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45)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45)화(45/141)
“……네?”
순간 놀라 홱 몸을 돌리는 아리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적포도주스라고 했잖아. 그새 색이 사라진 거야?”
적색의 포도주스는 색이 다 날아간 것처럼 희끄무리하게 변해 있었다.
‘책에서도 보면 이것 때문에 많이들 들켰지.’
어두운 색 주스에 타고 시간이 지나면 색이 맑아지고, 맑은 색 주스에 타면 반대로 색이 검어졌다.
그걸 고치려고 판매자들이 애를 썼는데 나중에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잘 팔려서 그랬던지 그냥, 타자마자 먹여야 한다는 주의문만 대충 붙여서 팔았다.
근데 지금은 너무 초기라 그런 주의 사항에 대해서는 나온 게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랬으니까 아까워서 못 버린 거겠지.
만약에 이렇게 흔적이 남을 줄 알았다면 아리나 성격상 당장에 쏟아 버렸을 테니까.
아무튼 내게는 좋은 빌미가 되어 준 아리나의 행동에 고개를 들었다.
“웅? 색이 이상해졌어.”
“그, 그게.”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아리나가 다시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른 핑곗거리를 생각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했더니만-
“이게 왜.”
말라붙은 입술을 뗀 아리나가 손을 모아 잡았다.
이젠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베넷이나 하녀장을 부르면 되려나? 싶어 유주아를 올려다보자, 그런 내 어깨 너머에 서 있던 린지를 발견한 아리나가 고개를 홱 하니 올려 들었다.
“린지!”
‘린지?’
린지는 또 어떻게 엮을라고 그러는 건가, 싶어 이제는 그녀의 반응이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린지가 여기서 왜 나와?”
“이 주스, 린지가 준 거예요. 아기씨, 전 그냥 받아만 왔…….”
“세상에 아리나?”
아리나의 항변에 린지가 입을 벌린 채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맞잖아. 이거 네가 아기씨 드리라고 준 거잖아. 이거 왜 이러는 건데? 너 설마 주스에 뭘 탄 거야? 그걸 나한테 들려 보냈던 거야?”
“하.”
속사포로 쏟아 내는 아리나의 목소리에 린지가 기가 막히다는 듯 가슴을 팡팡 때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 그녀가 입을 벌린 채 아리나를 빤히 보았다.
“내가? 내가 아기씨 드실 음식에 뭘 했다고?”
“그게 아니라면 이게 왜 이래? 이, 이 주스. 네가 아기씨께 가져다 드리라고 한 거잖아.”
“아리나! 이거 네가 시켰잖아.”
“린지! 어쩜 뻔뻔하게도 거짓말을.”
린지의 말에 아리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전 그냥 린지가 주는 대로 가지고 올라온 거예요. 아기씨. 정말이에요!”
믿어 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하던 아리나가 두 손을 모았다.
“진짜예요.”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와 헝클어진 머리, 벌벌 떨리는 손을 간신히 모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온몸으로 불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자꾸만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일 테지.
그거 나도 안다.
전생에 아리나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을 때에 딱 이랬었으니까.
‘세상에 레티시아 아가씨, 어떻게 이런 일까지. 벨리아 님께서 아가씨께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요!’
과장된 연극 톤으로 소리를 높이던 아리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기괴하게 웃으며 제발 저를 믿어 달라는 듯한 아리나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기씨, 저, 저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아기씨께 이상한 걸 먹일 생각을 하겠어요. 이건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린지가 썩은 걸, 예 썩은 모양이에요. 제가 얼른 가져다 버리…….”
“!”
조급함을 느꼈던지 유리잔을 향해 손을 뻗는 아리나보다 그 곁의 헤일이 더 빠르게 움직었다.
아리나가 집어 들기 전에 유리잔을 낚아채듯 잡은 그녀를 올려다보는 아리나의 시선이 순간 사납게 일그러졌다.
“너! 네가 그랬지! 네가!”
이젠 또다시 헤일을 잡아채려 아리나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리나 너 설마.”
뭔가 떠올랐다는 듯 나를 보던 린지가 이내 아리나를 돌아보았다.
“이거 설마 기드모, 그 사기꾼한테 산 그거야?”
“내가 무, 뭘 사!”
정곡을 찔린 건지, 린지의 물음에 말을 더듬는 아리나를 향해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이거 설마 아기씨께 드렸어?”
“난 몰라.”
“아리나!”
“레티시아에게 뭘 줬다는 게냐.”
그리고 그 순간, 지팡이를 바닥에 쾅 하고 찍은 할아버지가 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자였고, 누군가에겐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할아버지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문 쪽을 향했다만 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간 또 울어 버릴 것 같아서.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 안 좋아해.’
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자꾸만 코끝이 시큰거리고, 명치 끝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할부지가 왔어.’
울음을 참느라 꾹 말아 문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갈 것 같았다.
내 편.
할부지는 내 편.
눈가엔 울음을 가득 매단 채, 미소를 참는 게 기괴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실은 울음을 크게 터트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올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긴 했다.
할아버지는 3층, 나는 2층.
뒷동도 아니고 같은 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할아버지가 모르실 리 없었으니까.
아니, 할아버지는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
하지만 린지가 이 약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라는 건 내 예상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앞에서 그걸 다 폭로하는 것도.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약이라고.”
“예, 가주님. 그 사기꾼이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
“어린아이에게 쓰면 안 된다는 것도.”
“예, 분명 사기꾼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눈앞에 놓인 희끄무레죽죽한 포도주스와 그 옆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빤히 보았다.
린지가 사람들을 직접 데리고 아리나의 방에 들어가서 찾아온 작은 병 속엔 푸른색 액체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과 포도주스를 번갈아 보던 할아버지가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이능력자, 라울을 향해 손짓했다.
“감별해.”
“가, 가가가주님!”
고개를 숙였다 드는 라울의 뒤에서 아리나가 무릎으로 기어 나왔다.
라울의 손짓 한 번이면 저기에 뭐가 들었는지 단번에 들킬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아리나가 양손을 올려 비볐다.
“요,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잠시 돌았던 모양입니다. 아, 아기씨께서 자꾸 저를 홀대하시, 아 아니 제게 곁을 안 주셔서 제가 미쳤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조차 내 탓을 하고 있다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한 아리나의 모습에 헤일의 옷자락을 잡자, 아리나의 시선이 뒤늦게 나를 향했다.
“아, 아기씨.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가장 오래 아기씨를 모셨잖아요. 아기씨 첫걸음마도 저랑 같이 하질 않았습니까. 제, 제가…….”
“그랬는데 왜 그랬어?”
“……네?”
차가운 내 목소리에 놀랐던지 아리나가 입을 벌린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바라보았다. 언젠가부터 나와 시선을 맞추기보다는 위에서 내려다보길 더 즐겨 했던 아리나였던지라, 내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처음 보는 듯했다.
어떤 경멸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아리나 말대루, 레샤 아기 때부터 옆에 있었는데 왜 나를 아프게 하려 했어?”
“아, 아기씨 그게…….”
“아이는 저거 먹으면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 봐요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요. 제법 오래 드셨는데 아무 효과도……!”
순간 말을 깨물어 삼키듯 아리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하고 안 하고와 상관없이, 그녀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할아버지의 진노가 어디까지 미치게 될 것인가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질 뿐.
“아, 아기씨.”
“난 아리나가 나를 싫어해서 슬펐어.”
“아기씨,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아기씨를…….”
“근데 지금은 아니야. 나도 아리나 싫어.”
손을 뻗어 나를 안으려는 아리나의 손을 뿌리치곤 헤일의 다리에 매달리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 다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의 푸른색 눈동자가 화를 참으려는 듯 짙어지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 화내시면 안 되는데.’
아니, 차라리 화를 내고, 참으시면 안 되는 건가.
뭐가 더 나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그 심상찮아 보이는 진노에 고개를 들자-
“가주님.”
때마침 라울이 포도주스에서 그 액체를 추출해 옆의 유리잔에 따로 담았다.
린지가 찾아내 가지고 왔던 그 작은 병 속에 담긴 것과 똑 닮은 푸른색이 살아 있는 듯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었다.
“마법석 아펙티오를 가공해서 만든 마력액인 거 같습니다.”
라울의 설명에 액체를 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이걸 먹…….”
“해가 되는 것이냐.”
이걸 먹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 상관없다는 듯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이걸 먹은 내 새끼 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느냐고 묻는 게다.”
“아, 네.”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하녀의 말대로 장기간 드신 거라면 당장에 해독을 하셔야 할지도…….”
“베넷.”
“예, 가주님.”
“치료사들 다 불러들이고, 저건 내 눈앞에서 영영 치워 버려.”
영영 치워 버리라는 명령.
“예, 알겠습니다.”
“가주님, 사, 살려 주십시오. 가주님!”
모두 다 아는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