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130)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30)화(130/141)
“연말 연회 갈 거지?”
키에트의 수업 사이, 내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른 리리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가야지.”
그녀의 물음에 키에트를 흘끗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선생님을 앞에 둔 채 잡담을 하는 건 조금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으니까.
해서 조용히 수군거렸다.
“드레스는? 있어?”
“아마…도?”
“아마도오? 설마 준비 안 했어?”
“그럴…걸?”
“뭐어?!”
하지만 내내 키에트의 눈을 피해 작게 속닥거리던 게 무색할 정도로 빽 소리를 내지른 리리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에 나뿐만 아니라 키에트 역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리리이?”
“여, 영애?”
하지만 리리아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일어나.”
“응? 지금?”
“당연하지! 일주일 뒤가 연회라구!”
“응?”
드레스를 준비하지 않은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 리리아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리리아나는 그런 내 시선이 되레 황당하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아니, 대체 어떤 공작가 영애가 새 드레스도 없이 연회를 가?”
“우리 가문에서 여는 연회인데?”
“너희 가문 사람들만 오니까 더더욱. 안 돼!”
리리아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 제대로 된 드레스도 없잖아. 우리 엄마가 자주 가는 숍이 오네에서 멀지 않은 데에 있어. 우리 집 마차 타고 가면 금방이야.”
“일주일 만에 드레스를 어떻게 만들어.”
“여분으로 만들어 놓은 거 있을 거야. 그거 사이즈만 맞추면 돼. 얼르은.”
리리아나가 내 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세게 당기는 힘에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키에트의 시선 역시 내 움직임을 따라 위로 향했다.
나마저 이럴 줄 몰랐다는 듯한 슬픈 눈동자에 살짝 웃어 주며 리리아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가자-
“아, 아기씨? 영애?”
내 뒤에서 키에트의 애절한 부름이 들려왔다.
“내일 봐요, 키에트. 오늘은 이렇게 됐으니까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
“가는 길에 올가한테두 오지 말라구 전해 주시구요. 내일 봐요, 키에트.”
내 말에 이어 리리아나가 쌀쌀맞게 인사를 건네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어쩐지 문 안쪽에서 “예, 내일. 예.”라고 말하는 키에트의 흐릿한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렇게 오전 수업을 채 30분도 하지 않고 나온 나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하루 전날 가봉까지 끝나는 거라니까. 걱정하지 마.”
“웅.”
애당초 나는 걱정을 한 적이 없는데.
너무 의기양양하게 내 걱정을 대신한 리리아나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리리아나의 이런 당당함은 나를 약하게 만든단 말이지.’
하지만 뭐,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거.
‘솔직히 좋아.’
처음해 보는 거라 더더욱, 즐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자, 이제 집에 데려다줄…….”
“저, 영애.”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마차쪽으로 걸어가던 리리아나의 말을 막은 그녀의 하녀가 난감한 듯 나를 흘끗 보았다.
“백작님과의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벌써?”
매우 바쁜 포틀런 백작이 철칙처럼 지키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마다 갖는 가족 식사였다.
아카데미에 있는 리리아나의 오빠 율리우스조차 예외는 아닌 이 약속에 늦는다는 건.
포틀런 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남았는데?”
“지금 바로 돌아가시면 괜찮은데…….”
나를 흘끗 보는 하녀의 시선에 내가 먼저 리리아나의 팔을 앞으로 밀었다.
“얼른 가. 여기서 오네 안 멀어. 헤일이랑 걸어가든가 대여 마차 부르면 돼.”
“하지만…….”
“백작님께서 기다리셔! 얼른 가.”
“…….”
리리아나가 미안한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 모습에 더욱 빵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오늘 고마웠어!”
그 미소가 통했는지 피식, 하고 웃어 버린 리리아나가 알겠다는 듯 마차에 올라탔다.
“꼭 대여 마차 빌려서 가. 알겠지?”
“웅, 알겠어.”
리리아나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지 몇 번이나 더 당부한 리리아나가 탄 마차가 서서히 멀어지며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걱정은.”
피식 웃으며 헤일의 손을 꼭 잡았다.
“여기 한두 번 오는 것두 아니구! 헤일이 같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구치?”
“네.”
내 말에 헤일이 엷게 웃었다.
“그래도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돌아가요.”
“응!”
헤일의 말에 아직은 밝은 하늘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루 종일 움직이고 돌아다녔는데도, 어쩐지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리리아나랑 내내 하도 떠들어서 그런가.
“오늘 재미있었다. 구치?”
“네.”
약간 들뜬 표정으로 헤헤- 하고 웃자 입김이 뽀얗게 올라왔다. 하지만 추위도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은 열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친구들이랑 노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전생의 레티시아 시절뿐만 아니라 이시아 시절에도 드물었던 경험이었다.
이시아 때는 돈이 없었기에 친구들과 쇼핑을 하거나 뭘 사 먹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레티시아 시절에는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고.
또래 영애들은 내가 아빠 딸이라 꺼려 했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뒤로는 벨리아 숙모가 나를 밖으로 내보내 주질 않았다.
할아버지랑 아빠가 돌아가신 뒤, 가문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내가 에시어라는 걸 누가 알까 싶어 친구는커녕 지인도 많이 만들지 않았다.
게다가 돈을 버느라 제대로 쓰지도 못했고.
와, 나 진짜 바보같이 살았네.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게 속상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
우울한 생각 금지.
생각을 타래를 뚝 잘라 내듯 고개를 저었다.
누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일주일 뒤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게 운명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이들에 비해서는 운이 좋은 게 아닌가.
내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으니까.
최소한 내 죽음에 대해서 준비를 할 수 있었고, 그 이후를 대비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허투루 쓰기가 미안했다.
그러니, 딱히 내게 해만 끼친 건 아니야.
잘 준비해서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면 될 거 아니야.
자기 연민에 빠져 허송세월하는 것보다 그게 백배는 나았다.
그러니.
‘우울 금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오네로 향하는 사거리였다.
“여기서 길만 건너면 오네지?”
“네.”
“얼른 들어가서 따뜻한 수프 먹을래.”
“펠이 준비해 놨을 거예요.”
역시.
내 마음을 어쩜 이렇게 잘 아는지.
헤일도 좋고, 펠도 좋았다.
“얼른 가자.”
당연히 수프도 좋았다.
얼른 가서 입 안을 데우고 목구멍에서부터 가슴까지 뜨겁게 내려갈 수프의 맛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우리의 걸음보다 해가 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고, 나랑 헤일이 오네의 초입에서 집쪽으로 조금 더 들어왔을 때는 이미 캄캄해져 버린 뒤였다.
그나마 골목마다 작게 달린 가로등 덕분에 완벽한 암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헤일의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빨리 어두워질 줄 알았으면, 리리아나 아가씨 말대로 마차를 빌릴 걸 그랬어요.”
“그러게.”
금방 갈 수 있을 줄 알았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들뜬 탓이었다.
“얼른 가자.”
“네.”
하지만 어쩜 이렇게 내 안 좋은 촉은 딱 들어맞는 건지.
“야, 너 거기.”
어둑어둑한 골목길 사이에서 가면을 쓴 남자 두엇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저놈들.
아무래도 그때 그 애드먼 자작가의 망나니 같은 놈들인 듯한데.
비열하게 가면 쓰고 오네의 애들만 골라서 괴롭히던.
물론 새로운 놈들인지 아니면 기존에 있었던 놈들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그놈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하려는 듯한 기척에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 얼른 가자.”
어린 나는 무사할 수도 있겠지만, 저놈들의 말투나 행동을 보아하니 헤일을 건드릴 심산인 듯했다.
똥은 최대한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괜히 밟아서 기분 나쁜 상황을 만들 필요 뭐 있겠나 싶어 헤일의 손을 꼭 잡았다.
“얼른 가요.”
“응.”
“거기 안 서?”
너 같으면 서겠니?
약간 입이 마르는 것만 같아, 더욱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여자와 어린아이의 걸음이 빨라야 뭐 얼마나 빠르겠나.
“야.”
타닥타닥.
금세 따라잡힐 듯 가까워지는 남자들의 발소리에 이능을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주인님?”
앞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쟈이든과 리안을 딱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흐엉, 쟈이든.”
나도 모르게 왈칵 터진 울음에 순간 쟈이든의 눈깔은 벌겋게 뒤집히고, 리안의 표정은 서늘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이 새끼들이 다 뒈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