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87
교랑의경 87화
“부인, 부인. 진 공자께서 술에 취해 육공자와 싸우시고는 정 낭자 거처로 가셨어요.”
여종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지 않은 채로 앉아 있던 주 부인이 또다시 벌떡 일어섰다. 간신히 주육낭을 돌려보내고 정교랑을 어르고 달래 돌아간다는 말이 안 나오도록 했더니, 이젠 또 그 녀석이 난리네. 집안 형제자매도 아니고 진 공자는 외간 사내잖아!
주 부인은 속이 뒤집어졌다. 집으로 데려오면 뭐 하나, 한시도 마음 편할 때가 없는걸. 도리어 속만 끓이지.
“어서 가라, 어서 가서 막아.”
주 부인은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진 공자와 주육낭은 벌써 정교랑의 거처 앞에 와 있었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가 두 사내를 보고 얼른 뒤돌아 고했다.
“아씨, 벌거벗고 있던 사람이 또 왔어요.”
시녀는 소리치며 손을 들었다. 바로 눈을 가리겠다는 듯이. 시녀가 외치는 소리에 주육낭은 다리를 비틀거렸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계집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분해 씩씩거리며 돌아가려고 했지만 진 공자가 어깨를 붙잡았다.
“이번엔, 심지어, 두 명이네.”
시녀의 목소리에 이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육낭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딱딱한 목소리가 어쩐 일인지 주육낭의 귀에는 조소로 들렸다. 그 윗전에 그 아랫것이네. 그 계집의 목소리겠지. 역시 귀에 거슬려. 목소리가 시녀만도 못하잖아.
진 공자가 고개를 들자 문 안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제법 굵어진 눈송이가 흩날렸다.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품이 큰 옷을 입은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더없이 눈부셨다.
이 사람이 바로 도관에 10년 가까이 버려져 있다가, 홀로 천 리 길을 돌아온 정 낭자로구나. 이 사람이 바로 날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뚝딱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내는 정 낭자로구나. 이 사람이 바로 차와 음식에 까다롭고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정 낭자로구나.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진 공자가 손을 내밀었다. 멀리서 보니 절을 하는 듯 보였다. 중심을 놓친 진 공자는 기우뚱하며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사환과 주육낭이 얼른 붙잡았다. 이들은 비틀거리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낭자, 같이 한잔하러 왔습니다.”
진 공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듯 따로 인사를 하거나 예를 표하지 않고,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시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정교랑도 진 공자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절름발이가 옷을 벗으면, 멋있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회랑 아래에 있던 사환은 어찌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렇게 호방한 낭자라니! 주육낭이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계속 바보 시늉을 하려나 본데, 내가 진짜 확 다 벗어 버리면 어쩌려고?”
시녀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하였나니. 정교랑은 주육낭에게로 눈길을 돌려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주육낭은 숨이 턱 막혀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 핏대가 섰다.
“낭자, 이 야만스러운 놈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네요. 내가 낭자와 함께 한잔해야겠습니다.”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함께요?”
진 공자는 주육낭의 방에서 가져온 술잔을 들며 말했다.
“함께 슬픔을 나누자고요.”
함께? 슬픔을 나눈다?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낭자는 손발이 있지만 이 야만스러운 놈한테 묶여 있으니, 나처럼 손발에 불구가 있는 사람과 다름없는 처지 아닙니까. 자유를 얻을 수 없으니 마음속에 분노가 쌓일 수밖에요. 달리 도리가 없지요!”
진 공자는 껄껄 웃으며 술을 비웠다.
“함께 슬픔을 나눕시다. 이 슬픔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웃는 진 공자를 보며 옆에 있던 시녀는 짠한 마음이 들었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누가 주씨 가문으로 오고 싶다고 했나. 이 야만스러운 자의 겁박 때문에 붙잡혀 왔거늘, 이젠 또 사과를 하겠다며 윽박을 지르니 말이다. 정작 뭘 잘못했는지, 아씨가 왜 슬퍼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씨의 마음속엔 답답한 게 많을 터였다. 여인의 몸에 묶인 것도, 혈육이라는 자들의 속박도. 말할 수 없고 싸울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그래도 다행이네, 다행이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시녀가 손을 들어 눈을 가리자 눈물이 떨어졌다. 이 공자는 그래도 괜찮네.
주육낭이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려 있어 안에 있는 사람들도 흩날리는 눈송이를 내다볼 수 있었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겼어, 너무.”
진 공자는 여전히 술잔을 쥔 채 웃으며 주육낭과 하늘을 번갈아 가리켰다.
“내가 하늘과는 못 싸우지만, 자네와도 못 싸울 줄 알아?”
진 공자는 또다시 지팡이를 들어 내리쳤다.
“진상자, 적당히 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진 공자의 지팡이를 훅 빼앗았다.
“육낭, 아직도 뭘 틀렸는지 몰라? 자네는, 사람을 너무 업신여겼어.”
옆에 있던 시녀도 주육낭을 노려봤다. 맞아, 입으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잖아!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다짜고짜 네 시녀를 빼앗아 왔다. 내 잘못이야. 화가 나고 원망스럽거든 나한테 풀어. 조모님과 고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주씨 가문에 분풀이하진 말라고.”
“조모님과 고모님을 생각한다면서, 자네는 누이를 이렇게 대해?”
진 공자는 이미 비어 있는 술잔을 쥐며 말했다.
“술을 따라라, 술을. 낭자와 함께 슬픔을 달래야겠다.”
“그래, 우리가 사람을 업신여겼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어떻게 대해 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
“낭자가 자네를 용서하지 않고 어떻게 사죄하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으니 낭자의 잘못이라는 거야? 자네는 억울하고?”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좋은 말도 나쁜 말도 다 자네 차지로군. 육낭, 사람을 이렇게 업신여기나.”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요, 내 말이. 아씨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눈앞에 있는 이 공자가 할 말을 대신 해주네. 아씨의 설움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니.
“난 그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야. 분풀이를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해.”
주육낭은 몸을 바로 앉으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맞은편의 정교랑은 말 한마디 없이 줄곧 조용히 앉아 있었다. 주육낭이 쳐다보자 침묵을 지키던 정교랑은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뭐야, 아직도 안 벗었네요?”
상념에 젖어 있던 시녀는 그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교랑, 아직도 안 끝났냐고!”
주육낭이 한쪽 무릎만 꿇은 채 일어나며 소리쳤다. 진 공자도 따라 웃었다.
“안 끝났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향해 술잔을 내던졌다.
“냉큼 꺼져. 여기서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진상자, 자네까지 왜 이래!”
주육낭이 씩씩거리며 술잔을 휙 낚아챘다.
“꺼지라고! 자네가 이런 작자였다니, 내가 눈이 삐었지. 냉큼 안 나가면 다시는 아는 척 안 해.”
진 공자가 문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노려보다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마당의 문밖에는 어느새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우산도 안 들고 선 탓에 거의 눈사람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육낭, 진 공자 혼자 안에 있는 거야? 아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주 부인이 다급하게 아들을 붙잡았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이참에 저 바보가 달라붙었으면 좋겠네!”
주육낭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 부인은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큰 소리를 낼 순 없었다.
“쟤도 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달라붙긴. 진씨 가문이 그리 만만한가?”
달라붙을 수만 있다면, 우리 집안 딸들도 진작 수를 썼겠지. 그런데 진 공자가 뭐 하는 거지? 정말 취했나?
방 안에 남은 진 공자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 주육낭을 보며 기쁜 기색이었다.
“저런 자는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합니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겨요.”
진 공자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낭자, 마음 풀어요.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낭자가 아니라 저자입니다.”
정교랑은 그러냐는 눈빛으로 진 공자를 쳐다봤다.
“그야 그렇죠.”
정교랑이 진 공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갔는데, 그쪽은 아직도 옷을 안 벗고 있네요?”
무서워라. 진 공자의 사환은 머리를 목 속으로 집어넣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정말 바보잖아!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진 공자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가 보고 싶다면 벗어도 상관없습니다.”
진 공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몸이 온전치 않아 볼품없지만요.”
* * *
밤의 어둠이 내릴 무렵, 눈이 그쳤다. 걸어 놓은 홍등이 비추는 마당은 반짝반짝 더없이 아름다웠다. 여종들이 서둘러 문을 열자 실내의 따뜻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주 부인이 지친 기색으로 들어오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소? 아직도 난동을 부리는 거요?”
주 노야가 서둘러 물었다. 여종은 주 부인의 두봉을 벗겨 준 후, 얼른 자리에서 물러나 문을 닫고 나갔다.
“아니요.”
주 부인은 자리에 앉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정교랑과 시녀는 이 집에 발을 들인 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주 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피로를 느꼈다.
“작은 부엌을 마련해 줬더니 둘이서 밥을 해 먹고는 자러 갔어요.”
주 노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에는 진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진 노태야의 진맥을 위해 내일 정교랑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 집에서 나온 게 오늘이거늘 뭐하러 내일 또 데려가겠다는 건지.
떠날 건지 남을 건지 정교랑의 의사를 물으러 온 게 분명했다. 정교랑이 진 노태야의 진료를 핑계로 떠나겠다고 하면, 주씨 가문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주 노야는 울화가 치밀었다. 아들이 괜한 소동을 벌여 정교랑과 진씨 가문의 심기까지 건드리게 되지 않았는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와중에, 뜻밖에도 정교랑이 진씨 가문 사람에게 왕진은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가야 할 때가 되면 자신이 직접 가 보겠다면서.
간신히 체면은 지키게 됐군. 주 노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게 다 육낭 덕이에요.”
주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 몸을 어찌나 세게 후려치는지 못 보셨죠? 세상에, 이 엄동설한에. 그깟 몸종이 무슨 대수라고 그 계집이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지 모르겠어요. 혹여 육낭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잘못될 게 뭐 있소, 그깟 상처 가지고.”
주 노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음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차를 마셨다.
“집안만 평온하면 됐소, 그거면 돼.”
집안의 평온이라. 주 부인은 불과 하루 만에 정신없이 벌어진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앞으론 집안이 평온하겠지?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불안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