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32)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32)화(32/141)
아리나의 절박한 목소리에 엘린이 그녀를 빤히 보았다.
여전히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심드렁한 표정에 아리나가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듯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노력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그 전에도 계속 해 왔던 거였으니까.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다른 패를 보이지 않고서는 엘린, 그러니까 그 너머의 벨리아 님의 마음을 돌이키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쩌지.’
숨을 몰아쉬며 입 안의 여린 살을 확 씹자, 혀끝으로 화악 퍼지는 비릿한 피 맛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피.’
며칠 전 레티시아가 피를 흘렸던 그 사건.
문득 스치는 그 순간에 아리나가 엘린을 보았다.
“아기씨 이능이요. 아니 그 종류요.”
진짜인지, 가짜인지조차 확인할 길 없던 그 진실에 더해 무슨 이능을 타고 태어났는지를 알아 오겠다는 아리나의 말에 엘린이 미간을 좁혔다.
“알아 올 수 있다고?”
“네.”
“설마, 그걸 쓰려는 거야?”
엘린의 말에 아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용량을 늘리려고요.”
그렇다면.
길게 한숨을 몰아쉰 엘린이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옆머리를 매만졌다.
그래, 어차피 아리나는 이대로 쉽게 버릴 패는 아니었다.
린지와 함께 레티시아의 곁을 오래 지킨 유일한 아이였고, 음식도 담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별관에서 아리나가 레티시아를 어떻게 대했는지 제가 뻔히 아는데, 본관까지 함께 오질 않았던가.
‘분명 베넷 님이 하녀를 바꿔 주겠다고 말을 했을 텐데도.’
그렇다는 건 지금 상황이 어찌 되었든 아리나가 레티시아의 측근 하녀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는 의미였다.
‘아기씨가 아리나의 뭐에 삐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슬쩍 아리나를 보았다.
‘그거라면.’
아리나는 믿을 수 없지만, 그건 믿을 만했으니까.
해서 기회을 한 번 더 주기로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는 없어.”
“예.”
“그리고 만약에 들키더라도.”
“알고 있어요.”
엘린의 말에 아리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시어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거.”
성마른 말투로 건네는 말에 엘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움직였고, 아리나의 눈빛은 위험하리만큼 탁하게 물들었다.
그러곤 이내,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엘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요즘 아기씨께서 돈을 찾으세요.”
“돈?”
“네, 아기씨 앞으로 들어오는 돈에 대해서도 물어보시고, 샤리에 님께서 보내시는 돈은 어디 있는지도 물어보시고요.”
아리나의 말에 엘린이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것도 알아봐.”
“…….”
“어디에 쓰려 하는 건지. 설마 샤리에 님과 관련이 있는 건지.”
관련, 이라고 말을 하는 엘린의 은근한 말에 아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헤일에게 솔직히 이야기를 한 이후, 시간은 제법 빨리 흘렀다.
그 사이 헤일은 집에 다녀온다고 한 번 저택을 나갔다 왔고, 이어 그 다음 날 웃으며 들어왔다.
그러곤 돌아와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경매장이 토요일 오후 6시에 열어, 12시면 문을 닫는다는 것까지 알아 온 참이었다.
“그러니 이번 주는 조금 더 일찍 나오셔야 해요.”
“알겠어.”
헤일의 은근한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한테 얘기하께.”
그러곤 수업을 받기 위해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나를 괴롭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키에트의 수업 시간이었다.
한데-
“오늘은 저랑 놀까요?”
키에트 대신 교실로 들어선 올가가 나를 향해 방싯 웃었다. 챈들러와 제이슨은 그를 처음 보았기에 누구인가 서로 눈짓을 교환했고, 리리아나는 내 옆구리를 콕 하고 찔렀다.
“그 물에서 걸어 나왔던 사람.”
“응. 그 선생님.”
“올가.”
“응.”
리리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뭘 우리한텐 뭘 가르치는데?”
그건 나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이능력이 없는 세 사람에겐 뭘 가르칠까? 하고 고개를 들었다.
“자 종이를 나눠 드릴 테니, 동그란 동그라미, 뾰족한 세모, 반듯한 네모를 그려 주세요.”
하지만 종이를 나눠 준 건, 리리아나와 챈들러, 제이슨뿐이었고 내 책상엔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 저는 종이 안 주셨는데요.”
“레티시아 아기씨는 공중에 그려 주세요.”
“…….”
뭔 소린가 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생긋 웃은 올가가 손끝에서 긴 금빛 실을 뽑아 내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렸다.
그의 말대로 삐뚤빼뚤한 부분 없이 동그란 동그라미였고, 뾰족한 세모, 반듯한 네모였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도형들을 보며 남은 세 사람은 입을 헤 벌리고 신기해했고, 나는 입을 다문 채 황당해했다.
뭐 어떻게 하세요, 도 없이 결과를 내라는 요구였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생각을 모아 보세요. 이능력이 있으시니 쉬울 거예요.”
그런 이야기는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배우 추상적인 이야기에 미간을 좁혔지만-
“자 얼른 그려 봅시다.”
올가는 더 이상 힌트를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날 괴롭히는 데에 도가 튼 키에트 못지않게 얄미워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한 달 내 코빼기도 비취질 않고 있다가 나타나서는 이런 수업이라니.
황당함에 더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능력이 있으니까.
도형 그리기 쯤이야, 쉽겠지 싶어 자신만만하게 드레스 소매를 쭉쭉 걷어 올렸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종이 위에 도형을 다 그리고, 색칠해서 문양까지 넣고 꾸미기를 끝낼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는커녕.
손가락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다.
쉽다며.
올가의 말과는 달리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저거 거짓말 아니야?”
챈들러의 이죽거리는 말소리가 뒤통수에 날아들었다.
‘이씨.’
확 치미는 감정에 홱 챈들러를 노려보자, 올가가 나와 챈들러 사이를 막아선 채 방실 웃었다.
“이능을 한번 안쪽에 모아 보세요.”
“안 모아져요.”
“흐름을 읽어 보세요.”
“안 읽혀요.”
“…….”
할아버지께는 천재라고 호언장담을 해 놨는데,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수행하지 못하는 걸 보며 말을 취소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이능을 어떻게 안에 모으는 건지도 모르겠고, 흐름을 어떻게 읽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력이 딸리네.’
이시아 시절에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데,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겠는 나의 이능에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어요.”
고개를 저으며 검지를 올려 들었다.
하지만 올가 역시, 그런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듯 빤히 내려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흐음.”
아무래도 이능이 있는 사람들, 혹은 이능을 발현한 이들에겐 이겐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쉬운 것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설명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의 얼굴에 난 조금 더 시무룩해졌다.
‘해야 하는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 7살이 되기까지 4개월밖에 남지를 않았다.
그 전에 이능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부작용에 시달리면 후계의 자격은커녕 오네행도 없었던 일이 될 거다.
솔직히 후계의 자격은 없어도 상관없었지만, 오네는 아니었다.
‘오네는 반드시 가야 해.’
내 동앗줄 리안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러면 에시어가 망하더라도 나는 그리고 아빠는 살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이렇게 되면-
‘계획 전부 다 망하는 건데.’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약간 똥을 싸는 것처럼 꼭 감은 눈에 힘을 주고,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어 보았으나.
“저거 사기꾼이네.”
“이능도 없으면서 사기 친 거네.”
“똥 싸냐? 얼굴 벌게져서는.”
챈들러와 제이슨의 조롱만 심해질 뿐이었다.
“젠쟝.”
“선생님 레티시아 욕했어요.”
“진짜 시끄러워 주껜네!”
챈들러의 고자질을 타박하듯 짜증을 낸 리리아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은근히 나를 두둔하고 있는 그녀의 눈에도 미미하게 의구심이 서리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역시 이능은 없는 건가.’
전생에 없었던 이능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던가.
그럼 이타성이네 뭐네, 올가가 떠들어 대던 건 뭐야.
나를 빤히 보는 올가를 향해 고개를 바짝 올려 들자-
“연습해 오세요.”
역시나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그가 해맑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오늘 수업 끝.”
“와아아!”
“안녕히 계세요.”
올가의 말에 챈들러와 제이슨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어 일어난 리리아나가 “레샤, 내일 봐.”라며 다음으로 교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남은 건, 허공중에 손가락을 올려 든 나뿐이었다.
약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올가를 만나면 모두 다 해결될 거라고 했었는데.
모두 산산조각 나 버린 기대에 올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올가 선생님.”
“네.”
“제게 이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