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124)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24)화(124/141)
그 시각, 샤리에의 집에서는 마고의 한숨 소리가 내내 끊이지 않았다.
“대체.”
손녀딸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또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질 못했다. 이젠 이능을 스스로 잘 제어하고 있다고 들었으니까.
‘한데.’
마고가 잠든 레티시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워낙에 흰 피부라 그런지, 핏물을 닦아 냈는데도 물이 든 것처럼 핏자국이 보였다. 거기다 그 며칠 새 아이의 얼굴도 핼쑥해진 것 같았다.
‘영지로 데리고 돌아갔어야 했나.’
하지만 그러면 아이의 후계 자격이 흔들리게 된다.
어디까지나 아이의 목표는 후계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제 앞에서 당돌하게 후계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오네로 보내 달라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다, 마고가 다시금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봤자 몇 년인데, 이리 고생할 필요 없지 않느냐.”
하아-
마고가 혼잣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레티시아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채 그냥 아이를 영지로 데리고 가서 편안하게 지내게 하고 싶었다.
“하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에 마고가 길게 숨을 몰아쉬는 사이-
“가주님.”
문밖에서 베넷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부름에 잠든 레티시아의 얼굴을 흘끗 본 마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헤일에게 들어와 있으라 해.”
“예, 알겠습니다.”
이야기 소리에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 싶어 밖으로 나오는 마고의 모습에 베넷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미 깨어 있었다.
‘그래 봤자 몇 년인데, 이리 고생할 필요 없지 않느냐.’
무슨 뜻이지?
설마.
할아버지가 내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걸 아시는 건가?
어떻게?
나도 팅커벨에게 들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설마, 팅커벨이 할아버지한테 말했나?
그것 말고는 달리 누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나 싶어 팅커벨이 들어 있는 서랍장을 노려보았다.
“네가 그랬지.”
“…….”
짧게 끊어 묻는 물음에도 서랍장 안쪽은 조용했다.
아마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거겠지.
저 돼지 새끼를 진짜.
당장 서랍장에서 꺼내 돼지 날개를 잡아 흔들어 대고 싶었다.
하지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통증으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몸을 진짜 살짝만 비틀어 움직여도 아파서 꽥, 하고 비명이 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몸 좀 나아지면 보자.”
“…….”
하지만 여전한 묵묵부답에 서랍장을 노려보던 시선 그대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토혈을 하는 패턴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미래와 바꿀 수 없는 미래.
그 두 개가 어떻게 다른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이능을 주신 하늘의 누군가는 그렇게 구분하는 듯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미래에는 피를 흘리고,
바꿀 수 없는 미래는 무사히 지나간다.
지금까지 대부분 그랬다.
제이슨과 아빠에게 일어날 일을 봤을 때는 피가 났고.
리안이네 집에 일어날 일을 봤을 때는 피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
“영지에 다녀와. 아버님 팔걸이에는 그때처럼 이걸 발라 놓아라. 그럼 그 습관이 서서히 죽여 주겠지. 그리고 그 집에도.”
그리고 건네지던 초록색 작은 약병.
목소리의 주인은 안드레아였고, 그 초록색 약병은 그의 서랍장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어 유추해 본 바-
‘한두 번이 아니야.’
할아버지께서 익투스로 쓰러지신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근거가 없어 드러내지 못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안드레아는 전생에서도 이런 식으로 할아버지를 쓰러트려 자신이 모든 것을 차지하려 했겠지.
처음에는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가주가 되었을 텐데,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앞뒤 상황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불안했던 거야.’
안드레아의 나이는 벌써 마흔을 앞두고 있었다.
한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후계를 정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랬었다. 가신들도 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쓰러지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주 대행으로 그를 추대한 거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연스럽게 안드레아가 가주 자리에 앉은 것일 뿐.
할아버지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셨어.
그랬으니, 안드레아는 불안했을 거다.
그리고 지금 꾸미는 일 역시 모두 그의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애정을 받고, 샤리에가 공훈을 쌓아 황제의 관심을 얻는 걸 보며 불안했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건 선 넘은 거지.’
거기다 안드레아가 말한 ‘그 집’은 우리 아빠의 집일 가능성이 높았다.
손쉬운 나부터 먼저 처리하고 할아버지를 해칠 생각이겠지.
할아버지께서 내가 다치거나 일이 생기면 후계 자리를 방계로 넘겨 버리겠다 하셨으니까.
가주의 말은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내게 문제가 생겨도 할아버지가 죽으면 그뿐 아니겠나.
뭐, 안드레아의 머리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어리석은 생각이긴 했다.
허나 지금은 내가 알게 되지 않았나.
그렇게 흘러가게 둘 수는 없지.
이번 기회에 아예 뿌리까지 죄다 뽑아 버릴 작정이었다.
‘며칠 사이로 신문이 발행될 겁니다.’
거기다 며칠 내로 아빠에 대한 기사가 담긴 신문이 발행되어 퍼지면 더더욱 안드레아의 발작이 심해질 게 눈에 뻔했다.
그러면 아빠도 위험해질 수 있어.
할아버지와 내게 다가올 위험까지는 어떻게 막아 볼 수 있을 듯했으나, 지켜야 할 사람이 더 늘어나면 그만큼 어려워졌다.
에효.
그래도 할아버지 아들이라 그냥 살려는 두려고 했는데.
멍청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여기는 일부 내 잘못도 있었다.
벨리아 사건 때 내가 너무 유하게 넘어간 탓에 그들이 이리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그러니 이번엔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어.
거기다 이능도 어느 정도 올라왔으니까.
버틸 수 있을 거야.
겨우 손을 들어 일렁이는 이능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킬 수 있을 거야.’
느리게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에 길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이,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헤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일어났다는 걸 알리면 또 한바탕 소란스러워질 터.
졸리진 않지만, 조금 더 쉴래.
해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문이 열렸다 닫힌 뒤 이어지는 자박자박 조심스러운 발소리에 나도 모르게 잠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몸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 * *
홀데 남작의 저택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둠 속에 파묻힌 남작의 커다란 저택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집에는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았다.
하나 있던 아들과 남작 부인은 홀데 남작이 황궁에서 쫓겨나고 몇 년 뒤, 그의 괴팍한 성미에 질려 이 집을 떠났다.
남작 부인은 이혼장만 써 주면 재산도 일부 놓고 가겠다고까지 하며 도망치듯 홀데 남작가를 떠났다.
홀데 남작 역시 처음에는 집에 빌붙어 있던 밥버러지들이 제 발로 나간다며 좋아했다.
이혼장도 아주 흔쾌히 써서 던져 줬다.
제 재산만 축내던 이들이 돈까지 놓고 나가겠다고 하는데 막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남작가의 가세는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작의 성미에 질린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그만두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저택 관리가 순조롭지 않았다. 급여는 적고 일은 많으니 사람은 구해지지 않았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점점 관리에 손을 놓아 버렸다.
하지만 남작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남작은 그야말로 홀로 남게 되었다.
“젠장.”
술병에 입을 댄 채 경박하게 마시던 남작이 텅 빈 제 침실을 둘러보았다.
“밖에 좀 들어와!”
하지만 사람을 불러도 제때 안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고래고래 목청이 떠나가라 부르거나 미친 사람처럼 설렁줄을 마구 당겨 대야 느지막이 얼굴을 비추었다.
오늘도 그랬다.
“젠장.”
제 말 한마디면 황궁의 시녀와 하녀, 심지어 귀족들까지 벌벌 떨던 시절이 있었다.
한데 지금 자신은 그저 이 커다란 저택에서 홀로 늙어 가는 힘없는 노인네였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다 필요 없어.”
애써 가슴팍을 위로 들썩이며 몸을 움직였다.
“다아 필요 없어. 난 이제 부자가 될 테니까.”
큰소리로 악에 받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뭐, 저쪽에서 400만 골드 이상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지만….
그래, 400만 골드도 감지덕지했다.
“목장을 팔고 나면, 저 아래 남쪽 케파 제도의 섬에서 왕처럼 살 테다. 크하하.”
가슴을 들썩이며 웃은 홀데 남작이 술병을 도로 입에 댔다. 마시는 게 반절, 흘리는 게 반절이었다.
하지만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난 부자야. 돈만 있으면 왕처럼 살 수 있다고!”
황제의 뒤통수를 치고 보란 듯이 잘 살 거다.
보란 듯이.
크하!
하지만 그의 원대한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명으로 내려온 서류 한 장에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