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117)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17)화(117/141)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하고 절대로 잊지 말아야 건, 황제가 매우 오래도록 건재하다는 점이었다.
그냥 살아만 있는 게 아니라, 최소 5~6년은 멀쩡히, 그것도 아주 건강히 살아서 리안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예정이었다.
그때 왜 쓰러졌던 건지, 그것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기에 에시어가 거기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아직 황태자 전하 책봉 전이라, 혼란이…….”
“우린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황제 폐하 일어나실 거야. 안 일어나시면 울 할부지랑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돼.”
“예?”
“우린 중립이라구.”
지금 에시어가 취해야 할 자세는 그것 말고는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기.
그냥 가만히 있기.
“할부지한테도 그렇게 말씀드려 줘. 뭐 할부지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할아버지는 현명하신 분이니, 에시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고 계실 거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안드레아나 윈드런 숙부쪽이지만, 그 위인들이 누가 말린다고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고 이미 그쪽은 손절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손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숙부들이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안 되는데.”
입 닫고 있으면 더 좋지.
망한 가문을 버리고 새로 일으키는 것보다, 뼈대라도 남은 가문을 지키는 게 더 쉽지 않겠나.
해서 말끝을 늘이며 흘끗 베넷을 올려다보자, 그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물론 알아들은 것과는 별개로 그들을 상대할 생각에 벌써 피곤하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니니까?
어쩐지 악독한 사장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난 어리니까!’라고 핑계를 대며 넘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아, 이건 폐하께서 쓰러지셨을 때 나온 말이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뭔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살짝 돌리는 베넷의 말에 고개를 들자, 그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안경을 살짝 올려 썼다.
“궁내부 장관과 2황자가 샤리에 님을 북부로 돌려보내려는 시도를 했다, 하더군요.”
“!”
이런 미친!
순간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차마 그대로 뱉어 낼 수는 없는 격한 감정에 주먹을 틀어쥐자, 주먹이 떨리는 건지, 몸이 떨리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기다 얼굴도 귀 끝에서부터 양 볼까지 열감이 짙게 느껴졌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 상태를 알 것 같았다.
잘 익은 토마토 같을 내 얼굴.
하지만 감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가라앉기는커녕 속으로 되뇌니 더 격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 미친놈들이 진짜 다 죽으려고.
어디서 수작질이야, 수작질이.
진짜 타루스에 갖다 놓으면 하루, 아니 반나절도 못 버티고 줄행랑을 칠 것들이!
어디 우리 아빠를 입에 올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욕을 속으로 우다다다 뱉으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역시나 속으로 하는 건 시원하지가 않았다.
“진짜 미친 거 아니햐!”
해서 빡 하고 소리를 높이자, 큭 하고 웃은 베넷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주먹을 꼭 쥐고 부르르 떠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자면, 그래 어른들의 눈에는 귀엽기는 하겠다만.
난 심각하다구!
쿵-
“덴쟝!”
발을 쿵, 하고 구르며 고개를 들었다.
“구래서?”
“아, 흠.”
그 표정에 말아 쥔 주먹으로 작게 헛기침을 한 베넷이 나를 빤히 보았다.
“근데 어쩐 일인지, 그 의견을 폐하께서 쓰러지시기 직전에 막으셨다고 하더군요. 스테판 황자님께서도 반대하셨고요.”
“구래?”
그건 다행이네.
화내기 전에 빨리 말하지.
이 이야기 들었으면 방방 뛸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았을 텐데.
어쩐지 민망해져, 손바닥으로 치마를 툭툭 문질렀다.
“다행이네.”
스테판 황자가 에시어를 다루질 못해 껄끄러워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네투아에 대항하기 위해 에시어만큼 좋은 패가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스테판이 에시어를 두둔한 건 뭐 당연한 거였다.
황제 폐하가 의외인 거지.
마고 에시어를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신 분께서 느닷없이 아빠를 옹호한다?
이상하네.
가장 의외인 황제의 뜻을 가늠하기 위해 턱 끝을 톡톡 두드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설마.
‘네, 욕을 조금 하셨지만, 이에로를 엿먹…. 아니, 골탕 먹이는 데에 800만 골드면 싸다고.’
베넷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베넷, 혹시 할아버지랑 황제 폐하랑 만났어?”
“……네?”
당황하는 게 수상쩍은데.
“할부지랑 황제 폐하랑 만났냐구.”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자, 안경을 살짝 올려 쓴 베넷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어휴.”
다음 상황은 안 봐도 뻔하네.
목장 주인이 목장 안 판다는 얘기에 가서 목장 내놓으라고 했을 거고, 황제는 할아버지가 달라니까 더 어깃장을 놓았겠지.
“폐하는 디웨스 아셔?”
“네,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근데 홀데 남작 그냥 두실 거래?”
“그러실 모양입니다.”
에이, 재미없네.
아이들 죽인 것부터 추궁해서 목장주인 홀데 남작에게도 빚을 톡톡히 받아 낼 작정이었는데.
황제가 알고 있다면, 모두 허사가 아닌가.
“왜?”
“불쌍하다, 라고 하셨다는군요.”
“…….”
“그 정도 욕심을 부려도 되는 자라고. 자신이 평생에 걸쳐 그의 뒤통수를 친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괜찮다구요.”
“흠.”
이미 많이 늙어 버린 황제의 짙은 회한일까.
아니면 노쇠한 권력자의 다른 노림수일까.
만약 전자라면, 그냥 불러서 이러저러해서, 저러이러하다고 말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른들의 세계는 이상하다니까.
입을 불만족스럽게 쭉 내밀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황제 폐하가 막으셨다니까, 그건 걱정할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구.”
대신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아빠를 황도로,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로 데리고 와야 했다.
이건 내가 할아버지한테 직접 말해야지.
“그럼 언제쯤 끝난대?”
“샤리에 님께서는 리비스에서 펠루아나를 완전히 몰아내고, 오빌 왕까지 잡을 작정이신 듯 보였습니다.”
“흠.”
펠루아나의 왕.
할아버지께서 그 왕까지 잡아 귀환하셨던 것이 사실이긴 했으나.
그럼 또 길어지겠네.
내 생일 전에 돌아오신다는 약속을 잊으신 걸까.
아주 쪼금 섭섭해지는 아빠의 소식에 어깨를 쭉 늘어트렸다.
그 모습에 베넷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다.
괜히 어설픈 위로를 건넬 수가 없겠지.
어린아이들을 달래듯이 ‘금방 오실 거예요.’라고 달콤한 말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약 없을 겁니다.’라고 현실을 말해 주기엔.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겠지.
굳이 거울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으니까.
이렇게 시무룩할 건 아니잖아
난 20살 어른인데.
하지만 아빠의 사랑을 느끼고 나니,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전생의 레티시아와 그 전의 이시아까지.
못난 마음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데 자꾸만 보상받고 싶어졌다. 그때 못 받았던 사랑을 이번 생에 다 몰아서 받고, 어리광도 실컷 부리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자꾸만 시무룩해지는 기분에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베넷.”
“예, 아기씨.”
“아빠한테 전해 줘. 나 걱정하지 말라구! 아니다! 내가 저녁에 직접 해야겠다.”
애써 밝게 웃으며 베넷을 올려다보자, 그가 안경을 살짝 올려 쓰고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얼른 오시라 할까요.”
도리도리.
“아기씨께서 얼른 오라 하시면, 금세 달려오실 텐데요.”
“그럼 급하게 왔다가 또 금방 갈 거잖아.”
“…….”
“그런 거 싫어.”
고개를 저으며, 베넷을 향해 웃었다.
“그러니까 기다릴 수 있어. 괜찮아.”
아빠가 모든 걸 다 이루고, 끝을 내고 돌아오시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난 그 순간을 잘 준비해서 맞이하면 되는 일이고.
그러니까.
“베넷, 우리 쪽 말고, 대중 신문사 중에서 아는 데 있어?”
“신문사요.”
“응, 이왕이면 에시어에 아주 적대적인 곳으로.”
“그럼 에시어에 호의적인 기사는 나오지 않을 텐데요.”
베넷의 의아한 표정에 시익 웃으며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에시어에 호의적일 필요는 없어. 그냥 리비스에서 벌어진 전쟁 상황과 황제 폐하에 대한 칭송이 담긴 기사만 쓰면 되니까.”
“아.”
“대신.”
“네.”
“사실만 써야 한다고 전해 줘.”
“…….”
“그러면 신문사 후원금을 넉넉히 보내겠다구 말이야. 하지만…….”
내가 말을 하다 멈추자 베넷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 마른침을 꼴깍 삼켜 넘기는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베넷의 어깨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사실이 아닌 내용을 쓰면, 신문사 문 닫는 건 각오해야 할 거라구. 그것만 명심하라구 전해 줘.”
“…….”
“그것만 지키면 돈방석에 앉혀 주겠다구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