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4)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화(4/141)
8살, 챈들러. 7살, 제이슨. 6살, 리리아나.
모두 아빠의 이복형제들 자식이었다.
챈들러는 둘째 숙부의 둘째 아들이었고, 제이슨은 셋째 숙부의 삼남, 그리고 리리아나는 미쉘 고모의 막내딸이었다.
모두 직계 수업을 함께 듣는 사이였다.
나만 빼고.
물론 할아버지의 가택 연금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나도 저 수업을 함께 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황제의 명령으로 영지로 내려가신 뒤 슬금슬금 실비아와 가문의 선생들이 나를 수업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레티시아 님께서는 직계 3세들과 수업을 들을 수준이 되질 않으십니다.’
‘개인 교습을 하고 오심이 어떨지요.’
라는 매우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서 말이다.
그리고 가문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둘째 숙모도 그렇게 나를 다독였다.
‘느린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혼자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거야. 우리 레샤는 착하고 똑똑하니까 다 이해할 수 있지? 숙모는 항상 우리 레샤 편이란다.’
본채에서도 한참 떨어진 별채까지 찾아와 나를 다독여 주던 둘째 숙모의 다정했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당시에는 이 말들이 전부 다 진짜인 줄 알았지 모야.
바보처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쫓아내지만 말아 달라고 울던 나를 매정, 아니 더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둘째 숙모의 경멸 어린 표정을 떠올리자 입 안이 썼다.
‘아무도,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여기서는 오롯이 나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야 아빠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을 테니까.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을 꽉 말아 쥐자 내 뒤에 선 선생들의 비웃음 섞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모양인데요?”
“그러게 힘들다고 할 것이지.”
“이번에 가주님 눈밖에 나면 끝 아니겠어요? 그러니 제 딴엔 오기를 부린 모양인데.”
“쯧쯧, 그게 객기라는 것도 모르고.”
“객기라는 말은 알까 모르겠어요?”
“당연히 모르겠죠.”
자기들끼리 킬킬 거리며 입을 가리는 선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국어 일리스, 수학 폴.’
그리고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는 이 사태의 주범 예법 선생 실비아까지.
그 세 사람을 차례로 훑으며 눈을 맞추자 방금 전까지 시시덕거리던 일리스와 폴이 금세 입을 다물고는 손을 앞으로 모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다.
‘저 사람들은 내가 꼭 기억해야지.’
기억해서 뭐 할 거냐고?
당연히 응징할 거다.
이전 생에서는 너무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었던 게 억울해서라도 이번에는 그냥 앉아서 당하고 있지는 않을 작정이니까.
주는 만큼, 돌려줄 거다.
그게 누구든.
“오셨습니다.”
하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챈들러와 제이슨이 볼멘 얼굴로 들어오다 이내 자리에 멈춰 섰다.
방 안에 할아버지와 선생들만 있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의 부관과 가신 몇몇까지 방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을 본 탓이었다. 살짝 숙인 고개 아래로 잇새를 깨문 챈들러가 금방이라도 한 대 때릴 듯한 기세로 저를 노려 보았다.
아마 보는 눈이 없었다면 당연히 그러고도 남았을 놈이다.
‘넌 여전하구나.’
그 형형한 눈빛을 빤히 보다 고개를 돌리자, 베넷이 마고를 향해 말을 이었다.
“리리아나 아가씨께서는 백작가에 계셔서 오시지 못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포틀런가에 따라갈걸.”이라고 퉁퉁거리는 제이슨의 볼멘 목소리와 달리 챈들러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 오셨어요?”
눈가를 살짝 접으며 웃는 챈들러의 눈동자는 저를 노려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표정이었다.
‘대단하네.’
이전 생에서 직계 3세들 중에서 챈들러만 유일하게 오네로 갔다 1년도 되질 않아 가문으로 돌아왔음에도 내쳐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살갑게 구니, 할아버지도 귀여운 손자의 재롱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가셨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래, 선생 시작하지.
살가운 인사를 무 자르듯 차갑게 쳐낸 마고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챈들러의 표정은 그대로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영악해 보인다 하나, 역시 어린아이의 한계였다.
‘표정을 숨기질 못하는구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할아버지를 빤히 보던 챈들러가 문득 저를 향하는 시선을 느낀 듯 나를 홱 하니 돌아보았다.
붉어진 얼굴과 일그러진 표정 위로 어금니를 짓씹은 그의 눈동자가 잔뜩 화가 난 듯 보였다.
‘넌 오늘 죽었어.’
소리 없이 저를 향해 입만 벙긋거리는 챈들러의 얼굴을 빤히 보며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올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태연히 올리는 그 손가락에 챈들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너!”
“응? 오빠 나?”
소리를 빽 지르지 못하게끔 웃으며 눈을 깜박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집중되었다.
할아버지까지도.
소란에 시선을 두자, 얼굴이 붉어진 챈들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중에 보자.”
나중에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더라.
“응!”
난 알 바 아니라 듯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전 같았으면 문제가 있었겠으나, 지금은 무슨 상관이겠는가.
‘도망가면 그뿐이고, 도망 못 가면.’
한 대 맞지 뭐.
오히려 한 대 맞는 편이 더 나으려나? 하는 해괴망측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양옆으로 쪽 찢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실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도구를 쥔 손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서 시험 문제가 적힌 글자들이 둥둥 떠올랐다.
“제국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자 챈들러 도련님?”
챈들러가 역시 직계는 직계였던 모양이다.
언제나 어린 나를 괴롭히던 모습이나 다 커서는 술과 여자, 도박에 취해 있던 망나니 같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제법 그럴듯하게 제국어를 읽어 내는 걸 보니,
‘쟤도 어릴 때는 공부를 하긴 했던 모양이네.’
근데 왜 커서는 그 모양 그 꼴이었나.
작게 혀를 차는 사이, 뒤쪽에서 선생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역시, 직계 도련님이시네요.”
“장남이신 알레프 님 못지 않으신데요?”
“중간에 단어 몇 개가 틀리긴 했지만 저 나이대를 생각하면 훌륭하신 거죠.”
뒤쪽에서 언뜻 들리는 칭찬에 어깨를 으쓱하며 허리를 곧게 핀 챈들러가 칭찬을 바라듯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마고에겐 너무나도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의 수준이었다.
돈을 그렇게 들여 가르쳤으면 당연히 저 정도는 해야 한다는 듯 냉정했다.
‘당연하지.’
그에게는 천재라 불리는 아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자신도 천재였고.
하지만 그런 마고의 무관심한 표정을 읽어 내지 못한 실비아가 챈들러를 치하하며 가볍게 박수를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주 훌륭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챈들러 역시 할아버지의 그런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듯 두 겹으로 접히는 퉁퉁한 턱을 살짝 우쭐대듯 올렸다 내렸다.
그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던 실비아가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말고, 흠칫 놀라 숨을 삼켰다.
하지만 애써 그 표정을 갈무리하듯 입꼬리를 당겨 웃은 실비아가 아주 상냥하게 제이슨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제이슨 도련님.”
챈들러가 직계의 품격을 높여 놓았으니, 제이슨도 그와 비슷하게는 보여야 했다.
무려 가주님 앞이 아닌가.
해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제를 마도구 위에 띄웠다.
“수식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은행업과 무역업을 기반으로 이 위치에 오른 에시어에서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무렵부터 배우는 것이 숫자였고, 수식이었다.
직계, 아니 직계와 방계 가릴 것 없이 에시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해내야만 하는 거였다.
해서 제법 어려운 문제가 나오겠거니 싶었는데.
더하기 3.
“…….”
흠.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하찮지 않은가.
“아, 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제이슨에겐 눈앞의 간단한 덧셈조차 어렵다는 거였다.
실비아 입장에선 쉬운 문제라고 생각했을 텐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눈치를 흘끗 본 제이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을 말았다 풀며 모아 잡고 있던 손가락 열 개를 펼쳐서 꼬물대는 것을 보니 계산을 할 줄 모르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가신들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슨 도련님은.”
“그러니까요.”
그 수근거림에 딩황한 실비아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흠흠, 도련님 자아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곤 제이슨과 맞춘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그에게만 보이게끔 왼쪽 손가락 하나와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가 금세 말아 쥐었다.
그 사인에 제이슨의 눈이 반짝 빛을 내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삼일, 아니 31이요!”
“아.”
“이런.”
조용한 탄식이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그 짧은 탄식에 흘끗 마고를 돌아보던 실비아가 시선 끝에 걸리는 내 모습에 다급히 몸을 돌렸다.
“레티시아 아가씨께서도 맞혀 보시죠.”
뻔히 제이슨의 실수를 내 것으로 덮으려는 수작질이었다.
‘뭐 나야 고맙지.’
“십삼이요.”
“어머.”
뒤쪽에서 작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 모두가 당연히 맞추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해한다.
그들에게 나는 바보였으니까.
바보가 답을 맞혔으니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하지만 앞쪽 상황을 모르는 감탄과 달리, 이미 제이슨에게 답을 알려 주었던 실비아는 당연히 내가 답을 보고 말을 했다고 생각한 듯했다.
“허면 아가씨 이 문제도 풀어 볼까요?”
어떻게든 나를 제 발밑으로 끌어내려 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한 실비아가 띄워 놓은 건.
더하기 2.
아유 진짜 하찮네.
“십일이요.”
“잘하시네요.”
저 정도야 껌이지.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 미분에 적분까지 가능하다고.
이래 봬도 한국인으로 있을 때 공부를 제법 했었다.
‘혹시 에스대라고 들어 봤나요?’
어려서부터 고아인 제가 제대로 살 방법은 오직 공부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게 더하기라니.
너무 하찮고 하찮아서 기가 찬 문제에 실비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 태연함과는 달리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내가 정답을 말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음 문제를 띄웠다.
“자, 다음 문제입니다.”
곱하기 3.
곱하기라.
6살 난 아이에게 내기에는 너무 옹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그녀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싶었다.
해서 나도 내 사정대로 입을 열었다.
“삼십이요.”
“세상에.”
그리고 또 이어진 정답과 뒤쪽 선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감탄에 고개를 든 실비아의 눈에 불이 튀었다.
혹시 누가 답을 알려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미친 생각마저 든 실비아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정답을 알려 줄 만한 사람이 내 시야에 걸려 있질 않았다.
그걸 확인한 건지 입술을 말아 문 실비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추듯 손바닥 위에 올려 둔 마도구를 움켜쥐었다.
“자, 잘하셨습니다.”
“감샵니다!”
하지만 내 시험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 그럼 레티시아 아가씨. 이제 고대어를 읽어 볼까요?”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고대어 꼬부랑글자들을 띄운 실비아의 의기양양한 표정에 나도 의기양양하게 대답해 주었다.
“호끄 꿰에께 뜨란시비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