때는 불평 한마디 없더니, 손해를 보게 되니 어찌 이리 원망하십니까.”
사내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가문 전체가 이렇게 되었는데, 불평 한마디도 못 하나? 그리고 진씨 가문의 영광을 그자 혼자서 일궈 낸 것도 아니잖아. 결국엔 그자 손으로 짓밟아 버렸지만.”
“맞아. 죄인의 처지가 되어 우리 가문 자제들의 앞길이 전부 막혔어. 그런데도 우리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큰절을 올려야 하나?”
“다른 건 제쳐 두고, 십육낭, 너만 봐도 그렇잖아. 네 혼사도 신부 쪽에서 물렀어. 글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네 두 손으로 이렇게 곡괭이 들고 밭이나 일구는 게 억울하지도 않아? 여태 공부한 게 다 무용지물이 됐는데?”
사내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한마디씩 얹었다.
진십육낭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꼭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니니, 무용지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진십육낭이 고개를 들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백부님께서 잘못하신 게 있다면, 그건 백부님의 잘못일 뿐입니다. 무고한 백모님과 단랑에게 화풀이하고 그들을 원망하는 게 과연 응당한 일일까요?”
사내들이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휴, 됐다. 우리가 너만큼 아량이 넓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진십육낭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더구나 백모님과 단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살 수도 없었습니다.”
진소가 저지른 죄는 역모의 대죄였다. 삼족이 연루되는 중죄이므로, 집안 사내들은 영남 지역이나 서북 군영으로 보내져 병졸이 되거나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고능준의 집안이 그러했다. 조정에서는 태후의 체면을 봐서 고능준의 삼족을 벌하지는 않고, 고능준의 일족만 벌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문의 실세였던 고능준의 일족을 벌한다는 건, 고씨 가문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맥을 끊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반해 진씨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둔보의 농토를 가꾸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가문 전체를 구주(衢州)로 보내 한곳에 모여 살게 하여, 죄를 지은 여느 집안들처럼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사실상 진씨 가문은 과거의 호화로운 대저택, 비옥한 농토, 저잣거리의 점포, 그리고 비단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잃었을 뿐이지, 둔보의 농토를 가꾸며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지낼 수 있었다. 최전방에 보내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경우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건가?
사내들이 멈칫하며 진십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라고?
진십육낭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
진십육낭의 가족들이 사는 거처 앞은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마당 안에서는 진 노태야가 권법을 수련 중이었다.
“네 아비는 대나무 구하러 산에 갔다.”
진 노태야의 말에, 진십육낭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삽을 내려놓았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밥부터 먹고 가거라.”
진 사부인이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진 사부인의 딸들도 진십육낭의 밥을 차려 주려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 이건 단랑이 준 동상 연고예요.”
진십육낭이 진 사부인에게 연고를 건네며 말했다.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접시에 올려진 전병 하나를 집어 들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랑 교대하고 올게요.”
진 사부인이 몇 걸음 쫓아가면서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진십육낭은 벌써 문밖을 나간 후였다.
“어디서 난 연고래?”
진 사부인이 손 위에 놓인 동상 연고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춘당 거예요. 어머니, 이제 손에 동상 걸릴 걱정은 없겠어요.”
진 사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온 딸 하나가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과거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귀한 규수로 자라던 딸들이 지금은 부엌에서 칼질을 하고, 탕을 끓이고, 뜯어진 옷을 꿰매느라 십여 년간 깨끗하게 관리해 오던 손이 불과 달포 만에 몹시도 거칠어졌다. 날이 추워지자 손은 더욱 빨갛게 부르트거나 갈라지곤 했다.
이춘당 세 글자에 흠칫 놀란 진 사부인이 동상 연고를 딸들에게 건넨 뒤, 진 노태야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진 사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이춘당이 강주 정씨 가문의 가업이라고들 하지만, 일찍이 황후마마의 소유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동상 연고를 날이 추워지는 이때 때맞춰 보냈다는 건, 필시 황후마마의 뜻일 거라고 진 사부인은 생각했다.
“좋은 뜻이지. 그분은 단랑 모녀를 늘 그렇게 대했지 않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그럼 셋째 형님댁은 이제 안심해도 되겠네요.”
진 사부인이 말했다. 수련을 마친 진 노태야가 허리를 곧추세우자, 진 사부인이 손수건을 건넸다.
“셋째가 죽을 마음을 먹었던 것도, 어쩌면 자신의 뒤를 봐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서였겠지.”
진 노태야가 말하자, 진 사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탄식했다.
“조부님!”
문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사부인이 고개를 돌리자, 진단랑이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헤헤 웃고 있었다.
“단랑, 어서 오렴. 오늘 네 언니가 양고기 탕을 끓였어. 한 그릇 먹고 몸 좀 녹이거라.”
진 사부인이 활짝 웃으면서 진단랑을 향해 손짓했다.
진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소의 처자식을 싫어하고 냉대했지만, 진 사부인 내외는 진소가 원망스럽긴 해도 그의 처자식에게는 따뜻하게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