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34)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34)화(34/141)
“후우.”
어른의 이성으로 6살 난 리리아나와 장시간 놀아 주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놀아 주던 이시아의 기억 없이, 전생의 기억만 있었다면 아마도 진작 포기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오늘따라 유독 머리도 아프고, 속도 미식거려서 더 힘이 들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몸 상태도 좋고, 기분도 진짜 좋았는데.
‘정신도 맑고.’
근데 지금은 조금만 넋을 놓아도 순식간에 머릿속이 부옇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말이다.
‘너무 긴장을 했나.’
아무래도 다른 건 그거뿐이지.
몇 주간 준비했고 기다렸다 해도 어쨌든 내겐 커다란 일탈이니까.
반드시 해야 하는 일탈.
‘아예 내년에 나왔으면 좀 좋아.’
오네에 갔을 때 나왔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되었을 테니까.
물론 이것도 내가 이능을 다스려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여전히 성공 못 하고 있는 도형 그리기를 떠올리자 문득 시무룩해졌다.
손가락에 힘을 모으면 된다는데.
올가뿐만 아니라 가문 내 이능력자들도 다 같은 소리였다.
몸에 흐르는 이능을 느끼고, 손가락에 힘을 모아 집중을 해서 허공중에 휘두르라는데.
흐르는 이능을 어떻게 느끼고, 뭘 어떻게 힘을 모아서 휘두르냐구요.
전혀 감도 안 잡히고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속도 상하고, 괜히 또 의기소침해질 것 같은 그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푸르르 떨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하후, 힘두러.”
양팔과 다리를 늘어트리듯 앉아 마차에 머리를 기대자, 헤일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괜찮으시겠어요?”
“웅, 괜찮아.”
힘을 내 보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기운 없는 목소리에 헤일이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아기씨, 차라리 다음 주에 나오시는 게…….”
“안 돼.”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곧 여름이 끝을 드러낼 거다.
그렇게 되면 이 물건은 몇 년간 자취를 감추고 사라질 거다.
나는 물론이고, 황태자인 리안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꽁꽁.
‘그러니까.’
이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곧 사라져 버릴 거야.
그리고 어쩐지 그 마지막이 오늘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나를 싫어할 리안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물건.
‘여의치 않으면 나증에 리안이가 황태자가 되었을 때에 거래를 하기 위한 물건으로 남겨 두어도 되고.’
전생,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도 그 물건을 어렵게 구했던 귀족이 리안과 그런 식으로 거래를 했었으니까.
나라고 못 할 거 없지.
아무리 노력해도 오네에서 그와의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다면,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만한 방법이었다.
나와 아빠가 에시어에서 탈출하기 위한 구명보트로.
“오늘 가.”
“…….”
“어차피 이번 주도 힘들 거구, 다음 주도 힘들 구야.”
그러니 슬퍼하지 말자, 라는 말을 이시아 시절에 자주 했었지.
‘걱정 말아요, 오늘도 힘들고, 내일도 힘들 거예요.’라고.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그러니까 오늘 가.”
헤일을 올려다보자, 어깨를 늘어트린 그녀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마차의 앞쪽 벽을 톡톡 두드렸다.
어쩐지 속도가 조금 빨라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아기씨.”
“웅?”
커튼을 살짝 들추며 주변을 살피던 헤일이 나를 부르며, 마차에 난 작은 창을 가리켰다.
“저 뒤에요.”
오늘도 여전히 따라 붙은 검은 마차.
그 날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달라 보이기고 했고, 거리를 그 날보다 더 벌려 놓기는 했지만, 우리 마차를 쫓아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우리 따라오는 거지?”
“네, 백작가에서부터요.”
“혹시나 했눈데에”
역시나.
뒤쪽으로 보이는 마차의 은밀한 움직임에 헤일을 바라보았다.
“계획대루 해 줘.”
그 시선에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마부가 앉은 앞쪽 창을 열고 말했다.
“저희 집으로 가 주세요.”
* * *
“오네 쪽으로 마차를 틀었습니다.”
커튼을 젖힌 채, 앞쪽 상황을 전하던 검은 마차 안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할까요?”
흐릿한 빛조차 없어 표정을 확인하기가 어려워 미간을 좁히자, 반대쪽 커튼을 살짝 들춘 남자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마차의 옆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날처럼 앞에 서 버리면, 쫓아가기 곤란해지는데요.”
“…….”
첫날 백작가에서부터 뒤를 쫓았던 것을 들킨 뒤로는 더욱 조심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뒤따르는 걸 모르게 하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하필이면.’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뭘 하는지, 제대로 알아 와. 아무래도 수상해.’
오늘 마침 제대로 살피라는 명령을 받은 뒤였다.
‘귀찮게.’
요 몇 주 다른 곳으로 빠지는 일 없이 집에 잘 기어 들어가더만.
쥐콩만 한 게 무슨 개짓거리를 한다고.
‘돈이 웬수지.’
짜증스럽게 입술을 잘근 씹던 그가 커튼에서 손을 떼곤 고갯짓을 했다.
“따라가. 오늘은 특히나 뭔 짓거리를 하는지 제대로 알아 와야 하니. 틈 없이 쫓아.”
“그 날처럼 서 버리면.”
“앞쪽에 멈췄다가 따라가면 될 거 아니야.”
“아, 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 줘야 하느냐는 듯한 사나운 시선에 급히 고개를 숙인 사내가 마차 앞쪽 벽을 두드렸다.
“조용히 따라가.”
하지만 무슨 수작질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허름한 집 앞에 선 마차에서 내린 건, 레티시아의 하녀였다.
‘헤일이라고 했던가?’
길쭉한 몸을 반쯤 접어서 내린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바로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뭘 가질러 온 모양인데요?”
손에 든 걸 손으로 가리키는 수하의 말에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제 동생들이에요.”라는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손으로 동생들을 챙기는 헤일의 얼굴이 맞은편으로 보이고, 그 앞쪽으로 레티시아가 마차에서 내려와 고개를 들었다.
주륵 서 있는 아이들이 레티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들었고, 이내 몸집이 커다란 마부가 내려와 아이들을 살짝 가리듯 서서는 물건을 받아 드는 게 보였다.
그 모습들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사내가 커튼에서 손을 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많이도 낳았네.”
“그러게요 다복해 보이네요.”
귀족 영애를 처음 본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린 수하가 사내의 얼굴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
“너무 별게 없어서.”
수하의 말에 사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금 제가 6살짜리 귀족 꼬맹이 뒤를 졸졸졸 쫓으며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제법 잘 나가는 길드의 용병이었는데.
돈 때문에 하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괴감에 입술을 짓씹으며 발로 마차 맞은편 의자를 쿵 하고 걷어찼다.
“젠장.”
누가 들을까 싶게끔 큰 소리에 급히 커튼에서 손을 뗀 수하가 주변을 흘끗 보곤 사내를 돌아보았다.
“근데 대체 저 영애의 뭘 감시하라는 겁니까?”
내내 궁금했다는 듯 고개를 드는 수하의 물음에 사내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능력자라잖아.”
“이능력자면 좋은 거잖아요. 특히나 귀족이면 그게 최고일 텐데, 그게 왜요?”
평민다운 말에 사내가 말을 말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평민들한테는 인생 역전의 기회지만, 귀족님들은 사정이 다르시지.”
혀를 쩝 하고 찬 사내가 자세를 앞쪽으로 기울이며, 양쪽 무릎에 팔꿈치를 댔다.
“이 댁 큰 귀족 나으리가 사생아인데, 이능력자거든. 너 샤리에 에시어라고 들어 봤지? 황실 기사단장 때려치고 마수들 토벌 대장에 자원했던 귀족 나으리 말이야.”
“아, 알죠.”
“그분이 사생아인데, 그 딸이거든 저 영애가.”
“아아.”
슬쩍 커튼 너머를 보던 수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근데, 그런 대단한 분 딸이 또 이능력자면, 다른 본처 자식들이 어떻겠냐?”
“불안하겠죠?”
“그래서 이렇게 감시하는 거야. 후계자 자리 뺏길까 봐.”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수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대에 걸쳐서 이능력자가 나온 건 엄청난 일이니까.”
“그렇지.”
“에시어 가주님 머리가 복잡하시겠네요.”
“그럴 거다.”
흘끗 커튼을 들춰 보자, 그새 이야기를 마친 듯 레티시아가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또 다시 주루룩 서서 고개를 숙이는 아이들과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헤일의 옆얼굴을 보며, 마차를 두드렸다.
“저 안에 샤리에 에시어가 있었을까?”
“그러면 너무 속셈이 뻔하지 않을까요? 딸의 하녀 집에 숨어 있다가 만나는 건. 그리고 만났다고 하기엔 너무 시간도 짧고요.”
“그치?”
“근데 전 이렇게 몰래 만나는 것도 좀 이해가 안 가긴 해요.”
“나도, 그렇다.”
수하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귀족님들의 의심병을 어찌하겠냐.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럽고 불안해서 죽겠다는 얼굴이던데.”
사내가 지겹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마부가 마차를 가볍게 두드렸다.
“출발합니다.”
“그럼 따라가야지.”
보고할 게 없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서라도. 충실히 말이다.
그 말과 함께 다닥다닥- 이제는 숨길 생각조차 없이 바짝 붙은 마차가 앞선 마차를 따라 빠르게 밤거리를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