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88
교랑의경 88화
같은 시각 침상에 누워 있던 정교랑과 시녀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아씨, 금가아를 깜빡했어요!”
시녀가 소리쳤다. 이어 방 안과 온 마당에 불이 환하게 켜지더니 곧 주씨 저택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뭘 하려고?”
막 잠자리에 들었던 주 노야 내외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이 밤중에 어딜 나간단 거야?”
“사환 하나를 잃어버렸다면서 그 시녀가 찾으러 가겠대요.”
여종이 말했다.
“무슨 사환을 말이냐. 사환을 잃어버리다니?”
주 부인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떠나려는 핑계일 테지. 어디서 농간을 부려! 내 어쩐지 쉬이 넘어간다 했네. 아주 사람을 들들 볶는군. 절대 내보내지 마라!”
주 노야의 호통에 여종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주육낭이 두봉을 걸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염려 마십시오. 어딜 가든 제가 같이 따라가면 그만입니다.”
“육낭, 몸도 성치 않은데 이 겨울밤에 어딜 간다는 게야.”
주 부인이 걱정했지만 주육낭은 손을 내저은 후 서둘러 나갔다.
회랑 아래에 그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시녀만 서 있을 뿐이었다.
“공자님께 폐를 끼치다니요. 마차만 준비해 주시면, 제가 진씨 가문에 가서 알아볼게요.”
시녀만 간다? 그 여인은 안 가고?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안쪽을 쳐다봤지만, 불 꺼진 방은 어두웠다.
“아씨는 주무세요.”
시녀가 말했다. 정말 사환을 찾으려던 건가? 바보 시늉에 도가 튼 여인인데, 그 말을 어찌 믿어!
“서둘러 사람을 찾는다지 않았느냐? 속히 가자.”
주육낭은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낮에 눈이 내렸는데도 겨울밤의 경성은 여느 때처럼 활기찼고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주육낭은 마차를 직접 몰며 진씨 저택으로 내달렸다. 당초 금가아는 옮겨 가려던 저택으로 먼저 가 있었다. 그런데 정교랑과 시녀가 갑작스럽게 주씨 저택으로 끌려가면서 진씨 가문과 주씨 가문 모두 경황이 없어 금가아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진씨 저택에서 그 아이를 도로 데려왔을 수도 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아이에게 연통을 해 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나왔다.
“주씨 가문에서 데려간 줄 알았죠. 저희도 안 가 봤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본 끝에 집사가 허벅지를 탁 치며 이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니, 사람을 보낸 것도 댁들이고 그 집을 빌려준 것도 댁들인데, 우리가 무슨 수로 데리러 가?”
부아가 치민 주육낭이 집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주육낭, 네가 파렴치한 짓을 안 벌였다면 이런 일이 생겼겠냐!”
진씨 가문의 소년 하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해댔다.
“세밑이라 경성에 유괴범도 많은데, 그 사환은 이제 겨우 열두 살이고 경성은 처음이야.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정 낭자한테 뭐라 할지 어디 두고 봐야겠다!”
옆에 있던 소년들도 거들고 나섰다. 정 낭자는 원치 않게 주씨 가문으로 끌려갔지만, 어쨌거나 혈육인지라 달리 하소연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 딱한 사정에 모두 울분을 느끼던 차였다. 주육낭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차갑게 웃으며,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이겠다는 눈빛으로 마당을 훑었다.
“우선 사람부터 찾아요. 못 찾으면 그때 따지고요!”
시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마차가 눈길을 내달렸다. 어슴푸레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시끄러운 발소리가 고요한 주씨 저택의 아침을 깨웠다. 시녀는 새빨갛게 언 얼굴에 붉어진 눈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교랑은 의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앉아 책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평상시처럼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진 않았다.
“아씨.”
시녀가 울먹였다.
“말부터 하고 울어.”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애써 눈물을 삼켰다.
“여러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금가아가 문 앞에 서 있다가 골목으로 갔대요. 그 길을 따라가며 수소문했더니 코를 훌쩍이며 진씨 저택이 어디냐고 묻는 걸 본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진씨를 말하는지 모르니 못 찾았겠죠.”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거기까지 말한 후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진씨 저택도 못 찾고, 주씨 저택도 어딘지 모르고, 원래 있던 집도 잃어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단 거네.”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너무 염려 마세요. 관아에 고해서 찾고 있어요. 성문도 단단히 지키고 있으니 성을 나가진 못했을 거예요.”
정교랑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씨, 아씨도 나가시려고요?”
시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래, 내가 찾으러 가야겠다. 내가 잃어버렸으니, 내가 되찾아와야지.”
정교랑이 출타한다는 말에 주 노야 내외는 또 초조해졌다.
“역시 도망치려던 핑계였군. 그깟 사환 하나 잃어버린 게 별거냐. 찾으면 찾는 거고 못 찾으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마당 문으로 온 정교랑은 길을 막아선 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들이, 날 막는 건가?”
집사는 아씨의 무뚝뚝한 표정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주 부인과 주 노야가 달려왔다. 주 부인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의 손을 붙잡았다.
“교교,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날이 춥잖니. 저들이 찾게 두고 넌 그냥 집에 있어.”
“안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얘는 말하는 게 어쩜 이렇게 단호하지?
“이게 웬 소란이냐. 가서 사환 몇 놈을 사다 주어라.”
주 노야가 웃어른의 위엄을 갖추며 집사에게 명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 노야를 쳐다봤다. 상경한 이후 외숙을 이렇게 똑바로 직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주 노야 역시 조카의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두 눈은 어릴 때랑 똑같군. 소름 끼칠 정도로 추해. 특히 저 흰자위를 주체하지 못하고 번득일 땐.
“날, 못 가게 막는 건가요?”
정교랑이 주 노야를 보며 묻자 주 노야는 멈칫했다. 등에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정말 정이 안 가는 아이야. 주 노야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주육낭이 들어왔다.
“못 가게 하는 사람 없다.”
주육낭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밤을 새운 피로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마차에 올라라. 내가 데려다주겠다.”
“육낭!”
주 노야와 주 부인이 동시에 소리쳤다. 하나는 부아가 치미는 목소리였고, 하나는 걱정이 되는 목소리였다.
“일개 사환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니. 관아에 고해 온 성에서 찾고 있으니 그거면 됐지, 왜 너희까지 직접 가겠다는 게야?”
주 부인은 아들을 잡아끌고 정교랑 앞으로 와서는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붙잡았다.
“교교, 넌 몸도 안 좋잖아. 육낭, 밤새 돌아다녔으면서 어딜 또 나가겠다는 거야.”
주육낭이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도 주육낭을 쳐다봤다. 둘 다 같은 색 두봉 차림에 털이 달린 두모를 쓰고 있어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괜찮습니다.”
주육낭은 주 부인에게서 손을 빼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멈칫했던 주 부인이 소리쳐 부르는 사이, 정교랑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뺀 다음 따라 나갔다.
“가게 두시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주 노야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육낭이 감시하고 있으니 도망은 못 치겠지.
옥대교 근처에서 여러 해를 산 유사(劉四)였지만, 이곳이 이렇게 시끄러운 건 처음이었다.
“대체 몇 번이나 묻는 겁니까. 그 애는 동쪽으로 갔다니까요. 처음 보는 얼굴이라 눈여겨봤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기억도 못 했어요.”
유사는 똑같은 말을 또 반복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질문만 벌써 네 번째였다. 그 애가 대체 누구기에? 뉘 집에서 잃어버린 공자님이신가? 관아도 모자라 병마사까지 나서서 사람을 찾다니? 그래 보이진 않던데. 겁먹은 얼굴에 처음 상경한 듯 촌티가 좔좔 흐르는 행색이었어. 기껏해야 말이나 먹이는 사환으로 보였는데 말이지.
“이쪽 길을 따라갔어요? 아니면 저쪽?”
정교랑이 물었다. 유사는 아씨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두모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살짝 보이는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목소리는 좀 귀에 거슬리는데,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네.
“묻지 않느냐, 어서 대답해라.”
주육낭이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겁먹은 유사가 늠름한 소년을 쳐다봤다. 이 소년은 누군지 알겠다. 어젯밤에 왔었으니까.
“이쪽이요. 아니, 저쪽이었나…….”
유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쪽 같습니다.”
유사가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또 아닌 것 같다.
“저쪽이요, 저쪽입니다. 저쪽 길을 따라갔어요.”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주육낭이 따라갔다.
“마차에 올라라.”
정교랑이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주육낭이 정교랑의 팔을 홱 잡아챘다.
“마차를 타라고.”
주육낭이 답답한 듯 소리치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말없이 쳐다보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대치하는 사이,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지고, 숙취에 시달리는 얼굴의 진 공자가 몸을 내밀었다.
“내 탓입니다, 내 탓이에요.”
진 공자는 인사도 없이 대뜸 공수의 예를 표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에 술타령을 하는 바람에 이 꼴이 됐군요.”
“이게 자네랑 무슨 상관이라고!”
주육낭이 손을 풀고 진 공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사이, 정교랑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새벽빛 속으로 걸어가는 작은 형체를 바라봤다.
“낭자, 뜻밖의 상황은 늘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진 공자는 다시 한번 예를 표한 후, 고개를 들어 걱정되는 눈길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자책이라는 말에 정교랑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시녀는 다시 한번 코끝이 찡해졌다.
금가아를 잃어버렸다. 주육낭이 갑자기 마차를 납치하며 소동을 벌인 걸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금가아를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자책이 들 수밖에. 아씨의 자책은 더 클 것이다.
“아씨, 다 소인 때문이에요. 소인이 금가아를 깜빡했어요. 소인의 잘못이에요.”
시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며 정교랑의 소매를 붙잡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 공자를 쳐다봤다.
“이 세상에, 뜻밖 같은 건 없어요. 잘못한 건, 잘못한 거죠.”
앞으로 걸어가는 정교랑과 시녀를 보며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진 공자가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도 진 공자를 쳐다봤다.
“저 애가 그리 무서워? 이렇게 굽신거리긴.”
진 공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슬픔을 함께 나누는 거야. 육낭, 자네는,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