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736
교랑의경 736화
“그래. 내가 탈영병을 싫어하긴 하지.”
유규가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때 네놈들을 잡았던 건, 탈영병이 증오스러워서가 아니라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였어. 내가 서북에서 쫓겨난 게 화가 났고, 최전방에서 적장의 목을 벨 수 없는 게 한스러웠거든. 나는 오매불망 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네놈들은 그 귀한 기회를 버리고 도망쳤다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더라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일을 크게 만들었지.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 소용 없는 일이더군. 네놈들이 정말 탈영병이었다면, 내가 무슨 난리를 치든 상관하지 않았겠지. 내가 그 난리를 친 게 신경 쓰였다면, 그건 탈영병이 아니라 진정한 호걸들인 거고.”
그래서 무원산 형제들은 공성전의 마지막까지 버텼던 거겠지. 도망칠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도,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 보려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거니까.
탈영병이라는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결국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뿐이야.
나는 그놈들에게 상처를 줬지만, 나와 그놈들이 바라는 건 결국 똑같은 거였어.
서사근이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해 놓고, 무슨 만약 타령이야? 자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우리는 서북으로 떠날 예정이었어.”
서사근이 자랑스러운 미소를 보이면서 유규를 쳐다보았다.
“그때는 누이가 벌써 우리를 위해 준비를 마쳤던 때였어. 그런데 우연찮은 계기로 자네를 맞닥뜨린 거지. 자네가 그때 우리를 잡았든, 잡지 않았든, 어쨌거나 우리는 서북으로 갔을 거야.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는 자네와 무관한 일이라고.”
말하던 서사근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만약 그때 형제들이 죽기 직전까지 성문을 막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그 빌어먹을 장수 놈이 먼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서사근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 세상에 만약 따위는 없어.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담담히 받아들여야지. 늘 전장에서 죽기를 바라는 이들이었으니, 죽음에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이야.
“자네 안사람이 딸내미 때문에 집에서 허구한 날 울고불고한다더니, 내가 보기엔 자네가 자네 안사람보다 더 찡얼대는 거 같은데?”
서사근이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자신의 말을 향해 채찍질했다.
“웬 말이 그리 많아?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통쾌하게 살다가 통쾌하게 가야지. 이미 저지른 일이라면, 저지른 대로 살면 그만이야. ‘만약’이니 ‘하지만’이니 거 참 말 많네.”
서사근이 소리치면서 먼저 달려가자, 유규는 입을 벌려 씩 웃고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서사근의 뒤를 쫓아갔다.
두 사람이 열심히 달려오긴 했지만, 용곡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벌써 정월 초열흘이 됐을 때였다. 거리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정월 대보름에 시작될 꽃등 놀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집 앞에 알록달록한 꽃등이 달리기 시작했다.
용곡성이 이토록 평온하게 새해를 맞이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용곡성뿐만 아니라, 주위의 작은 둔보나 전방과 가까운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건, 각 성의 성문 앞에 설치된 벽력포(霹靂砲) 덕분이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굉음을 내는 벽력포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눈앞을 피바다로 물들게 했다.
연말에 한 번 벽력포를 쓴 적이 있는데, 난생처음 겪는 포화의 위력에 서쪽 오랑캐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다. 겨울 중에서도 특히 연말에 자주 쳐들어와 말썽을 피우곤 하던 오랑캐들이 올해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네놈 집에 있는 아궁이와 솥은 차게 식었을 테니.”
성문 앞에 도착한 유규가 서사근을 향해 손짓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몸은 제거 대인일세. 큼지막한 저택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하인이 있는데, 고작 집을 한 달 비웠다고, 뭐? 아궁이와 솥이 식어?”
서사근이 웃으며 대꾸하고는 유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달려 자리를 떴다.
“그래도, 여인이 없는 집이니 적적할 텐데.”
유규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집 앞에 도착한 서사근이 대문을 넘어서기도 전에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사근이 활짝 웃으며 문턱을 넘어섰다.
“형님이 오셨느냐?”
서사근을 마중 나온 문지기와 하인들이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연말부터 와 계셨습니다. 대노야와 대부인 모두 오셨어요.”
형수님도 오셨다고?
“형수님께서는 회임을 하여 거동이 불편하실 텐데, 이렇게 먼 길을 오셨다고?”
깜짝 놀란 서사근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하지 마. 황후마마께 여쭤보고 나서 출발한 거니까.”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했다.
누이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서사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사근이 마당 안으로 들어올 때, 범강림은 소보아를 따라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소보아는 아직 어렸지만 동작이 꽤 그럴싸해 보였다.
서사근이 조금 낯설었는지, 소보아가 쑥스러움을 타며 머뭇거렸다.
“네가 여길 떠날 때만 해도 엄청 작았는데, 이제는 넷째 숙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구나.”
서사근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보아가 부끄러워하면서 살짝 웃고는 마당 밖으로 나오는 황씨의 몸 뒤로 쪼르르 달려가 숨었다.
황씨의 옆에 있던 여종이 재빨리 소보아를 붙잡았다. 여종은 소보아가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온 황씨와 부딪힐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번에 같이 지내다 보면 친해질 거예요.”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 이제 경성에서 지내지 않으시려고요?”
서사근이 황씨의 의중을 알아듣고 물었다.
“벽력포와 신비궁의 공급과 정비가 안정되었으니, 서북 군감의 제거 자리로 왔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럼 경성 쪽에는······.”
서사근이 곧바로 물었다.
“이무가 있잖아. 이무만으로도 충분해.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걸.”
범강림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
서사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은, 누이 혼자 경성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노야 가족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조귀는 무관이 되면서 경성을 떠나게 됐지만, 그 대신 강주에 있던 금가아 가족이 경성으로 올라왔지. 정 대노야가 금가아에게 경성의 가업을 맡겼거든. 반근도 금위군한테 시집가서 경성에 살고 있고. 찬찬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꽤 많이 남아 있으니까, 누이가 경성에서 혼자 쓸쓸하다고 느끼진 않을 거다.”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나저나,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은데, 장가갈 생각을 좀 해 봐야지 않겠어?”
서사근은 범강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안다.”
범강림이 자리에 앉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형제들이 차가운 땅 아래에 쓸쓸히 묻혀 있으니, 넌 지금 숨 쉬며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지내서는 안 돼.”
서사근이 웃으면서 범강림을 향해 예를 표했다.
“예, 형님. 그래서 형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형님과 형수님께서 제가 장가갈 준비를 도와주시겠군요.”
범강림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아 참, 주 노야 가족이 경성으로 돌아갔다면, 주 공자도 경성에 한번 들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서사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주 공자는 황후 책봉식이 끝난 뒤에 곧바로 경성을 떠났어. 내가 보기엔, 주 공자는 별로 경성에 가고 싶지 않은 거 같던데.”
골도(骨刀) 한 자루가 상자에 던져지면서 챙, 하는 소리가 났다.
주복이 손을 털고 상자 뚜껑을 닫았다.
“선물이다.”
주복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저희는 경성으로 안 돌아갑니까? 노야께서 재촉하는 서신을 보내오셨어요. 그리고 여기 서북 군영에는 삼노야 등이 계신데, 공자님까지 이곳에 계시면 서북 군영은 주씨 가문이 다 해 먹는다는 소문이 돌지도 몰라요. 그러면 황후마마께 안 좋은 영향이······.”
사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복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 온 게냐? 감히 마마를 들먹이면서 나를 협박하려 들다니.”
사환이 머쓱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다 챙겼으니, 그만 가자.”
주복이 말했다. 사환은 흠칫 놀랐다가 곧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자님, 드디어 돌아가실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사환이 소리쳤다. 주복이 뒷짐을 지고 사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왜 내가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당연히 공자님이 황후마마께 마음이 있어서······.
사환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주복은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 여인을 못 볼 게 뭐 있다고. 이번 생에 그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해서? 그 여인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게 보기 싫어서?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여인은 내게 목숨까지 내주는 사람인데, 내가 무얼 더 바랄 수 있겠어?
주복이 고개를 숙이고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상서, 상남 지역을 유랑 중인 이 태의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무왕축은 사람을 살리는 주술이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주술이기도 합니다. 남을 살리고, 자신을 죽이는 주술이지요.’
주복은 그 여인이 어떻게 마지막 숨을 남길 수 있었는지, 그 여인이 깨어날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주술을 쓴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기간은 단 석 달이며, 석 달이 지나도록 주술의 저주를 깨지 못한다면 필시 죽게 됩니다.’
이 태의가 서신에 쓴 내용이었다.
그때 그 자식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무리 그 여인을 황후로 책봉한다고 해도, 그 여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주복이 걸음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 아니야?
그 자식이 아무리 그 여인에게 푹 빠져 있다지만, 황제가 깨어난다는 건 어떻게 장담하고, 깨어난다고 한들 제위를 그 자식에게 물려줄 거라는 장담은 어떻게 해?
그리고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않고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잖아?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이 석 달 안에 해결될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고.
고약한 여인 같으니라고.
주복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저 상자도 챙기거라.”
사환이 멈칫했다.
“마마께 드릴 선물이다. 이만큼 모았으니, 한 번 가져다드릴 때가 됐어.”
사환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자님, 괜찮으신 거 맞죠?”
사환보다 주복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상자가 넘치도록 가득 담긴, 말할 수 없는 주복의 진심이었다.
“그래. 아주 괜찮다. 왜.”
주복이 웃으면서 대꾸하고는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떤 진심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어.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 뭐가 중요해? 그런 사람이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충분히 의미 있어.
먼지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길을 떠난 주복의 시야에 시끌벅적한 마을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북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매섭기만 했던 바람이 한결 따스해졌다.
“보름만 더 가면, 경성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사환이 뒤에서 외쳤다. 행장을 단단하게 여민 주복이 고개를 들고 성문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자. 재미난 물건이 있는지도 좀 보고.”
놀란 사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공자님, 뭘 더 사시려고요? 지나가는 곳마다 그렇게 물건을 사시면, 마차가 곧 터지겠습니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사환에게 뭐라 꾸중을 하려던 찰나, 주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복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길가에 있는 찻집에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주복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꽂혔다.
주복의 표정에서 서서히 놀라움이 드러났다.
그놈,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