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36)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36)화(36/141)
그 난리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주위를 살피는 엘린을 코벳이 끌고 나가고서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발소리도 나질 않을 만큼의 고요에 눈만 빼꼼 내놓은 채 주변을 살펴보다 이불을 내렸다.
“갔니?”
“네.”
“아주?”
“예, 그런 거 같아요.”
다시금 확인을 하는 끄덕임에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이불 아래쪽으로 벗어 놓은 옷이 발끝에 닿았다.
“다행이다.”
진짜 까딱했으면 엘린이 들어와 빈 침대를 볼 뻔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헤일은요?”
“드레스 룸에…….”
“아하.”
헤일과 똑같은 얼굴로 제 쌍둥이 언니인 헤일을 찾는 펠을 향해 손으로 드레스 룸을 가리키자 마침 그 방 안에서 헤일과 작은 아이가 걸어 나왔다.
헤일과 펠의 막냇동생. 올해 6살이라던 안나였다.
“아기씨, 나 이 옷 가져도 돼요?”
내 옷 입고, 나와 비슷한 머리 스타일로 꾸민 아이의 방싯 웃는 얼굴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가! 다 가져!”
“와아아아!”
“아기씨, 그러면 안나 버릇 나빠져요.”
“괜찮아 안나 버릇은 이미 충분히 나빠.”
헤일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는 안나의 말에 엷게 웃었다.
“그래두 대. 안나 고생해쓰니까.”
“것 봐!”
헤일에게 혀를 날름 내민 안나가 도로 드레스 룸으로 뛰어 들어갔고, 헤일이 펠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런 헤일의 모습에 왈칵 울음이 터진 펠이 “언니이.” 하며 헤일의 품에 안겼다.
“울 언니 고생하는구나. 흐엉.”
느닷없이 웃다 안겨 우는 펠을 보며 잠시 굳어졌던 헤일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 어쩐지 훈훈한 모습에 베개맡에 손을 넣었다.
아빠의 단검. 웨르시펠.
물론 지금은 날도 서 있지 않고, 칼자루도 허름하니 딱 보아도 손이 안 가게 생겼다만 이게 이능력자의 손에 들어가면 장검으로 변해 명검으로 둔갑을 했다.
물론 내 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다.
‘이러니 내가 나를 의심하지.’
어깨를 늘어트리며 검집을 살짝 빼내어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근데 아빠의 물건이 왜 경매장을 떠돌게 된 거지?’
아빠가 돈이 필요해서 이걸 내놨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기에 이 단검의 낙찰가는 너무 형편없었으니까.
금화 1개.
금화에 용돈까지 닥닥 긁어 나간 것 치고는 초라한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들고 나갔으니, 샀지.’
손가락에 미처 지우지 못한 핏자국을 보며, 어깨를 툭 늘어 트렸다.
‘나 거지 아니야. 갖고 꺼져.’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도 리안과의 사이는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어쩌면 더 최악일 수도.
“하아.”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불과 몇 시간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 * *
저택으로 돌아오기 5시간 전.
멀어지는 마차 소리를 들으며, 까치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갔어?”
“예, 갔어요.”
아예 뒤꽁무니도 보이질 않게 되고서야 몸을 돌린 펠이 내 앞에 섰다.
헤일이 쌍둥이일 줄이야.
처음 그녀의 계획을 들었을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오네의 저희 집에 들러서, 아가씨 대신 제 6살짜리 여동생이 저택에 들어오는 걸로 해요. 마침 제 여동생의 머리색이 아주 밝은 갈색이라 저녁에 언뜻 보아서는 구분이 안 갈 거예요.’
‘그럼 나는?’
‘제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경매장으로 가세요.’
그러고는 일을 다 보고 헤일이 항상 들어오는 동쪽 별관 쪽문으로 펠과 함께 들어오면 된다고.
‘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들어오는 건 쉬울 거예요.’
이렇게까지 닮은 얼굴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특히나 한밤중이니, 조금 다르다 해도 구분하기 어려울 테고 헤일이 가끔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안나를 데리고, 저택에 같이 온 적도 몇 번 있어서. 더욱 속여 들어오기는 쉬울 거라고 했다.
‘근데 진짜 똑같이 생겼네.’
물론 생김새는 똑같아도, 풍기는 분위기는 조금 달랐지만.
헤일이 조금 여성스러운 분위기라면, 펠은 조금 더 단단하고 남성답다고 해야 할까?
헤일의 얼굴을 해서는 다정다감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펠의 무뚝뚝한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들자, 펠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었다.
“언니한테 이야기는 다 들었습니다. 펠이에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여, 영애 아니 아기씨.”
무뚝뚝하게 건네는 말에 생긋 웃었다.
“레티시아야. 레샤라고 불러.”
“언니가 깍듯이 아기씨라고 부르라고 시켜서요.”
헤일도 참.
“헤일은 우리 집 사용인이라 그런 거구, 펠은 아니잖아.”
“그래도 언니가 아기씨라고 부르라고 했으니, 그냥 아기씨로 부르겠습니다.”
상명하복의 관계인가.
내 말보다 우위에 있는 헤일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듯한 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래,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해.”
“예. 듀가네 경매장에 가셔야 한다구요.”
“응.”
왜, 냐는 시선조차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펠이 나를 보고는 서랍장에서 옷을 하나 꺼냈다.
“언니가 이거 입으시라고.”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평민 아이의 옷감치고는 좋아 보이는 옷으로 지은 원피스였다.
아무래도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움직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긴 하지.
해서 옷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펠이 다급히 곁으로 다가와 손을 어쩔 줄 모르고 허공중에 어색하게 띄웠다.
헤일에게 옷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데, 뭘 어떻게 시중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난감해 보이는 표정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레샤 혼자 잘 입고 벗을 수 있어.”
그러곤 정말 수월하게 옷을 벗고는 헤일이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고는 착착 발을 한 번씩 구르곤 고개를 들었다.
“갈까?”
“예, 예.”
그 깔끔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펠이 케이프의 모자를 깊게 씌워 주고는 뒤쪽으로 난 쪽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있을까 싶어 조심하는 듯했다.
‘이것도 헤일이 알려 줬나 부다.’
어쩐지 귀여운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펠이 안내하는 대로 집에서 나왔다.
밤이라 그런지, 어쩐지 스산한 기운이 도는 바깥 공기에 어깨를 살짝 움츠리자, 그 기척에 펠이 고개를 돌렸다.
“추우…….”
“야, 치워 주세요. 해 보라니까?”
춥냐고 물으려는 펠의 목소리를 덮어 버리는 욕설에 펠뿐만 아니라 내 고개도 함께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그러자 골목도 아닌 길 한복판에서 잘 차려입은 남자들이 가면을 쓴 채 마르고 작은 아이들의 손등을 밟아 짓이기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얻어맞은 건지 엉망이 된 아이 주변으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뭘 움켜쥔 건지, 귀족들의 말에도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어휴, 쓰레기 같은 귀족 놈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펠이 이내, 내 눈치를 흘끗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귀족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입단속을 하는 듯했는데-
“귀족이야? 진짜 나쁜 사람들이네, 왜 아이를 괴롭혀?”
6살의 나이에 걸맞게 나도 같이 욕을 해 줬다.
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순화된 언어였지만, 내 말에 안도한 듯 펠이 손가락으로 귀족들을 가리켰다.
“오네에서 유명해요. 한 명은 자작가라고 하고, 두 명은 남작가라고 하는데, 주기적으로 여기 와서 저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평민 아이 하나 잡아다 때리고 괴롭히고. 돈 몇 푼 쥐어 주면서 동화 1개당 한 대씩 때리겠다고 하기도 하고요.”
“미친놈들이네!”
6살의 순화된 언어는 어느새 날아가 버린 내 어른의 욕설에 펠이 쿡 하고 웃었다.
“그러니까요. 그래도 얼굴은 드러나면 안 되는지 가면 쓰고 저러더라구요.”
“얼른 경찰한테 신고하쟈. 방위대 있쟈나. 저런 놈들은 가서 후두려 맞아야…….”
“소용없어요.”
“왜?”
“고작해야 평민 어린애잖아요. 죽인 것도 아니고, 몇 대 때린 게 고작인걸요.”
“머?”
“괜히 신고하면 찾아가서 더 때릴 거예요. 아니면 신고한 사람을 찾아가서 괴롭히든가.”
“…….”
“아기씨는 신고하셔도 에시어니까 괴롭히지 못하긴 하겠네요.”
펠이 서글프다는 듯 쓰게 웃으며 툭 숨을 내쉬었다.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하는 모습이 못내 마음이 아픈 듯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펠뿐만이 아니었다.
흘끗흘끗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있지만 아무도 나서질 못하는 듯했다.
“야, 손 펴. 너 뼈 부러진다?”
퍽퍽 등을 밟는 소리가 조용한 거리를 울렸다.
하지만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아이는 손을 구부린 채였다.
정말, 저러다 손가락 부러지겠는데.
아무래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몸을 돌리자-
“아기씨.”
그런 나를 만류한 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얼굴이라도 보이면.”
“…….”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지금 몰래 나온 상황이었으니까.
괜히 끼어들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나뿐만 아니라, 제 언니가 곤란해진다는 표정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에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구둣발 아래 꽉 쥔 손을 풀지 않는 아이의 고집에 입술을 깨문 그때-
“아유, 리안아. 잘못했다고 해. 응? 얘.”
순간 들린 이름에 눈가를 찌푸렸다.
‘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