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17)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7)화(17/141)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고민을 하다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선생님.”
“예, 아기씨.’
“저, 화장실 갈래요.”
“아.”
그제야 일어났던 이유를 납득한 선생들은 굳어졌던 표정을 풀고 인자하게 웃었다.
“다녀오세요, 하녀를 불러 드릴까요?”
“아뇨.”
민망함에 대충 둘러댄 그 말에 챈들러와 제이슨이 선생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큭.”
“병신.”
그리고 리리아나는.
“올가 선생님은요?”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아, 올가 선생님께선 이틀 정도 뒤에 도착하실 겁니다.”
“왜 늦으시는 건데요?”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무책임하네요?”
리리아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의자에 몸을 묻자 백작가 하녀들이 급히 다가와 물 잔을 건네었다.
그 모습에 선생들은 당황스러움에 헛기침을 했고, 난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 모습에-
“아기씨.”
문앞을 내내 지키고 있었던 듯, 헤일이 다급히 다가섰다.
“헤일, 왜 여기 있어?”
“네?”
“휴게실 가서 좀 쉬지.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구.”
“이렇게 중간에 나오실 수도 있잖아요.”
요 근래 아리나와 린지가 부쩍 친하게 굴며 작은 숙부 내외에 챈들러, 심지어는 큰오빠의 칭찬을 하며 그들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세뇌시키듯 돌아가며 하는 말에 질려 헤일을 데려온 것인데.
“힘들잖아.”
“괜찮아요.”
고개를 저으며, 나를 살피는 헤일의 다정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전생에서는 왜 헤일을 못 봤던 걸까.
그녀에 대한 기억이 그야말로 전무했다.
‘오네로 데려가도 될까?’
사람을 함부로 믿기에는 내가 너무 순수하지 않았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며칠 전 베넷과의 대화에 이어,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는 감정이 드는 헤일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어디 불편하셔서 나오신 거예요?”
“아!”
다정한 물음에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 가려구.”
“모셔다드릴게요.”
“응!”
* * *
내가 돌아온 뒤, 첫 수업은 철학이었다.
“은행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와 신용입니다. 이번 첫 시간은 여러분들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수업을 잘 듣고, 돌아가셔서 신뢰와 신용의 차이에 대해 한 장에 서술해 오세요.”
“웩.”
“직계분들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철학 선생, 키에트의 말에 챈들러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떤 주제에 대한 글쓰기는 그야말로 지식의 완성이었다.
글씨는 어렵고, 필체는 수려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뭘 알아야 쓰지 않겠나.
그러니 이미 그의 실력이 다 뽀록이 난 상황에서의 그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대신 써 달라고 하거나, 베껴 오시는 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습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너네 실력대로 하라고 압박하는 키에트의 말에 제이슨이 입을 벌렸다.
당연히 남에게 써 달라고 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한심해라.
진짜 이런 놈들이랑 친해지려 했던 전생에 뒤늦게 수치심이 몰리는 기분에 고개를 돌리자 키에트가 나를 빤히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매우 묘한 시선이었다.
이전의 실비아처럼 적대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마치 사자 굴에 던져 놓고는 사냥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며 즐기는 거 같달까?
어떤 면에서든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시선을 다시 올려다보았을 때 이미 그는 고개를 돌린 뒤였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니, 자유롭게 서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책상 사이를 느리게 걸으며 뒤로 물러선 키에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볼 생각은 않았다.
“네.”
그가 제게 적대적이라고 해 봐야.
이전의 실비아나 다른 선생들과는 달리 제게 기회를 주고 있지 않은가.
“자 수업을 시작하죠.”
그러곤 눈앞에 놓인 벽 위에 글자들을 띄웠다.
고대어.
“레티시아 아기씨께서 읽어 주시죠.”
이것으로 명백해졌다.
이 사람은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 * *
“숙제 잊지 마시구요.”
진 빠질 정도로 긴 수업을 마친 뒤, 느적느적 걸어 나가는 내 뒤에서 키에트가 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에 어쩐지 약이 올라 홱 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나를 향해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수업 시간 내내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몇 번이나 궁지로 몰았다.
‘아니, 대체 왜?’
나랑 처음 본 사이 아니었나?
‘또 숙모의 입김인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그렇다기에 챈들러나 제이슨에게 특혜를 주는 부분이 전혀 없질 않았던가.
되레 그쪽으로는 관심조차 갖지를 않았다.
거기다 이번 선생들은 죄다 베넷이 할아버지의 특명을 받아 뽑아 올렸으니 숙모의 입김이 닿지는 않았을 터.
‘근데 대체 왜?’
뭐 때문에 나한테만 질문을 쏟아 내며 어디,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해 보자, 라는 듯이 몰아붙였던 걸까?
마치 광기에 휩싸인 미친놈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을 쏟아 내던 키에트를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키에트는 방실방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만나요.”
‘허.’
뭐 저렇게 보면 호감이 있는 것도 같아 보이는데.
대체 왜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을 내냐구.
고대어로 된 철학자의 문장을 읽고, 해석해서 내 의견까지 피력해 보라니.
나 6살인데요? 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 눈 속에 담긴 ‘이건 못하겠지?’에 발끈해 보이는 족족 대답한 게 화근이었던 것도 같다.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느꼈던지.
그것도 아니면 자기가 독수리 엄마던가.
제 새끼 산꼭대기에서 떨어트려서 살아나나 못 살아나나 시험하는 거.
만약에 그런 거라면-
‘미친놈 맞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당초 잘 보일 생각 하지 말아야지.
그를 외면하며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나저나 올가는 왜 늦는 거지?’
계단을 톡톡 내려가며 보이지 않던 올가를 떠올렸다.
솔직히 며칠 동안 올가가 누구일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잠도 잘 오질 않았다.
할아버지가 내게 이능이 있다는 걸 알자마자 불러들인 데다가 베넷도 그를 두고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나도 모르는 내 이능을 확인할 수 있다니.
설레지 않겠는가.
거기다 배울 점도 많을 거야.
뭔가를 배우고, 내 재능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솔직히 처음의 당황스러운 감정이 사라지고 나니, 오네로 가기 전까지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어쩐지 선물처럼 느껴졌다.
전생에 아쉬웠던 할아버지와 대화도 즐거웠고, 앞으로 만나게 될 아빠랑도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께 하는 대로만 하면. 아빠도 감정을 드러내 나를 아껴 주시지 않을까?’
솔직히 요즘은 그 생각을 하면,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고아였던 이시아의 기대에 찬 감정이 레티시아의 감정에 얽혀 들어와 더욱 그런 것 같기도하고.
이시아 시절로 세상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가족의 정이 무엇인지.
솔직히 지금의 나도 제대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나도 전생에선 아빠나 할아버지께 직접적인 사랑을 받아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냥 뒤늦게 이런저런 부분들이 아빠가 내게 보여 줬던 사랑이었고, 할아버지가 내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이었겠구나, 라고 이성적으로 이해한 것뿐.
그랬으니까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씰룩이면서 좋아할 때도, 그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자꾸만 생각을 하게 되는 거겠지.
그래도 그 전생을 겪고 다시 돌아온 지금,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 몸의 반응도 언젠가는 생각을 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워지겠지.
‘노력하면 되는 거야.’
작은 주먹을 꼭 틀어쥐어 작게 아래위로 ‘아자!’ 하고 내리며 통통 튀어 계단을 내려갔다.
금세 좋아진 기분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희한하게도 어른의 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해도, 어린 몸에 담긴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런지 나쁜 감정들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질 않았다.
‘얼른 방 침대에 가서 누워 책 봐야지.’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홀을 빠르게 가로질러 문 앞에 서자, 앞에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던 리리아나가 나를 흘끗 돌아보았다.
“…….”
나를 빤히 보는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약간 균열이 이는 걸 보며, 괜히 불똥이 튈까 싶어 빠르게 그녀를 지나치자
“야.”
리리아나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난생처음 “야.”라고 부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