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33)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33)화(33/141)
근원적인 물음에 “흐음.” 하고 알 수 없는 침음을 흘린 그가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네.”
“근데 왜 안 되는 거예요?”
“글쎄요.”
“선생님은 배운 거예요?”
“아뇨.”
“이능이 있는 사람들은 그냥 하는 건가요?”
“대부분은요.”
그 말에 더욱 허탈해졌다.
“근데 왜 저는 이능이 있는데도 안 될까요?”
“발현이 제대로 안 되었거나, 흐름이 어딘가에 막혀 있는 거 아닐까요?”
하! 그런 말은 나도 하겠네.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이질 않은가. 한데 그런 말을 하면서 아주 전문가인 척하는 그의 말투에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그를 빤히 보았다.
할아버지가 어렵게 불러왔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었다.
가문의 이능력자들은 말해 주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말이다.
근데 어쩐지 가문의 이능력자들보다 더 아는 것이 없는 거 같았다.
‘사기꾼 아니야?’
사기꾼들 보면 딱 이렇게 잘생기고 순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사기를 치고 다니던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그의 말투에 고개를 들었다.
‘어디 시험을…….’
“이능이 제대로 발현이 안 되었다면, 제가 어떻게 고대어를 읽고 제국어를 하겠…….”
“그건 아기씨의 이능이 아니질 않습니까.”
나를 빤히 보는 올가의 시선에 어쩐지 가슴이 따끔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 * *
‘그건 아기씨의 재능일 뿐, 이능이 아니지요.’
‘아기씨도 아실 텐데요.’
올가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사기꾼인지 아닌지 시험해 볼 작정이었는데, 어쩐지 제 속만 들킨 모양새였다.
‘이능은 스스로 다스리고 발현하는 것이라, 그 부분까지는 도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 최소한 사기꾼은 아니야.
그래도 마음이 상하는 것까지는 도리가 없었다.
나조차도 이능이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데 남들이 말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동그라미, 세모, 네모.
기본 중의 기본.
손끝을 가만 내려다보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아.”
기운 빠져.
올가와의 수업을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만 만나면 내게 있는 이능의 특성을 아는 건 물론이고, 어떻게 해야 발현될 수 있는지도 배우고, 다스리는 것까지 촥촥촥 배워서 빨리 오네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문제는 일단 은퇴와 동시에 가택 연금도 풀렸고, 무엇보다 건강이 문제였는데 그 부분은 폴이 연구하고 있었으니까 걱정할 게 많지 않았다.
폴은 이미 그 치료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힌트와 시간이 문제였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는 해결을 해 주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가 오네로 갔다 와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할아버지는 건재하실 거다.
‘아빠도 아직 시간 있고.’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가장 급한 건 내가 오네로 갈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거였는데.
‘하아.’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고 있는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직계 3세들이 챈들러와 제이슨만 있었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할아버지에겐 이미 후계의 자격을 갖추고 공부 중인 직계 손자들이 있었다.
안드레아 숙부의 장남인 레오나르도와 윈드런 숙부의 차남, 알레프까지.
그 두 사람은 개차반인 챈들러, 제이슨과는 달리 오네에서 2년을 착실하고 보내고 돌아왔고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이었다.
안드레아 숙부가 가문을 말아먹지 않았으면, 아마도 레오나르도나 알레프가 가문을 이어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그렇다고 두 사람이 특출 난 건 아니었다.
그때 말하지 않았던가, 엉망인 자식 농사 아래, 망친 손주 농사가 이어졌다고.
레오나르도와 알레프가 챈들러, 제이슨과 다른 건 자신들이 엉망이라는 걸 아주 잘 속인다는 것 그 정도였다.
그것도 나이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 같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이 내 바로 위인 챈들러, 제이슨과 달리 오네에서 시간을 잘 보내고 왔으니, 나 역시 후계의 자격을 위해 반드시 오네에 가야만 했다.
그래야 처음의 마음처럼 에시어가 망하더라도 먹고 살 걸 미리 받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의 다른 방계 형제들처럼.
할아버지께는 조금 죄송한 이야기지만, 아빠가 에시어를 물려받지 않는 한 에시어에 미래는 없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할아버지께서 조금 더 오래 사시면 딱 그만큼만 더 영속할 수 있을 정도로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후계자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가망 없지.’
안드레아는 능력이 없었으니까.
윈드런도 마찬가지고.
“후우.”
거기다 가을이 되기 전에 펠루아나에서 제국과 국경으로 맞닿아 있는 리비스 영지를 넘을 거였다.
그게 테-펠 영토 전쟁의 서막이었다.
겨울이 전쟁의 최악의 시기라는 건 서로 잘 알고 있으니, 펠루아나는 빠르게 진격하겠지만 제국에서는 펠루아나의 미련함과 야만적인 행태를 비웃으며 버티려 할 거다. 방어만 잘 해도 알아서 무너질 거라고.
하지만 제국과 리비스 영주는 펠루아나가 왜? 가을의 끝자락에 공격을 했을까, 를 생각했었어야 했다.
그들도 뻔히 겨울이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유리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황도 함락.’
펠루아나는 제국의 영지들이 수성을 위해 성벽을 단단히 걸어 잠글 때, 그대로 황도를 함락하고 황제의 목을 베려 했음을.
‘솔직히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안 막았으면 황제는 진작에 죽었을 텐데.’
할아버지가 가택 연금령을 깨고, 직접 황도로 향하는 길목을 막지 않았다면 황제는 일찍이 죽었을 거고, 아마도 리안은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채 평민으로 살다 죽었을 거다.
아, 주인공 버프가 있었으니.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으려나?
‘하긴, 황제가 끝까지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었으니까.’
끝내 성격 급한 할아버지가 진 거고.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딱 걸맞은 황제였으나, 어쩌겠나.
그럼에도 그가 황제였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우위에 서시겠지.
‘난 힌트 줬으니까.’
대충 보아하니 베넷이 펠루아나 쪽을 확인하느라 정신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은행 쪽에서 수시로 상황 보고가 올라올 테니까.
‘이번에는 에시어가 이기겠지.’
어찌 되었든 남은 건 할아버지와 어른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코가 석 자입니다.
‘오네 가서 리안이 만나야 하는데.’
이능이 앞길을 가로막을 줄이야.
그냥 이능 없이, 재능만 보여 줘도 오네로 가는 건 별문제 없었을 거 같긴 하다만.
‘이능에 부작용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에휴.”
손을 보다 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몰아쉬며 문 앞에 다다라 문고리를 돌렸다.
‘일단은 내일 일부터 제대로 해결하고.’
남은 건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기씨!”
일찍이 준비해 리리아나로 떠나려는 나를 마차 앞에서 붙잡은 아리나가 주스를 내밀었다.
“포도주스요. 드시고 가세요.”
포도주스에 진심이네.
유리잔의 혼탁한 초록색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 드셔야 해요. 건강에 좋은 거예요.”
청포도주스를 건네는 아리나의 웃음에 대수롭지 않게 양손으로 받아 마셨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포도의 상큼한 단맛 뒤쪽으로 씁쓸한 맛이 올라왔다.
‘으.’
손등으로 입술의 남은 주스를 닦으며 잔을 내밀었다.
“다음부턴 나 안 마실래. 맛없어.”
“……예,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아리나에게 잔을 건네고 몸을 돌리자, 순간 눈앞이 핑 하고 도는 것만 같았다.
‘어?’
휘청하고 비틀거리다 끝내 쓰러질 것만 같아 숨을 훅 하고 들이마시자, 헤일이 급히 다가와 몸을 받쳐 주었다. 쓰러지지 않게끔, 몸을 세워 주는 그녀의 몸에 늘어질 것 같은 몸을 기댔다.
어쩐지 속도 살짝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먹은 걸 다 게워 낼 수 있을 것처럼 속이 뒤틀리는 것처럼 일렁였다.
“아기씨?”
“웅, 나 괜찮아.”
하지만 괜찮다는 말에도 나를 내려다보는 헤일의 굳은 표정이 나아지질 않았다.
이미 내가 피를 흘리고 쓰러졌던 걸 본 뒤라 더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이대로 모시고 나가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까지 하는 것만 같은 그녀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햇볕 때문에 살짝 눈이 부셔서 그래써.”
“하지만.”
“나 안 가문 리리 삐져. 가야 해.”
엷게 웃으며 아리나에게 대충 손인사를 하듯 흔들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오늘은 평소의 마부가 아니었다.
“웅.”
이를 확인하곤 헤일을 보자,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알겠다는 듯 마차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가따 오께.”
“네.”
“아리나는 휴가 잘 가따 와.”
“네, 모레 아침에 뵈어요.”
아리나의 인사에 손을 흔들고는 마차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괜스레 심장이 콩콩 뛰었다.
처음 백작가로 향했을 때보다 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