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83
교랑의경 83화
이쪽의 편전은 떠들썩한데, 저쪽의 정교랑과 단랑은 벌써 진씨 가문 낭자들과 함께 산문을 나서고 있었다.
시라고 할 수 없는 시를 남긴 후, 시를 지은 진단랑은 이미 뒤로 빠져 있었고 글씨를 쓴 정교랑은 기분이 탁 트여 어느덧 근심이 사라져 있었다. 저쪽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인 두 사람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진 공자도 주육낭과 함께 갔던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진씨 저택은 경성의 정중앙 지대에 있었다. 조모인 방녕공주는 세상을 뜬 후였지만 진씨 가문은 여전히 황실에서 하사한 공주부(公主府)를 소유하고 있었다. 정자와 누대, 누각이며 화원과 작은 길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가 정교하고 아름다워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저택이었다.
하지만 공주부에 거하는 이는 진 공자의 일가뿐이었다. 진씨 가문의 조상은 본디 천주(川州)에 살았다. 진 공자의 부친이 경성에서 임직하지 않았다면 진 공자의 일가도 이곳으로 옮겨오진 않았을 터였다.
돌아온 진 공자는 여느 때처럼 부모님부터 찾아뵙고 문후를 올리고자 했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세밑이라 바쁘세요. 열셋째 공자님, 진지는 드셨는지요?”
여종의 물음에 진 공자는 손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키고는 웃으며 말했다. 사환 하나가 꿩 두 마리를 들고 있었다.
“내가 잡은 거야. 이따 삶아 먹으려고.”
십삼공자는 불구의 몸이었지만 유순한 성격이었다.
“조심하세요, 손 다치지 마시고요.”
진 공자는 웃으며 가마 의자에 탔다. 사환들이 가마 의자를 들어 진 공자의 마당으로 옮겨 갔다.
마당에 있던 여종과 몸종은 이미 전갈을 듣고 칼이며 화로, 솥 등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진 공자는 간단하게 몸을 씻은 후 마당으로 나와 직접 꿩을 잡고 손질했다. 입구에 있던 여종이 진 공자의 마당으로 들어서던 두 여인을 막으며 나지막이 고했다.
“여섯째 아씨, 일곱째 아씨. 열셋째 공자님께서는 꿩을 잡아 음식을 준비하고 계세요.”
두 여인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십삼낭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뭐든 자기가 직접 해 먹으려 들다니, 불결하게.”
“그러게 말이야.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쓰는 것도 모두 제 손으로 하겠다지 뭐야. 집에 시중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두 여인은 안을 들여다보며 피비린내라도 나는 듯 코를 틀어막았다.
“그럼 됐어, 다음에 다시 오자.”
두 여인은 몸종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떴다. 여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마당을 힐끔 쳐다봤다.
“물부터 끓여야지. 뜨거워야 털이 잘 빠져.”
사내의 낭랑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그러게. 하필 저런 기괴한 습성을 가지셨담.”
여종이 나지막이 한탄했다.
“하긴.”
다른 여종이 맞장구를 치며 눈썹을 꿈틀하고는 손으로 다리를 탁탁 쳤다.
“이런 사람들은, 다 조금씩 기괴한 면이 있어.”
먼저 말했던 여종이 기겁하며 손을 찰싹 때리고는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부인의 귀에 들어갔다간 경을 쳐.”
여종은 쉿 하는 동작을 하며 목까지 수그렸지만,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마당 안은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진 공자가 버섯을 가져와 질솥 안에 넣었다.
“다 됐다. 반 시진 후에 꺼내 와라.”
진 공자가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렸다. 몸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지팡이를 잡으려 손을 뻗는 진 공자를 쳐다봤다. 일할 때 걸리적거려 한쪽으로 치워 뒀던 터라 손이 닿지 않았다. 몸종이 얼른 지팡이를 가져와 건넸다.
미소를 짓고 있던 진 공자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지팡이를 받은 후 몸종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갈아입을 깨끗한 옷을 든 몸종 네 명과 진 공자의 옷을 벗겨 주는 몸종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벗은 진 공자는 맨 마지막 한 겹만 남겨 놓고는 부축을 받으며 씻으러 들어갔다.
몸을 씻고 나자 진 공자가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몸종 두 명이 뒤쪽에 꿇어앉아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공자님, 탕을 다 끓였습니다.”
문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 공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몸종들이 진 공자의 긴 머리를 잡아당기고는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다. 물러가라.”
진 공자는 웃으며 손을 내젓고는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다.
“어서 가져오너라, 어서.”
뜨거운 버섯 꿩탕이 놓이자 맛있는 냄새가 확 퍼졌다.
“맛있구나, 맛있어.”
진 공자는 웃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수저를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두 몸종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게 맛있다고? 고기 구경 못 하는 사람들이야 맛있게 먹겠지만 명색이 진씨 가문에서 이깟 꿩탕이 무슨 대수겠는가.
몸종들은 흰옷을 입은 소년 공자가 바닥까지 길게 드리운 장발을 내려뜨리고 소매를 걷으며 탕을 먹는 모습을 쳐다봤다. 모락모락 나는 김에 백옥 같은 피부가 가려져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만든 거다. 내가 만들었어, 내가. 내가 직접, 만들었지.”
진 공자는 고개를 숙이고는 고기를 맛있게 뜯어 먹었다.
멀리 나가 즐기고 왔으니 오늘 밤은 단잠을 자겠지.
돌아온 정교랑은 언제나처럼 진 노태야에게 침을 놓으러 왔다. 나들이는 어땠냐는 질문이 빠질 순 없었다.
“괜찮았어요.”
정교랑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차정사는 과연 영험한 곳인가 보오.”
진 노태야가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낭자가 표정이 한결 좋아졌으니 말이오.”
시녀가 정교랑을 눈여겨 쳐다봤지만 멍한 표정은 여전했다. 보통 사람의 눈엔 딱히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전에는 근심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구려.”
근심? 시녀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다시 쳐다봤다. 저 표정에서 근심을 읽어낸다?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만 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금침을 집어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주 부인은 피곤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또 핑계를 대고 안 만나 줍니까?”
따라 들어온 주육낭이 물었다. 주 부인은 여종이 건넨 차를 받으며 대답했다.
“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지. 어쨌든 난 할 만큼 했다. 나머진 그 애 일이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소자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주 부인이 얼른 붙잡으며 만류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일개 계집이 아니냐. 그 계집이 뻔뻔하게 나오며 모르는 척해 놓고, 우리 잘못으로 떠넘기는 게 더 경우 없는 일이지.”
주 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부모님의 거처에서 나와 연무장에서 무예 수련을 하고, 흠뻑 젖은 모습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 됐다. 막 밥그릇을 드는데 진 공자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들어왔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언제나 느릿느릿 걷는 진 공자였기에 이리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주육낭이 몸을 곧추세워 앉았다.
“육낭, 자네가 좋은 구경을 망쳤어.”
진 공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주육낭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제 차정사에서 좋은 시가 나왔다네.”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입을 삐죽였다. 하여간 이렇게 한가한 이들이나 하루 종일 시 타령이지.
“무슨 좋은 시를?”
주육낭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진 공자가 시를 읊었다. 주육낭은 탕을 들고 진 공자가 이어 읊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다음은?”
주육낭이 탕을 마시며 물었다.
“없어.”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은 마시던 탕을 풉 하며 내뿜었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 공자는 그 바람에 옷이 다 젖게 됐다. 그런데도 진 공자는 개의치 않으며 미소까지 머금은 채 시 구절을 다시 음미했다.
“이게 좋은 시라고?”
눈을 치켜뜬 주육낭은 닦아 주려는 몸종을 뿌리치고 손수건을 받아 수염을 직접 닦았다.
“날 놀리려고 이러나? 내가 무인이긴 하지만, 우리 주씨 가문도 엄연히 글 선생을 두고 있는 집안이라고! 그런 시는 나도 짓겠네, 어디 한번 들어봐.”
주육낭은 손수건을 내던진 후 시를 읊었다.
“뜨거운 차는 마시기를 기다릴 뿐이네.”
주육낭이 잠시 후 덧붙였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뜨거운 차는 마시기를 기다릴 뿐이네. 어때? 잘 맞잖아.”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둔하긴.”
진 공자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사환이 조심스레 내미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좋은 시군.”
주육낭은 종이에 쓰인 시를 읊으며 붓을 들고는 자기가 지은 구절을 덧붙이고자 했다. 금상첨화가 아닌가. 진 공자가 코웃음을 치며 탁자를 밀었다.
“글씨를 보라고.”
글씨가 거기서 거기지, 뭐 볼 게 있다고.
“내가 방금 모사해 온 거야. 형태는 비슷해도 거기서 직접 보는 오묘한 맛은 없어.”
진 공자도 글씨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보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아 멍하니 모사만 하는 이도 있다니까. 차정사에선 행여 글씨를 망칠까 봐 푸른 천까지 걸쳐 놨지. 괜히 망신당할까 봐 이젠 벽에 시를 남기려는 자도 없고.”
거기까지 말한 진 공자는 웃으며 감탄했다.
“올해 시회(詩會)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이 글씨가 나오면서 이미 끝나 버렸어.”
그렇게 좋은가? 주육낭이 탁자에 놓인 글씨를 쳐다봤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뜯어보니 나머지 글자는 평범한데 첫 글자만큼은 마음을 들끓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주육낭의 시선이 첫 글자에 멈췄다. 용맹하게 돌진하는 군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부친의 세대는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주육낭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태평성대인지라 용맹무쌍한 군대에 관해선 어르신들의 묘사나 연무장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 실제 느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꿈에도 나올 정도로 애타게 바라는 일이어서, 꿈에서 깨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그런 감정을, 글씨에서 느끼다니. 주육낭은 손을 뻗어 글씨를 가볍게 쓰다듬어 보았다. 산사는 매화가 피기를, 기다릴 뿐이네! 주육낭의 동작을 보며 진 공자는 웃음을 지었다.
“난 이 기다린다는 글자가 더 좋아.”
진 공자도 손을 뻗어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이 글씨는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달라. 평범한 이 구절을 이토록 오묘한 맛이 나도록 쓰다니, 대체 누구의 재주인지.”
“누가 썼는지 모른다고? 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이름 남기는 거 아니었나?”
주육낭은 놀란 눈치였다. 진 공자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도 없고 누가 썼는지 본 사람도 없어. 벼슬에서 물러난 노옹이라는 말도 있고, 큰 뜻을 품은 서생이라는 말도 있지. 공을 세울 때만을 기다리는 무장이란 말도 있고.”
진 공자가 웃으며 종이 위의 글씨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내 눈에 필력은 좀 부족해 보여. 힘이 모자란다고 해야 할까. 여인의 기운이 느껴져.”
주육낭이 다시 쳐다봤다.
“추측할 필요 없어. 이런 글은 이름을 얻기 위해 쓰는 거잖나. 이미 우쭐해 있을 테니 자진해서 모습을 드러내겠지.”
진 공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글씨를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참, 그러고 보니 어느덧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 자네 사촌 누이는 돌아온다고 하던가?”
진 공자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돌아오든 말든 알 게 뭐야, 괜히 기분만 잡치게!”
주육낭이 급격히 정색하며 언짢아하자 진 공자는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