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10)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0)화(10/141)
“지금이라도 주치의 선생님을 모셔 와야 하는 거 아닐까요?”
헤일의 물음에 아리나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 경을 칠 일 있니? 됐어. 그냥 잠시 기절한 것뿐인데 무슨.”
“맞아, 헤일. 그냥 쉬면 될 일이야. 크게 만들어서 뭐 할 거야.”
린지가 아리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양손을 꼭 잡아 모은 헤일이 주춤대며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다고 하시기엔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어요. 코에서 흐른 피 때문에 흰옷이 다 젖을 정도였는데.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요.”
“어머, 얘 하는 말 좀 봐!”
아리나가 펄쩍 뛰며 몸을 돌렸다.
“무슨 책임? 아니 말마따나 내가 그랬어? 내가 무슨 책임을 질 게 있다고 그래?”
“그러니까 닥터를 부르면 되잖아요. 상주하고 계시는 주치의만 부르시면 될 일인데 왜…….”
헤일의 말에 미간을 좁힌 아리나가 슬쩍 잠든 듯 누운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
챈들러 도련님께 괴롭힘을 당했던 것을 별채 2층에서 쭉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을 어찌 하겠는가.
물론 도련님들과의 문제라 제가 나서서 할 일도 없었지만, 괜히 무릎과 팔꿈치, 손바닥에 난 상처부터 몸에 얼룩덜룩한 자국들에 대해 추궁당하기 시작하면 머리 아픈 일만 생길 게 분명했다.
가주님도 계시는데 소란을 일으키는 것보다야 나았다.
“됐어. 내일이면 일어나실 거야.”
“하지만.”
“아침에도 눈 못 뜨시면 그때 가서 닥터를 부르든, 가주님을 부르든 해.”
“아리나 님.”
“너! 고작 하우스키퍼 주제에 지금 2급 하녀인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직위로 찍어 누르는 아리나의 말에 헤일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핏기 없이 흰 얼굴로 잠이 든 레티시아의 상태는 솔직히 내일 일어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게 했다. 가뜩이나 마르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은데.
괜히 이러다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싶은 헤일이 양손을 꽉 맞잡자 그런 그녀의 모습이 고까운 듯 아리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턱을 올려 들었다.
“너, 할 일은 다 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아까 떨어트린 빨래, 그거 오늘 다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이 방에서 내쫓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아리나의 말에 침대에 누운 레티시아를 보며, 코끝을 훌쩍인 헤일이 “네.”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중으로 다 해. 그렇지 않으면 식사는 없을 줄 알아.”
아리나의 엄포에 고개를 끄덕인 헤일이 레티시아의 작은 방에서 걸어 나와 별채 뒤쪽에 떨어트린 빨래 바구니를 안아 든 채 터덜터덜 걸어 나가자-
“여긴 일하는 아이가- 아.”
후원 뒤편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줄지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좋은 옷을 차려입은 사내들의 등장에 헤일이 바구니를 또 떨어트렸다.
“무슨.”
“아, 별채에서 일하는 하녀인 모양입니다. 부관님.”
“아, 우린 본성의 행정관들이네. 놀라지 말…….”
“본성이요?”
“그렇네만.”
부관이라 불린 사람은 아무리 넉넉히 보아도 이제 막 성년식을 치른 듯 앳된 얼굴이었다.
안경을 쓰고 피곤에 찌든 얼굴이라 그 나이를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뿐이지, 안경만 벗으면 그야말로 소년티를 벗지 못했을 법한 외형이었다.
한데-
‘행정관이라니.’
레티시아에 대한 말을 해도 될지 잠시 고민이 되는 듯 주변을 살핀 헤일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괜히 제가 실수를 하는 거라면 어쩌나 와락 두렵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레티시아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고작 6살.
오네의 제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레티시아의 모습에 말아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긁은 헤일이 고개를 들었다.
“저.”
저를 바라보고 있는 행정관의 눈동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레티시아 아기씨가 아프세요.”
* * *
“진짜 성가셔 죽겠네.”
수건을 꼭 짜서 레티시아의 손과 발, 그리고 피가 잔뜩 묻어 있던 얼굴과 목덜미를 벅벅 대충 닦던 아리나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물통에 수건을 내던졌다.
“누가 듣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사생아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해?”
“사생아는 아니지.”
“부모가 사생아면 자식도 뻔하지 뭐. 친모는 평민이라며?”
“그렇다는 소문이 있긴 하더라.”
린지가 따뜻한 물을 물통에 부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부인께서도 너무하시지. 이 밤톨만 한 거 뭐가 예쁘다고 극진히 모시라는 거야.”
“가주님 계시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하.”
레티시아가 쓰러지기 직전에 벨리아의 측근 시녀인 엘린이 신신당부를 했더랬다.
극진히 모셔서 절대, 자신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모든 것은 둘째 숙모와 숙부의 덕이라고 그렇게 주입시켜야 한다고 당부에 당부를 늘어놓고 갔다.
‘그러면 그대들의 앞길도 탄탄대로가 놓이지 않겠는가.’
둘째 부인께서 잘 기억해 두실 거라고 말하던 엘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위로 뒤집어 깐 아리나가 레티시아의 작은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 수건으로 벅벅 문질렀다.
“피부가 희어서 그런가. 핏물이 왜 이렇게 안 지워…… 헉!”
여린 살갗을 아예 벗겨 버리려는 건지 수건을 쥔 손에 힘을 준 그때, 린지가 닫지 않고 들어온 문 사이로 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부관님?”
본성에서 일을 했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의 등장에 아리나가 멍하니 베넷을 빤히 보자, 그 역시 아리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왼손으로 움켜쥔 얇은 손목과 팔이 벌겋게 될 때까지 문지르고 있는 수건을 든 오른손을 말이다.
한눈에 보아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은 상황에 베넷이 느릿하게 들어와 방 안을 살폈다.
벽난로는 불씨 하나 없었고, 벽난로 위에는 뽀얀 먼지가 앉아 있었다.
귀족 영애의 방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촉감의 이불. 보기에만 그럴싸해 보이는 싸구려 벽지, 커튼. 천장 구석구석 드리워진 거미줄.
딱 보아도 가문에서 돌보지 않는 천덕꾸러기의 방이라고 써 붙여진 상태였다.
그리고-
“하.”
미간을 검지로 긁적이던 베넷이 침대에 누운 레티시아의 상태를 보며 한쪽 입술을 씹었다.
“코멧.”
“예, 베넷 님.”
“지금 당장 본성으로 가 당직 의사를 모셔 오게.”
“알겠습니다.”
“그, 그그 베넷 님!”
베넷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닙니다. 이것이 아기씨께서 피곤하셔서.”
“…….”
“워낙에 아기씨께서 의사를 싫어하셔서요. 그래서 저녁내 지켜보다 정 안 되겠으면 그때 부르려 하였습니다. 이, 이것 보십시오!”
극진히 간호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지 물통과 수건을 가리킨 아리나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흰옷이 피로 흠뻑 젖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리셨는데, 제가 그걸 다 닦아 냈습니다. 보세요, 머리카락 한 올도 피가 안 묻어 있지 않습니까.”
“피를 많이 흘리셨다.”
“예! 그 피가 대체 다 어디서 나왔나 싶을 정…….”
“그런데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
“아기씨께서 의사를 싫어하셔서.”
“예, 예에.”
궁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나와 그 뒤에서 더 격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대는 린지의 모습에 길게 숨을 몰아쉰 베넷이 몸을 돌렸다.
색색 숨을 내쉬는 아이의 작은 몸이 이불 아래에서 들썩이고 있었다.
‘이걸 가주님께 어찌 보고하나.’
이능력자일지도 모르는 직계의 대우가 이토록 엉망이었으니.
저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둘째 부인께 안채 살림을 다 맡겨 놓았다고는 하나,
‘핑계가 되질 않지.’
거기다-
‘베넷, 아주 가끔은 레티시아를 살펴봐 주렴.’
샤리에 님의 부탁까지 있었는데.
‘젠장.’
베넷이 낭패감에 물든 입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가끔 본성에서 마주칠 때면, 잘 웃기도 하고 직계들과 어울리는 모습만 보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조금은 작고 마른 것이 신경 쓰였지만 그것도 체질이려니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용인들에게 떼를 쓰고 울거나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며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밀쳐 두었던 것이다.
단 하나도 제 잘못이 아닌 것이 없었다.
“하.”
입술을 짓씹은 베넷이 고개를 돌리자 눈도 뜨지 못한 아이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
“아기씨?”
숨소리에 흐릿하게 섞여 나오는 목소리에 베넷이 다급히 몸을 굽히자 지척에 다가온 제 온기를 좇듯 아이가 손을 뻗어 제 손끝을 잡았다.
“싫어.”
“…….”
“싫어.”
싫다, 고개를 저으며 제 손을 꽉 잡은 작은 손이 마치 지푸라기를 잡듯, 간절하게 느껴졌다.
마치 살려 달라고 말을 하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