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24)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24)화(24/141)
‘하, 진짜 성질대로 할 수도 없고.’
거기다 지금은 레티시아 곁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돈이 되었다.
‘레티시아 아기씨의 곁에 바짝 붙어서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알아 오라는 명이셔.’
‘이게 어떤 기회인지 알고 있지?’
아니 이건 기회가 아니라, 악몽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알기 위해서는 레티시아의 곁에 바짝 달라붙어 있어야만 가능했다.
벨리아 님께서 바라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닐 테니까.
‘이능력이 무엇인지.’
‘섭섭지 않게 챙겨 주실 거네. 자네도 그분 성격 알지 않은가. 상벌에 엄격하신 분인 거.’
은근한 엘렌의 압박을 떠올리며, 양손을 맞잡았다.
한마디로 벨리아 님께 드릴 정보가 없다면, 지금까지 제가 누리던 모든 것들이 끝이라는 소리였다. 그뿐 아니라, 지금 제가 누리는 모든 것들까지도.
손바닥에서 스미는 땀이 기분 나쁘게 서로 달라붙어 끈적였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제게 거리를 두고 있었고, 곁에 오는 것조차 달가워하질 않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점점 헤일에게 제 일마저 빼앗길 게 눈에 선했다.
내내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거기다 가주님께서 직접 후계의 자격까지 언급하셨다면, 그녀의 오네행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오네에 따라갈 측근 하녀가 제가 된다면.
‘돈을 뜯어낼 방법은 무궁무진해.’
그렇다면-
‘역시나 방법은 그것뿐인가.’
아리나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솔직히 이것까지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었다.
어린아이에게 쓰기에는 매우 까다롭기도 하고, 위험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쓰면 될 거다.
‘몇 번 사용해 봤으니까.’
고민했던 마음을 다잡은 아리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여우 같은 거 아기씨가 동앗줄 될 거 같으니까 저렇게 알랑방구 끼는 거야 그렇지 아리나?”
“어? 어.”
아리나가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내내 말을 쉬지 않았던 린지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
“어, 잠깐 아래층에 다녀올게, 식사도 확인해 봐야 하고.”
“나도.”
“아냐, 넌 여기서 정리하고 있어. 나 혼자 움직이면 되지. 뭘 둘 다 힘들게 움직여.”
평상시 대부분의 일들을 제게 시키곤 했던 아리나의 놀라운 말에 린지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왜 그래?”
“뭘.”
린지의 말에 흘끗 그녀를 보던 아리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고 그 모습을 린지가 유심히 지켜보았다.
* * *
어떻게 물어야봐야 할까.
‘너 믿을 만한 사람이야?’라고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아니라고 누가 대답하겠어.
바보가 아니구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헤일.”
“예, 아기씨.”
해서 바보처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언제나 정답은 단순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혹시 다른 데서 하녀로 일해써써?”
“네.”
“!”
헐.
그야말로 주저함도 없이 튀어나온 인정에 순간 당황한 내가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물론 내 걸음을 좇아 헤일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 어디?”
퐁 하고 뛸 듯이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선 채 되묻는 물음에 잠시 당황한 듯 나를 빤히 보던 그녀가 이내 웃으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저희 집이요.”
“헤일 귀족이었어?”
“아뇨.”
놀라 바보같이 되묻는 말에 헤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난한 집안 장녀거든요.”
“…….”
“부모님은 두 분 다 제가 어릴 때부터 상단에서 일을 하셨어요. 제국 전체를 돌아다니는 일이라, 1년 중에 한 달도 집에 계시질 않았어요.”
가족들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헤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 분이 사이가 워낙 좋으셔서 집에 한 번씩 돌아오실 때마다 안겨 주신 동생들이 총 다섯이었어요. 그러니 어지간한 집안일은 다 잘해야 했어요. 사람을 쓸 형편은 아니었으니까요.”
“아.”
“탁아소 열어도 될 정도로 아이도 잘 보고, 살림도 잘하니까 마샤 아주머니께서 보시고 추천해 주신 거예요.”
내가 궁금했던 부분까지 풀어서 설명을 덧붙여 준 헤일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집에 없고, 어려서부터 혼자 집안일을 다 책임지고, 동생들까지 다 돌봐야 했다면.
‘진짜 살림꾼 맞았네.’
옹색하다고 생각했던 두 번째 가정이 맞아떨어진 것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은 면을 보고 싶어서 생각했던 건데-
‘희한하게 맞았네.’
어찌 됐든 며칠 간 그녀의 능숙함에 대한 의구심이 해결되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헤일은 지금도 2급 하녀 정도는 충분히 될 거야.”
“그냥 몸 쓰는 일만 잘하는 거예요.”
“겸손은.”
영락없이 어린애 같은 말투로 어른의 단어를 사용하는 내가 귀여운 듯 헤일이 작게 웃었다.
“왜 웃어?”
“그냥요. 아기씨가 너무 귀여우셔서요.”
헤헤, 내가 좀 귀엽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위아래로 으쓱하며 웃자, 그 표정에 헤일이 엄마미소를 띤 채 고개를 기울였다.
“제 막냇동생이 올해 6살인데, 아주 떼쟁이거든요. 근데 아기씨는 뵐 때마다 귀엽고, 또 한편으로는 의젓하셔서 참 신기했어요.”
“구래?”
계속되는 칭찬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웃었다.
“네, 어쩜 이렇게 다른지. 집에 갈 때마다 잔소리가 나온다니까요.”
“…….”
“아기씨 정말 대단하세요.”
그 대단하다는 칭찬 속에 담긴 진심에 어쩐지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를 것만 같아 고개를 푹 숙여 다급히 종종 걸었다.
아이의 몸이었지만 난 어른이니까 이런 칭찬을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칭찬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릴 때 채워지지 않았던 마음의 구멍을 메울 수 있는 정말 아무 사심 없는. 그야말로 아이니까 들을 수 있는 좋은 말들.
구박처럼 이어지던 말들이 아니라 귀엽다, 사랑스럽다, 너 어쩜 이렇게 의젓하니 같은. 아이니까, 아이만이 들을 수 있는 칭찬들 말이다.
걸음마만 걸어도 칭찬을 듣고, 혼자 밥만 잘 먹어도 들을 수 있는 말.
신나게 놀고 들어와 저녁 내내 깨어나지 않고 깊게 자는 것만으로도 어이쿠 예뻐라, 라며 뽀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그 별거 아닌 말들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돌아선 순간 눈물이 나올 것처럼 코끝이 시큰거리는 걸 보니.
그 대수롭지 않은 말이 어쩐지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만 같았다.
저릿한 감정이 온몸을 빙빙 둘러 찡하게 울릴 정도로 말이다.
“아기씨 같이 가요.”
“빨리 와.”
* * *
한바탕 붉어져 있던 눈가를 부비고, 겨우 참여한 수업은 예법이었다.
이미 20살의 레티시아의 영혼이 있는 내게 예법은 솔직히 누워서 떡 먹기 같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눈 감고도 황실의 예법부터, 레이디로서 해야 할 몸가짐, 움직임과 대화 손놀림부터 춤에 이르기까지 다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내게 이 예법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아프다 그러고 빠질걸.’
하지만 그건 또 할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칠 수 있는 일이었다.
차라리 지루해서 못 듣겠다고 하는 게 낫지.
“하암.”
길게 하품을 하는 나를 발견한 예법 수업 교수인 리슈아 부인이 책을 덮으며 다정히 웃었다.
“지루하시죠?”
하품에 눈물까지 살짝 고인 내 얼굴을 빤히 보며 하는 말이라,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리슈아 부인의 말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리리아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지루하지 않아요.”
그래, 너 잘났다.
바른 자세의 표본처럼 앉아 피아노를 치던 리리아나의 말에 턱을 괸 채 책상에 기댔다.
리리아나가 지루하지 않다니, 오늘 수업은 끝까지 해야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후하암.”
눈치 없는 하품은 노곤노곤 내리쬐는 햇살 탓인지 계속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엷게 웃은 리슈아 부인이 책을 테이블 위에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날씨도 좋은데 오늘은 밖으로 나가 볼까요?”
“정말요?”
축 늘어져 있던 몸을 즉각 일으킨 내 물음에 리슈아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리리아나는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얼굴 타는데.”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거랍니다. 산책을 하는 건, 건강에도 좋아요. 그런 김에 도련님들 승마도 구경하구요.”
햇빛에 그을릴 얼굴을 염려하는 리리아나를 안심시키는 리슈아 부인의 말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아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적당한 광합성과 가벼운 산책은 몸을 건강하게 해 주었다.
거기다 내심 승마 수업을 받는 챈들러, 제이슨이 부러웠는데, 밖에 나간다니 너무 좋았다.
신이 절로 났다.
“레이디답지 못하게. 콧노래는.”
가볍게 타박을 한 리리아나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백작가 하녀들이 다들 들러붙어 리리아나의 머리 위에 커다란 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 위에 양산까지.
마치 밖에 나갈 줄 알았다는 듯한 준비성이었다.
“그럼 나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