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84
교랑의경 84화
새벽빛이 들어오며 방 안이 밝아지자 단랑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유모를 보며 멈칫했던 단랑은 버선만 신은 채로 걸어와 창을 힘껏 밀어 열었다. 찬바람과 함께 눈송이가 날려 들어왔다.
“와, 정말 눈이 오네! 언니 말이 맞았어!”
그 소리에 잠들어 있던 유모가 깼다.
“아이고, 아씨. 이러다 풍한 드세요.”
유모는 호들갑을 떨며 단랑을 들어 창가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같은 시각 정교랑의 처소에서도 시녀가 휘장을 들며 창문을 열고 있었다. 한기 섞인 바람에 손이 아플 정도였다.
“엇? 눈이 오네.”
시녀가 밖을 보며 신이 나서 외쳤다. 병풍 뒤에서 나온 정교랑은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밖에는 쌀 알갱이 같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씨, 바람이 차요.”
시녀가 얼른 다가와 두봉을 걸쳐 주었다.
눈이 온다. 정교랑은 밖을 보며 처음으로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눈이 오던 날에 잊지 못할 일이 있었나? 눈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을까? 절에서 붓을 들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부친의 기억처럼,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잡힐 듯 말 듯한 뭔가가 있긴 했다.
정교랑은 손을 뻗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순간 가슴이 떨렸다. 손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녹는 눈송이처럼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소가 진 노태야의 방으로 들어왔다. 정교랑이 앉아 처방을 읊어 주자 시녀가 붓을 들어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 정말이에요. 눈이 내려요.”
진단랑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언니가 며칠 후에 눈이 올 거라더니 정말 눈이 내려요!”
진소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단랑은 신이 나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더니 곧 정교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눈이 오는 것도, 하늘이 언니한테 말해 준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야, 밑도 끝도 없이. 진소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여인이 며칠 내로 눈이 온다고 했다고? 이미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늘을 보고? 부친이 길에서 이 낭자를 만났다며 한 얘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도 비가 올 것이라고 하니 비가 오고 비가 그칠 것이라고 하니 비가 그쳤다고 했다. 오로지 부친의 병세에만 정신이 쏠려 있던 터라 담아 두지 않았는데, 이 여인이 정말 하늘을 보고 날씨를 읽는 비술이라도 가졌나? 태사국 사람들처럼?
하지만 태사국 사람들도 열 번에 한두 번 맞힐까 말까였다. 하늘을 보고 날씨를 예측하려면 천문과 지리에 두루 능통해야 하고, 책도 수없이 많이 읽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노력은 삼 할뿐이요, 천부적인 재능이 칠 할을 차지했다. 개국 당시의 원 태사 상공처럼 말이다. 그리 대단한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인데.
부친께 문안을 올리고자 딸을 내보낸 후 정교랑과 인사를 나누던 진소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낭자, 스승이 어느 분이십니까?”
정교랑은 잠시 침묵했다. 스승은 있겠지. 의술도 알고 하늘도 볼 줄 아는데, 그런 게 날 때부터 지니는 기술은 아니지 않은가. 바보를 가르쳐 키워 내다니, 대체 어떤 성인이기에? 바보였던 정교랑의 병도 혹시 그 고인(高人)이 고쳐 주신 건가?
정교랑의 침묵에 진소의 마음은 용솟음쳤다. 그래, 틀림없어. 분명 그럴 거야! 아무렴, 고인이지! 고인이고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던 의문이 단번에 풀리는 듯했다.
“내가 만약,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대인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소를 보며 말했다. 진소의 표정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진소에게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기억이 안 나죠?”
“도관이 벼락을 맞은 일이 있어요. 나도 벼락에 맞았는데, 요행히, 목숨을 건졌죠. 깨어나 보니, 지난 일이 기억나지 않았고요. 기억나는 것도 있고, 잊은 것도 있죠.”
진소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랬군요, 이해했습니다.”
진소의 목소리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언젠간 나아질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아지겠죠.”
정교랑과 시녀는 진소에게 작별을 고한 후 처소로 돌아왔다. 우산을 받쳐 든 시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아씨, 저 대인이 뭘 이해했다는 거죠?”
정교랑은 내리는 눈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건, 나도 몰라. 이해했으면 됐지.”
시녀는 어리둥절한 채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니까, 사실 말 같은 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야.”
정교랑은 손을 뻗어 흩날리는 눈송이를 받았다.
나들이를 다녀온 후 진씨 가문 낭자들이 또 나들이를 가자고 청해 왔으나 정교랑은 전부 거절했다. 정교랑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용기가 있는 낭자는 없었다. 정 낭자는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날 나들이에선 딱 세 마디 한 게 전부야. 아니지, 세 단어라고 해야 하나. 단랑, 이쪽이야, 좋아.”
한 낭자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했다. 방 안에 앉은 자매들은 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어때서?”
한 낭자가 다른 자매들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말만 많지, 무슨 쓸모가 있어? 조부님의 병을 고칠 수가 있나, 멀리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모시러 오는 사람이 있길 하나?”
자매들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십팔랑, 우린 비웃자는 뜻 없었어.”
먼저 말했던 낭자가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없으면 됐어. 누가 누구를 비웃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야.”
“그래, 그래. 오늘 오후에 같이 조부님 병문안 가자.”
한 낭자가 웃으며 이야기를 원만하게 매듭짓자 다른 낭자들도 좋다고 했다. 막 일어나 마당 문 앞으로 왔을 때쯤 정교랑이 시녀와 함께 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들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오전에 진료를 마치지 않았나?”
여인들은 계속 머뭇거리기만 할 뿐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진 노태야의 거처에는 진소 부부와 단랑이 있었다. 이들 역시 정교랑이 이런 시간대에 찾아오자 놀란 눈치였다.
“혹시 부친의 병세가…….”
진소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물었다.
“아무 일 없어요. 내일부터는 침을 안 맞으셔도 돼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치료비를 정산해 주세요. 이만 떠날까 합니다.”
정교랑의 말이었다.
떠나겠다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깜짝 놀랐고, 진 노태야마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니, 떠나려고요?”
“당연히 떠나야지.”
단랑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지금껏 조용히 지냈다. 매일 침을 놓고 약을 지으러 올 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간을 쭉 자기 거처에서 보냈다. 진 노태야의 병세가 하루하루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진씨 가문 사람들은 정교랑의 존재조차 잊을 뻔했다.
“아씨, 좀 더 머무시지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나섰다.
“삼낭, 그건 안 될 말이다. 낭자가 여기 머문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어. 낭자가 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낭자가 떠나도 될 만큼 내 병세가 좋아진 게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소도 더는 강하게 붙잡지 못했다.
“그럼 강주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진소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한동안, 경성에 있다가, 돌아갈까 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성에 있기만 하면 됐다. 어쨌든 부친의 병세는 이제 막 호전된 참이었다. 정교랑은 마음을 놓으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쉽겠는가.
그날 저녁, 진 부인이 치료비를 보내 왔다. 하지만 정교랑은 봉투를 들고 직접 찾아왔다. 정교랑이 얼마를 달라고 밝히지 않았고 진 부인 역시 얼마를 주겠다고 밝히지 않았지만, 봉투에 든 돈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 부인은 불안했다. 적다는 뜻인가?
“부인,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난 경성을 잘 모르니, 세 들어 살 만한 집을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진 부인은 놀란 표정이었고, 밖에 꿇어앉아 있던 주씨 가문 여종과 몸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세상에! 진 부인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바로 떠오르지 않네요. 그럼 일단 여기서 지내시다가 좋은 집을 찾으면 그때 옮겨 가세요. 그래야 더 정성을 들여 고를 수도 있고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부인께 부탁을 드리는 건, 이 일이 급하기 때문이에요.”
진 부인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이 낭자는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데다 말수도 적지만, 입을 열 때면 늘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진소 부부의 말을 들은 진 노태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말대로 해 주어라.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 찾으려 들면 아무리 급해도 찾을 수야 있으니까.”
말을 마친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더 물어볼 것 없이 옥대교 근처에 있는 우리 저택을 그 낭자에게 팔아라. 가구 같은 게 전부 갖춰져 있으니 바로 들어가 살 수 있지 않느냐.”
진소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 낭자에게 팔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팔아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반복하자 진소는 알았다고 했다.
소식은 금세 주씨 가문으로 전해졌다. 진씨 가문의 첫 반응과 마찬가지로 주씨 가문 역시 소란스러워졌다.
“정말 그리 말했단 말이냐?”
주 노야가 호통치자 앞에 있던 여종들은 덜덜 떨었다.
“네, 네, 노야. 진 부인께서 진 노야와 상의하여 정 아씨의 집을 사 주셨대요.”
주 노야는 노발대발했다.
“이런 몹쓸 것! 집안 어른은 안중에도 없구나!”
“노야,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소문이라도 나면 남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어요.”
주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에는 치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모두 의원을 불러온 일을 함구했다. 하지만 진 노태야의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면서 주씨 가문은 자신들이 진 노태야의 완쾌와 관계됐다는 사실을 은밀히 퍼뜨리던 차였다.
주 부인은 사흘에 한 번씩 진씨 저택을 찾았다. 이따금 정교랑을 보기도 했지만 못 보더라도 소문을 퍼뜨리는 데 문제될 건 없었다. 하급 무관이 상공 댁의 문턱을 무시로 넘나든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랫것들을 매정하게 내치면서까지 진씨 가문의 의심을 피한 터였다.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간 줄 알았건만,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 외조카는 먹기만 하고 줄행랑을 놓는 개와 다름없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애초에 누구 덕에 지금껏 편히 산 건지 관심도 없어. 이런 근본 없는 계집을 봤나!”
격노한 주 노야는 당장이라도 진씨 저택을 찾아가 못된 조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했지만, 주 부인이 막았다.
“노야, 그 애는 바보인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요. 진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안면 몰수하고 소란을 피울 순 없잖아요.”
“먼저 안면 몰수한 게 누군데?”
주 노야가 씩씩거렸다.
“아직은 돌이킬 여지가 있어요. 어쨌든 진씨 가문에서도 그 애가 우리와 가깝지 않다는 걸 알잖아요. 경성에 와서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으니, 집을 주어 곁에 두게 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어요.”
주 노야는 이를 악물었다.
“그다음은? 거기 들어가서 사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거기 들어가 살면, 그때 불러오면 되죠.”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냉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 계집이 대놓고 망신을 줘도 참고 또 참다가, 웃는 낯으로 알랑거려 데려오라고? 그까짓 게 뭔데! 그 계집이 뭐라고! 제 몸엔 주씨 가문의 피도 흐른다는 걸 몰라?”
문밖에 있던 주육낭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확 풀어 버리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