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21)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21)화(21/141)
“뭐, 뭐?”
“레샤도 아빠 있어요.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는 거예요. 엄마도 아빠도 없지 않아요.”
커다란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흘러내리는 걸 손등으로 슥슥 닦았다.
의도한 건 아닌데 의도한 것처럼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의 표정은 더욱 더 딱딱하게 굳어졌고, 막내 숙모 헬렌은 할아버지의 심기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당사자인 둘째 숙모인 벨리아는 내 모습에 되레 파르르 떨며 몸을 돌렸다.
“세상에! 얘 봐!”
“…….”
“내가 지금 너 부모 없다고 했니? 부모님이 곁에 없는 걸 이야기하는 거잖니, 세상에. 그리고 어디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나서, 나서기를! 네가 이러면 욕을 먹는 건 네 아버지라 내 몇 번을 말하니.”
“하지만 아빠가 그랬어요. 부당한 일에 굽히지 말라고…….”
“얘!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내 말에 벨리아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나와 둘째 숙모를 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은 짙어졌다.
‘이번 기회에 의심을 확실하게 심어 줘야 해.’
공작 부인이 돌아가신 후, 안채 살림을 담당하고 있는 벨리아 숙모는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안채 살림을 꾸리기엔 매우 부족한 사람이었다.
커다란 장원을 가진 백작가에서 시집을 온 탓이라 그런지 매우 사치스러웠고,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거기다 고용인들에게도 공정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이를 알고도 묵인하시는 듯 보였다.
‘할아버지의 사정은 할아버지의 사정이구요.’
이제 나한테선 그만 손을 떼게 만들고 싶었다.
더는 내 일에 상관할 수 없도록.
그래서 일부러 더 챈들러와 부딪히고, 벨리아에게 대드는 것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나를 대하는 벨리아 숙모의 실체를 봐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지금 이게 부당한 일이니? 어?”
“그게 아니구.”
“얘가 오냐오냐했더니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너.”
“그만.”
그 순간, 할아버지가 손을 들어 숙모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아버님!”
할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당황에 갈라졌다만 그런 벨리아를 막은 헬렌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형님.”
그 모습에 발끈해 한 발 나오려던 벨리아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레샤.”
양쪽 어깨 위에 온기가 내려앉았다.
거기다 익숙한 향수 냄새.
“막내 숙모.”
헬렌 에시어.
윈드런 에시어의 부인이자 제이슨의 엄마였다.
남작가 출신인 그녀는 전생에선 그나마 내게 나쁘지 않게 굴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더 정확히는 나를 대놓고 괴롭히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난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었는데…….
“이건 네가 오빠들에게 사과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
“둘째 숙모께도 말이야.”
헬렌 숙모가 은근히 어깨를 짓누르며 사과를 강요하고 있었다.
어린애에게 충분히 강압적이게 느껴지는 그 채근에 숨을 몰아쉬었다.
막내 숙모는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아 그냥 두었을 뿐이었다.
‘하, 내가 또 사람을 잘못 봤네.’
나쁘지 않았던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할아버지께서도 난감해하고 계시잖니. 응?”
할아버지를 언급한 헬렌이 내 등을 다독였다.
“자, 우리 레샤 착하지?”
하지만 다시 말했지만 난 더 이상 이들에게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해서 헬렌의 손에서 빠져나와 할아버지 앞에 섰다.
“잘못했어요.”
그러곤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들었다.
그런 내 행동에 헬렌은 굳이 뒤쫓아 나오면서까지 잘했다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둔탁한 두드림이 가슴에 울렸다.
아마도 이 상황을 수습했다는 생각에 매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하지만-
“사과하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이 상황의 키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런 할아버지는 내 사과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게 조금 실망했다는 듯한 시선은 덤이었다.
“바른 사과란 상대를 보며 하는 것이다. 그러니 레티시아 네가 진심으로 사과를 할 작정이라면 나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오빠들과 큰어머니를 보고 해야지.”
그 푸른 눈동자에 모두 이해했다는 듯 작게 끄덕인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레샤는 제대로 한 것인데요. 할아버지.”
“……뭐?”
“전 할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게 맞아요.”
가늘게 뜬 눈에 의구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래?”
“네.”
“왜지?”
“오빠랑 싸운 거는 누가 먼저 잘못했든지 가족 간의 우애를 저버리는 일이고, 그건 할아버지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거니까요.”
“…….”
“잘못한 거예요.”
최대한 또박또박 대답하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가 앞쪽으로 살짝 기울였던 몸을 일으켰다.
“허면, 챈들러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는 게냐.”
“네.”
고개를 끄덕였다.
“챈들러는 네가 이유 없이 괴롭혔다고 하였는데?”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 건 아닐 거다.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이렇게까지 화가 나신 건, 우리 둘, 아니 셋 사이에 벌어진 일을 대충은 알고 계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모른다 하셔도 상관 없었다.
얘기하면 되니까.
“이유 없이 괴롭힌 건 오빠예요.”
고개를 들었다.
“허면 챈들러는 왜 때린 거지?”
뒷짐을 진 채 나를 빤히 보는 시선에 잠시 고민하는 듯 입을 쭈욱 오리처럼 내밀었다.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잴 틈도 없이-
“레티시아.”
압박하듯 부르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챈들러 오빠가 아빠가 죽으면 나는 집안에서 쫓겨날 거라고 했어요. 오네로 가는 것도 연습하러 가는 거라고 그랬어요. 아빠는 더러운 사생아고 엄마는 디아브리아 출신이라서 더럽다구. 레샤도…….”
울먹일 생각은 없었는데, 말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연기력에 목이 멜 것만 같아 말끝을 뭉개자-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벨리아가 소리를 높였다.
“거기까지.”
하지만 벨리아의 항변을 묵살하듯 손을 든 할아버지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벨리아와 그 치마폭 뒤로 숨은 챈들러를 바라보았다.
“아, 아버님.”
“자식 교육 헛시켰군.”
챈들러를 변호하려던 벨리아의 말을 막는 할아버지의 시선에 벨리아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큭.”
하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막내 숙모인가.’
나만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까.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무능한 안드레아와 윈드런은 그야말로 한 끗 차이인데, 윈드런은 나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후계 명단에 이름도 올리질 못하고 있었으니.
‘짜증도 나겠지.’
이해가 되는 그녀의 행동에 길게 한숨을 내쉬자, 그 소리를 들으신 듯 할아버지가 나를 응시했다.
“레티시아는 그만 일어나고, 챈들러와 제이슨은 둘 다 내가 일어나라 할 때까지 꿇어앉아 있도록 해.”
“엄마아.”
“엄마.”
마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엄마들을 찾아 울먹이는 챈들러와 제이슨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앞으로 걸어 나간 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버님!”
“아버님,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요. 그리고 제이슨은 잘못이-.”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벨리아의 악에 찬 부름과 달리 차분히 설득하려던 헬렌의 목소리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그녀에게 가닿았다.
차고, 서늘한 그 눈동자에 언제나 차분하던 헬렌이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들이 했던 말들을 들으셨다고.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는 말을 더 해 봐야 오히려 내게는 마이너스였으니까.
‘조용히 방에 가야지.’
이 작은 몸은 귀엽고 다 좋은데 너무 쉽게 피로해졌다.
거기다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챈들러의 다리를 걷어차기까지 했으니.
피로가 그야말로 물밀듯이 밀려들어 지금 당장에라도 잠이 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졸려.’
차마 입을 벌려 하품을 할 수는 없어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자 할아버지의 부름이 들렸다.
“그리고 레티시아.”
도망가려는 거 걸린 건가? 하는 마음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혹여 같이 벌을 받으라는 건가? 짧은 순간 진짜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네.”
“레티시아!”
그리고 그 순간,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그와 동시에 코에서 뜨끈한 것이 흘러, 입에 고였다.
‘피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쿨럭 기침과 함께 나온 핏물이 손바닥에 가득 고였다.
또 이능 부작용인가?
오늘 내가 무슨 이능을 썼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놀라 눈을 부릅뜬 할아버지의 모습에 괜찮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쓰러지진 않았으니까.’
“할부지, 나 괜찮아여. 폴만 불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