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18)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18)화(18/141)
“…….”
순간 처음 들은 부름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몸을 삐걱대며 고개를 돌렸다.
“어? 어어.”
“이렇게 보면 여전히 멍청한 레티시아인데…….”
그리 말하며 샅샅이 나를 살피던 리리아나의 암녹색 눈망울이 쭉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눈을 맞췄다.
“네가 정말 이능력자야?”
“어? 어. 그렇대.”
“무슨 이능인데?”
“몰라.”
“하, 멍청이.”
리리아나가 혀를 찼다.
“선생들도 그렇고 가신들도, 이 멍청이를 대체 뭘 보고 똑똑하다고 눈을 빛낸 건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리리아나가 마침 도착한 마차에 올라탔다.
“너, 내일은 내 옆에 앉아.”
“어?”
“내 옆에 앉아서 수업 내용 자세히 설명 좀 해.”
그러곤 이내 의자에 앉았고,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다닥다닥 소리를 내며 마차가 내 앞에서 멀어졌다.
“…….”
그리고 그 앞에 혼자, 아니 헤일과 단둘이 남은 나는 순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하려는 듯 헤일을 바라보았다.
“헤일, 지금 쟤가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한 거지?”
“예에.”
그치, 나한테 공부 좀 도와 달라고 한 거 같은데.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부탁하는 것처럼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하지만 그게 너무 리리아나 같아서 어쩐지 웃음이 났다.
“큭.”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몸을 돌리자, 헤일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런 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곤 내 손에 들린 책을 받아 들어 뒤쪽으로 조금 물러서서 따라왔다.
있는 듯 없는 듯, 전혀 불편함 없이 나를 챙기는 솜씨가 한두 해 하녀 일을 해 본 게 아닌 듯했다.
‘분명 아리나가 하우스키퍼라고 했는데.’
하우스키퍼는 저택에 들어온 아이들이 처음 들어와 배우는 일 중의 하나였다.
한데, 헤일은 하녀의 일을 마치 배운 것처럼 잘하질 않나.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것처럼.
너무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헤일이 의심스러웠다.
헤일이 좋은 사람이고, 똑똑하다는 건 확실한데.
전생의 안 좋았던 기억들 때문에 쉽게 사람을 믿기 어려웠다.
“근데 헤일은 왜 별채에 왔어? 나처럼 홀대당하는 직계 말구, 다른 사람 모시면 훨씬 편할 텐데.”
“지금 아기씨 모시는 것도 충분히 편하고 좋아요.”
“별채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잖아.”
“해야 할 일이 많은 게 오히려 잡생각을 안 하게 해 주니 좋을걸요? 거기다 아기씨도 너무 좋구요.”
대답이 완벽하다.
마치 내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대답이었다. 심지어는 얼굴까지 살짝 붉히고 있질 않은가.
거짓말은 분명 아닌데,
‘뭘까. 이 느낌.’
별채로 돌아가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만-
‘모르겠다.’
이내 털어 버리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선 그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현재는 아리나와 린지를 곁에 두는 것보다는 헤일이 옆에 있는 편이 나았다.
그들에겐 내가 보여 줘야 하는 부분만 보여 줘야 했으니까.
‘숙모에게 들어가야 하는 내용만.’
헤일이 숙모의 또 다른 눈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휴.’
확실히 내용을 아는 것과 이 세계에서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론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완벽하지만, 현실에 적용할 때에 따로 노는 기분이랄까.
그 갭을 극복하는 것이 내가 오네로 가서 할 일이었다.
그 어떤 것도 할아버지와 아빠를 살려서 오래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계획을 방해하게 두지 않을 거다.
그러기 위해서-
‘리안과 친해져야 해.’
여주인공이 따로 있었으니, 그가 나를 여자로 보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은인으로는 여겨 주길 바랐다.
‘더불어 울 아빠 귀한 딸로.’
그 상태에서 아빠가 살아 있다면 꼭 에시어가 아니어도 충분히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게 가능할 테니까.
새로 가문을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일이 커지네.”
“예?”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헤일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만 고개를 내저으려 헤일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본성 앞에 놓인 황금색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
황제의 시종이 타고 온 게 분명해 보였다.
‘확인하러 왔구나.’
은퇴가 진짜인지, 할아버지가 정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건지.
아마도 황제의 주치의도 동행했겠지.
‘그럼 더 잘됐지, 뭐.’
뛰어난 의사일수록 익투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폴이 놓치는 것까지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폴도 황제의 주치의 못지않게 뛰어난 의사였다.
버드나무 껍질을 알려 줬으니, 곧 치료제를 만들어 오겠지.
그 사이에 악화되는 것만 막으면 돼.
‘알겠다. 습관을 바꿔 보지.’
할아버지도 약속하셨으니까. 치료제를 만들기 전까지는
버티실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병이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이 귀족 회의 참석 이후였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으실 거야.’
괜찮을 거라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으며 멈추었던 걸음을 돌렸다.
“야.”
하지만 그런 내 앞을 또다시 막아선 7살과 8살의 등장에 주춤 뒤로 물러서다, 이내 긴 한숨을 터트렸다.
“어휴.”
* * *
“더러워.”
“사기꾼.”
“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베넷이 다 알려 주냐?”
가지가지 하네.
내가 진짜 이런 것들이랑 친해져 보겠다고 버둥버둥거렸다니.
또다시 밀려드는 수치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 너 주제도 모르고 오네에 가겠다고 했다며?”
챈들러가 이죽거렸다.
“아, 연습하러 가는 건가?”
“하긴 언젠가는 거기서 살아야 할 텐데. 그냥 아예 오지 마.”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제깟 게 무슨.”
“…….”
쏟아 내는 말의 수위를 보자니 아무래도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기들끼리 좋다고 킥킥거리는 7살, 8살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보며 아주 크게 “헤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뭐?”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라구우.”
한심하다는 듯 고개까지 털레털레 젓는 내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챈들러와 제이슨이 입을 벌렸다.
저번에도 그렇고 여전히 자기들에게 말대꾸를 한 것에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물론 지난 생을 포함해 회귀하기 전까지 난 그들이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기라면 기고, 하라면 했다.
그때는 이들의 비위를 맞춰서 그들과 친해져야 이 집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눈만 마주치면 화를 내는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와 곁에 없는, 심지어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무심한 아버지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린아이의 생존 본능이란 이렇듯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인생 3회 차였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지금은 그런 노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즉시 이 집안에서 내쫓기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개차반들을 받아 줄 이유가 없지.
그리고 난 배를 갈아탔거든요.
‘할아버지한테로.’
마고 테일러가 맨날 화만 내는 호랑이 같은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이 집안의 가주였다.
아버지는 어쨌든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나도 그의 핏줄이지 않은가.
내가 오네에 가 있는 동안 황태자와 친분을 얻어서 가문을 돕는다면, 가문을 물려받지는 못해도 뭐 하나라도 내어 주실 게 분명했다.
‘그래 그렇게 차근히 움직이면 되는 거야.’
아버지에 대한 것도 그렇고.
시간은 내 편이었다.
‘헤헤 완벽해.’
챈들러와 제이슨이 있든 말든 두 멍청이들의 등장과 동시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밋빛 미래에 입꼬리를 배시시 말아 올리자,
“웃어?”
내내 자기들끼리 낄낄대던 건 싹 잊은 건지, 기분이 상한 듯 챈들러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 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 이 8살아.’
“그럼 울까? 너네 바보야?”
“너, 너네?”
“모!”
하늘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턱을 올려 들자, 이죽거리던 챈들러의 퉁퉁한 아래턱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빼짝 마른 제이슨의 귓불도 마찬가지였다.
바보들.
한심한 얼굴들에 고개를 젓자, 정신을 차린 듯, 챈들러의 퉁퉁한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익!”
“이번엔 때리면 할아버지한테 이를 거야.”
“하, 너 지금 할아버지 몇 번 뵀다고 그러는 거야? 너까짓 게? 고작 사생아 딸 주제에?”
“…….”
“직계인 나를 두고 할아버지가 너를 두둔해 줄 거라고 생각해?”
챈들러가 이죽거렸다.
만약 지금이 회귀 전이었다면 난 속절 없이 챈들러의 말에 크게 흔들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연하지! 할아버지는 공명정대하신 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