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74
교랑의경 74화
“정 낭자.”
진소는 다소 느릿느릿 앞으로 나가 예를 표했다.
“내 부친께서…….”
정교랑이 진소의 말을 잘랐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어요. 우선 좀 쉬어야겠네요.”
사람들이 모두 멈칫했다.
“교랑.”
주 노야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우리 아씨께서 기력이 없으면 어떻게 병을 보시겠어요? 노야, 이미 오래 기다리셨잖아요. 조금 더 기다려도 상관없지 않나요?”
시녀가 말을 끊더니 진소를 보며 말했다.
방문이 닫히자 주씨 부부가 뒤돌아 진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봤다.
“아니, 쟤가 참…….”
주 부인은 몹시 송구한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긴 먼 길을 왔잖아요. 우리였어도 못 견뎠을 거예요. 바깥채에서 잠시 쉬면서 기다리죠.”
진소의 부인이 얼른 주씨 부부를 안내하며 말했다. 진 상공 댁의 객청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발을 들일 꿈도 못 꿀 곳이었다. 주씨 내외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시중을 들 여종과 몸종들만 남고 나머지는 자리를 떴다. 무작정 기다리자니 초조해진 이들은 진 사노야와 조 집사에게 오는 길에 있었던 얘기를 들으며 여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초겨울이라 날이 일찍 저물었다. 진씨 가문의 대청은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숯불도 대령한 후였다. 실내는 따뜻했다. 십여 명이 모여 앉아 숨을 죽이고 진 사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가까이 가 보니 저 낭자가 칼로 살을 도려내는데…….”
거기까지 들은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두 손으로 옆에 있던 아이의 귀를 막았다.
“단랑, 듣지 마라. 밤에 잠 못 자.”
여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아요, 안 무섭다고요.”
단랑은 쪼르르 빠져나와 아예 앞으로 가서 앉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숙부를 쳐다봤다. 그렇게 하면 당시의 광경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더니 누더기 조각과 썩은 풀로 환자를 싸매고…….”
“그리 중상을 입은 사람을 칼로 도려내 피를 보면 단독(丹毒: 다친 피부로 세균이 들어가 붓기나 통증을 일으키는 병)의 위험이 커지지 않습니까?”
주 노야가 끼어들었다. 주 노야는 군인 출신이라 칼이나 창에 다친 상처에 대해 잘 알았다.
“아닙니다.”
진 사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숙부님, 빨리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병이 나았어요?”
단랑이 재촉하자 진소가 나서서 훈계했다.
“단랑, 무례하게 굴지 마라. 네 숙부는 먼 길을 와서 고단해.”
단랑은 어려서 몰랐지만, 어른들은 진 사노야의 표정에서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이미 읽어낸 터였다.
“숙부님, 고생 많으셨어요.”
단랑이 제법 그럴듯하게 예를 표했다. 진 사노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단랑.”
진 사노야가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더 기괴한 약을 처방해 달이게 했는데, 이튿날 아침이 되니 사람이 깨어났습니다.”
“대단하네요.”
단랑이 신이 나서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병자가 열흘 후엔 우릴 쫓아오기까지 했더군요.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는 데다 부축을 받으면 걷기도 하고 기댈 곳이 있으면 앉기도 했어요. 말도 하고 노래도 했죠. 벌써 완쾌하여 우릴 도와 늑대 떼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완쾌되기까지, 도움을 청하던 사람이 도움을 베풀기까지, 불과 열흘밖에 안 걸렸다니. 참으로 신묘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고 나이 어린 낭자들은 서로 손을 붙잡으며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과연 신의로군, 신의야.”
진소는 연신 칭찬을 해대며 주씨 내외를 향해 예를 표했다. 주씨 부부는 서로를 쳐다봤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물론 놀랐지만, 얘기를 소상히 듣고 보니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더 이해가 안 갔다. 그 바보가, 어떻게 신의가 된 거지? 세상에 이런 기이한 일이 있나?
“전에 도사님이 우리 교랑에게 장차 큰 길운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집안에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도관에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요.”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했지만 주 부인은 옛일을 거론하며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정말 맞았네요. 우리 시누이만 가엾게 됐죠.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지.”
처음엔 정 낭자의 일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지금은 진씨 가문 사람들도 알아볼 만큼 알아본 때라 내막을 잘 알았다. 일부러 병주까지 사람을 보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얘기는 못 들었다. 바보의 병이 나았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병까지 치료하게 되다니.
“신선의 비방을 얻었나 보군.”
사촌 형 하나가 옆에 있는 진소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이 되긴 하지. 부디 그 비방으로 부친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여인의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알 게 뭔가.
“우리 집 얘기는 그만하시오. 진 노태야의 병부터 구하는 게 우선이지.”
주 노야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야, 정 낭자께서 오셨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웠다. 곧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오더니, 두봉과 두모를 벗은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허리로 길게 드리운 흑발에 검은 비단으로 지은 덧옷, 어두운색 비단 치마까지, 수수하면서도 더없이 단정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안팎으로 불을 환히 밝혀 둔 터라 그 아름다움을 똑바로 직시할 수 없었다.
훌륭한 외모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이었다. 아주 어리군. 진씨 가문 노야들에게 든 두 번째 생각이었다. 의원은 경험으로 말하는 법인데 이리 어린 낭자에게 무슨 경험이 있나? 막다른 길에 몰린 게 아니었다면, 방금 신통한 치료법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보자마자 희망을 접었을 터였다.
“병자는, 어디 있죠?”
정교랑이 입구에 서서 물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얼른 일어났다.
“낭자, 나를 따라오십시오.”
단랑이 자신을 잡고 있던 여인의 손에서 벗어나 따라왔다.
“언니.”
단랑이 부친의 곁에서 걷고 있는 정교랑을 보며 소리쳤다. 진소의 부인이 얼른 붙잡아 세웠다.
“단랑, 어서 들어가.”
진소의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언니, 나 알아보겠어요?”
“모르겠어.”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이 단랑을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모른다고? 하긴, 길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친 인연이 전부고 어린애인데 기억이 날 리가. 진소가 얼른 부인에게 단랑을 데려가라고 눈짓했다.
진 노태야의 방 쪽으로 오자 여종들이 얼른 문을 열었다. 진 노태야는 벌써 두 달째 병석에 누워 있었다. 자식들이 정성을 다하고 몸종들이 세심히 보살폈다고는 하지만 방 안에서 풍기는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낭자가 말한 병세가 맞습니다.”
진소는 나막신을 벗고 정교랑을 침상 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부친께선 두 달 전에 발병하신 게 아니라 한 달 반 전에 넘어지면서 병이 드셨어요.”
“아니에요.”
정교랑이 딱 잘라 말했다.
“두 달 전, 밤에 코피를 쏟았어요.”
밤에 코피를 쏟아? 진소 부부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는데 옆에 있던 여종이 아, 소리를 냈다.
“네, 맞아요.”
여종은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두 달 전쯤 며칠 동안 노태야께서 밤마다 코피를 쏟으셨어요.”
“왜 말하지 않았느냐?”
진소가 급히 물었다.
“노태야께서 별일 아니라고 하셨고 정말 별일이 아니기도 했거든요. 물로 씻고 나면 금세 멎었고, 사흘 정도 그러신 게 전부였어요.”
여종이 당황하며 말했다. 이 아씨의 말대로 그때 노태야께서 병이 나신 건가. 여종은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 노태야의 병을 못 고쳐서 제때 아뢰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게 되면 끝장이다. 여종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시인했다.
“말했으면, 뭘 할 수 있었죠?”
정교랑의 물음에 진소가 난처해졌다. 하긴, 말한들 뭘 할 수 있었겠나. 날이 건조하여 코피가 났다고 여기고 말았겠지. 그게 병의 시작일 줄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일어나라.”
진소가 말했다.
“부친께서는 연로하시니 무슨 일이든 예사로 봐선 안 된다. 부친께서 자식들을 아끼는 마음에 내색하지 않으셔도 너희까지 숨기려 들진 마라.”
여종은 감격하여 알았다고 대답했다. 정교랑은 벌써 침상 옆으로 와 있었다. 양쪽에 켜진 궁등이 침상 위에서 의식 없이 누운 노인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진소 부부가 따라와 긴장하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행여 진료에 방해가 될까 봐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방 안이 어찌나 조용한지 모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생각이 안 나요.”
정교랑이 불쑥 내뱉자 진소 부부는 멍해졌다.
“낭자, 무엇이 생각 안 난단 겁니까?”
진소가 긴장하며 물었다. 신선의 비방이 생각 안 난단 건가?
“이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 안 난다고요.”
정교랑은 노인을 보고 고개를 돌려 여종의 손을 붙잡고 휘장 근처에 선 단랑을 쳐다봤다. 반근이 떠난 후 정교랑은 그동안 일어났던 일과 인명, 장소를 전부 기억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반근이 떠나기 전의 일은 종이에 기록된 일만 기억할 뿐이었다.
진소 부부는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봤다. 시간을 끌더니 아직 진료는 시작도 안 했군.
“낭자, 내 부친께선…….”
진소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최근 보름 동안 의식을 찾는 일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매일 인삼탕에 의지해 겨우 연명하고 계시죠.”
정교랑이 손을 뻗자 진소가 얼른 이불 속에서 부친의 손을 빼내 주고, 맥을 짚는 모습을 지켜봤다. 방 안은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잠시 후 정교랑이 손을 떼자 진소 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곧이어 긴장한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어떠냐는 말조차 물을 수 없었다.
“금침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일단 침을 놔서 깨어나게 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몹시 다급한 듯 나막신조차 벗지 않고 다다다 달려 들어왔다.
“만들 필요 없습니다. 만들 필요 없어요. 여기 있습니다.”
한 노인이 휘청거리며 말했다. 뒤이어 아이 하나가 약상자를 끌어안고 달려 들어왔다.
“신의께선 어디 계십니까?”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진소 부부가 얼른 나서며 맞이했다.
“이 태의, 늦은 시각에 어찌 오셨습니까?”
“신의께서 오시면 몇 시가 됐든 날 부르라니까요. 이런 일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이 태의가 계속해서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신의는요?”
저쪽에 있는 정교랑은 일어나기는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진소가 이 태의를 안내했다. 단랑은 어느 틈에 침상 옆으로 와 꿇어앉아 있었다.
“언니, 할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어요?”
단랑이 정교랑의 옷깃을 붙잡으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8월 15일에 같이 등불놀이 보러 가겠다고 하고선 안 가셨어요. 사촌 언니가 정월 대보름 때는 분명 같이 가실 수 있대요. 언니, 사람들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거래요. 그럼 정월 대보름 때 저랑 등불놀이 보러 갈 수 있어요?”
네다섯 살 꼬마는 아직 삶과 죽음을 몰랐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단랑을 보며 말했다.
“갈 수 있어.”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나으실 거야. 정월 대보름 땐 등불을 보러 가실 수 있지.”
단랑은 환히 웃으며 침상에 엎드려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언니가 곧 나으실 거래요. 우리 같이 등불놀이 보러 가요.”
단랑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진소의 부인이 얼른 다가가 단랑을 붙잡았다.
“이분이 바로 정 낭자입니다.”
진소가 이 태의에게 먼저 소개한 후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이분은 태의원의 이 태의십니다.”
정교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고 이 태의도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분이? 대인들께서 모셔 온 그 정 낭자라고요?”
이 태의는 무심결에 놀라 소리쳤다.
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 여인을 보긴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 노태야의 손녀뻘 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진씨 가문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모셔 온 낭자일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교랑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금침이 있다고요? 빌려줘요.”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