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91
교랑의경 91화
“아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의 무지로 아씨께서 걱정하셨겠네요. 폐를 끼쳤습니다.”
셋째가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정교랑은 자세를 바로 하고 의관을 정돈한 다음, 사내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사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몸을 옆으로 틀거나 비켜섰다. 일부는 허둥지둥 답례를 올리기도 했다.
“아씨, 이러시니 저희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첫째가 소리쳤다. 시녀도 놀란 눈치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예의 바른 아씨였지만 누군가에게 이리 큰절을 올린 건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씨야말로 이 사내들의 은인이 아닌가. 은인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예를 표하다니?
정교랑은 예를 마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정교랑이, 오라버니들의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막 예를 표하려던 셋째를 비롯하여 사내들이 멈칫했다. 뭐라고?
“말도 안 됩니다!”
안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마당까지 전해졌다. 겨울인데도 아직 얼지 않은 화단 물길에서 나는 물 흐르는 소리가 대나무와 돌 사이를 맴돌며 퍼졌다.
사내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인을 보며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아씨는 제 목숨을 구한 은인이십니다. 이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어떤 놈들이고 아씨가 어떤 분인데요.”
다른 사내들도 맞장구를 쳤다. 단정히 앉은 정교랑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내들의 반대와 거절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요점은 간단했다. 아씨는 자신들의 은인이고 자신들과 격이 다른 분이니, 감히 그럴 순 없다는 것.
가만히 있는 정교랑을 보며 시녀도 무언가를 눈치채고 더 이상 놀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을 더 따라 주었다. 밤새 술을 퍼마시다가 잠에서 깨자마자 도망치고 이리저리 숨었던 터라 사내들은 마침 갈증이 났다.
“아무튼 아씨,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씨는 관두고 아씨의 시중을 드는 이 누이만 해도 저희와 비교할 바가 안 됩니다.”
사내는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시녀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누이. 한 잔만 더 주시오.”
시녀는 웃으며 말없이 물을 따라 주었다. 셋째가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아씨, 사실 이 일은 저희가 아씨를 도운 게 아닙니다. 저희가 아니었다면 금가아는 진작 아씨를 찾았을 거예요.”
셋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은 담아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이 사내가 똑똑하네. 시녀가 고개를 들어 셋째를 쳐다봤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고개를 들어 셋째를 봤다.
“그건, 괜한 생각이에요. 난 그저, 오라버니를 갖고 싶을 뿐인걸요.”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다……. 사내들은 흠칫 놀랐다. 정교랑이 사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은혜를 갚는다지 않았어요? 누이로 맞아 보살펴 주면서, 평생 은혜를 갚는 게, 더 성의 있지 않나요?”
그런가? 사내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근데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단 말이지.
“그럼 큰형님이 결정하십시오.”
사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큰형이라 불린 사내는 셋째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셋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씨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첫째가 말했다. 정교랑이 사내들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들.”
이제 막 발을 들인 집이었지만, 집 안엔 웬만한 물품이 다 갖춰져 있었다. 작은 서재에는 종이와 붓, 먹은 물론이고 향까지 있었다. 시녀가 물건들을 가져왔다.
“아씨, 직접 쓰시겠어요?”
시녀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오라버니들 쓰는 걸 도와.”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종이와 붓을 사내들 앞으로 가져왔다.
“내가 하겠소.”
셋째가 손을 내밀었다. 시녀는 셋째가 글공부를 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글도 쓸 줄 알겠거니 여기고, 그 말대로 낮은 탁자를 밀어준 후 본인은 먹을 갈았다. 셋째가 붓을 들어 의남매를 맺는 글을 썼다.
“오늘, 무원산 형제 범강림, 범석두, 서무수, 서사근,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가 조상님 앞에 고합니다.”
“오늘 강주 정가(程家) 교랑이 친족 앞에 고합니다.”
안에 있는 향로에 향을 꽂은 후, 정교랑과 셋째가 그 앞에 나란히 서서 각자 손에 든 종이를 펼쳐 들고 읽었다. 정교랑이 이름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임을 알렸다. 정교랑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낭송을 마치고 머리를 조아린 후 종이를 향로에 넣고 태웠다.
“이제, 이 누이가, 오라버니들을 뵈옵니다.”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갑자기 누이가 생긴 사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며 예를 올렸다. 셋째 서무수가 손을 뻗어 양쪽을 붙잡아 주었다. 이쪽에서는 시녀가 금가아를 데려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공자님들을 뵈옵니다.”
당황한 사내들이 펄쩍 뛰었다. 공자님이라는 호칭은 평생 처음 듣는 것이었다. 다만 서무수만은 단정히 앉아 절을 받았다.
“이 서무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는데, 24년을 살다 보니 누이가 생기는 날도 오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18년을 살면서…….”
서봉추도 얼른 따라 소개했다. 갑자기 금가아가 놀라는 소리를 내고는 서봉추를 쳐다보며 물었다.
“봉추 형님, 열여덟밖에 안 됐어요?”
우락부락하게 생긴 서봉추는 머리가 크고 어깨가 둥글었으며, 덥수룩한 수염은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서봉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열여덟이 뭐? 내가 이래봬도 사내대장부라고.”
금가아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우리 아버지보다도 나이 들어 보여요.”
“네 아버지는 나 같은 대장부가 아니겠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딱딱하고 서먹하던 분위기를 녹였다. 조금씩 어색함을 내려놓는 사내들을 보며 정교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 오라버니가 생겼다.
노둣돌(말에 오르내릴 때 편하도록 대문 앞에 놓는 큰 돌)에 기대 채찍을 이리저리 흔들던 주육낭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 공자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주육낭을 쿡 찔렀다.
“아, 왜? 자네는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어서 돌아가.”
주육낭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 공자가 웃으며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자네를 찾나 본데.”
골목으로 나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시녀는 이쪽에 있는 주육낭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주육낭은 몸을 곧추세우고 채찍을 휘휘 저으며 시녀를 쳐다봤다.
“급히 나오느라 돈을 안 가져왔네요. 공자님, 돈 좀 꿔 주실 수 있어요?”
시녀가 예를 표한 후 웃으며 말했다.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주육낭은 그 시녀의 웃음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시녀는 초조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상관없어요.”
시녀가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기 공자님은 기개가 남다르시죠. 혹시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너희 아씨께서 날 그리 치켜세우는데, 당연히 빌려줘야지.”
진 공자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천금을 주고 사는 게 웃음이라지. 난 천금을 주고 칭찬을 샀으니 그 값으로 충분하구나.”
진 공자가 사환에게 돈을 가져오라는 눈짓을 했다. 하지만 이미 주육낭이 시녀에게 돈이 담긴 쌈지를 던져 준 후였다. 시녀가 손을 뻗어 쌈지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아씨께선 여기 공자님들과 식사를 마친 후에야 돌아가실 거예요. 공자님 먼저 가세요.”
말을 마친 시녀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공자님들? 그 무뢰한들이 공자님이라고? 사실 진짜 무뢰한은 나라고 모욕하는 건가?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봐, 간단한 말로 사람을 모욕한다니까.”
하지만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로 트집 잡을 사람은 아냐. 공자님이라고 불렀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진 공자는 저쪽에 있는 저택을 쳐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쉽네, 들어가 볼 인연이 없으니.”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이쿠, 미안해라. 나 때문에 미인과 가까워지지도 못 하고.”
진 공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번에 내가 좋은 곳을 알아냈어. 아주 신기한 음식을 먹는 곳이지. 우리 먹으러 가세. 자네 누이는 자네를 아끼지 않지만, 난 자네를 아끼잖아.”
오시(午時), 정교랑의 저택 안. 반쯤 열린 종이 문 사이로 실내의 맛있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안에 있는 사내들은 그릇을 받쳐 들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금가아가 고기 한 접시를 끌어안고 부엌에서 뛰어왔다.
“누이가 있으니 정말 좋네.”
서봉추가 음식을 입에 물고 솥에 있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건지며 말했다.
“진짜 맛있다.”
게걸스럽게 먹는 다른 사내들과 달리 큰형 범강림과 셋째 서무수는 점잖은 편이었다.
“누이, 이제 그만해. 이거로 충분하다니까.”
시녀와 함께 접시에 고기와 요리를 나눠 담던 정교랑은 그 말에 이쪽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라버니, 어려워 말아요. 충분하긴요.”
범강림과 서무수가 옆에서 게걸스럽게 먹는 형제들을 쳐다봤다. 접시며 그릇을 금세 싹싹 비울 것 같은 모습에 두 사내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기쁜걸요.”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채소들을 가지런히 잘라 준비했다.
“이렇게 떠들썩한 건, 오랜만이에요.”
사 온 채소와 고기를 바닥낸 후에야 점심 식사가 끝났다.
“좋은 술이 없어 아쉽네요.”
정교랑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옆에 있던 술 주전자를 탁 쳤다.
“이게 좋은 술이 아니면 뭐야. 누이가 계속 그리 말하면 우리가 불편해.”
정교랑은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물을 마셔도 취하는 법이지.”
서무수가 고개를 젖혀 가며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정교랑이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사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따라 일어섰다.
“그래, 그래, 이만 가 볼게. 누이한테 너무 오래 폐를 끼쳤네.”
“아니요, 오라버니들은 여기서 지내요. 난 외조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사내들은 멈칫했다가 곧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 그래. 누이의 음식을 먹고 누이의 술을 마신 것도 모자라, 누이의 집에서 지내다니.”
사내들의 말에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누이라면서요. 가족이 됐는데, 서먹하게 굴 것 없잖아요?”
서무수가 사내들의 말을 제지하고 진지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누이, 아까 금가아한테 얘기 들었어. 원래 여기서 지내려고 했다면서.”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우릴 오라비라 여긴다면 무슨 일이든 편히 말해. 오라비들 걱정시키지 마시고.”
금가아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이쪽저쪽의 사람들이 섞여 난장판이 되자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금가아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씨도 빼앗겼는데 너까지 잃어버리면, 우리 진씨 가문은 경성에서 얼굴을 못 들 거야.”
“이게 다 주가 놈 때문이다. 그놈이 아수라장을 만드는 바람에 금가아 널 까맣게 잊었어.”
“너희 아씨는 협박에 못 이겨 그리로 가신 거야.”
사내가 뜻밖에도 하급 사환들이 금가아를 붙잡고 한 말을 귀담아들은 터였다. 나머지 사내들도 정신을 차리고 서무수와 정교랑을 차례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누가 누이를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다들 얼굴이 시뻘게져 묻자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들, 괜한 걱정이에요.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요. 남들이 내가 괴롭힘을 당한다고 여길 뿐이죠.”
정교랑은 서무수를 보며 다시 생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난 그저,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라고.”
서무수 등은 정교랑이 시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배웅했다. 이 저택에 남은 금가아는 안팎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셋째야, 누이의 일을 함부로 추측하는 건 안 좋아.”
범강림이 불쑥 입을 열자 서무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그저, 이 일이 좀 불가사의해서 그랬어요.”
확실히 불가사의한 일이긴 했다. 서북에서 도망쳐 나온 후 셋째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됐다. 그러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씨 덕에 목숨을 건졌고, 그 아씨는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생명의 은인과 결의를 맺고 의남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