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58)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58)화(58/141)
“아무래도 이번 주가 고비일 듯합니다.”
“…….”
“아기씨 말씀대로 갔을 때부터 상태가 너무 좋지가 않아서 제가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작 해 봐야 호흡이나 통증을 조금 덜어 줄 수 있게끔 약을 처방해 주는 것밖에는.”
폴이 괴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피했다.
아마도 리안의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폴에게 충분히 고마워했을 테지만, 그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다. 살리지 못했으니까.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보았더라도.”
“…….”
폴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는 상대의 상황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할 때에 가장 고통스러워했다.
전생에서도 그랬기에 공작가를 떠나, 빈민촌으로 불리던 디아브리아 지역에서 봉사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았던 거겠지.
그런 성품이 달리 어딜 갔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미안해, 폴.”
그렇기에 이건 전적으로 내 실수였다.
폴의 성품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도 그걸 까맣게 잊고는 리안만을 생각했던 내 이기적인 실수.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하구. 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어. 미안해.”
하지만 그런 내 사과에 되레 당황한 것은 폴이었다.
“무…….”
당황에 말을 도로 삼킨 채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건 아기씨께서 사과하실 게. 오히려 제 문제죠.”
그의 말에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이 사람은 여전히 착하구나.
전생에서도 할아버지를 살리지 못해 괴로워했고, 어쩌면 그랬기에 나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 일어나셨습니까? 다행입니다. 다행.’
전생에 마차 사고를 당했다가 깨어났던 그 순간 나를 보던 폴의 표정을 난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어지던 잔소리까지.
‘죽을 작정이셨습니까?’
그 당시 나를 살게 했던 건 어찌 됐든 폴이었다.
“폴은 착한 사람이야.”
“……예?”
앞뒤 맥락 없는 내 말에 당황한 그가 이내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무슨.”
“왜? 폴 착한 사람이라는 말 처음 들어 봐써? 희한하네. 폴 엄청 착한데. 그럼 이제부터 내가 자주 해 줄게. 착한 사람 폴.”
내 말에 피식 웃던 그가, 이내 “아.” 소리를 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떠오른 듯 그가 보며, 품 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들었다.
“안젤라, 그 아이의 엄마가 편지를 부쳐 달라 부탁하더군요.”
“…….”
“리안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요.”
써 놓은 지 오래된 것인지, 손때가 잔뜩 묻은 편지 봉투는 해진 곳이 군데군데 보일 정도였다.
그저 그런 싸구려 봉투에 담긴 것처럼, 그 안의 내용물도 별거 없겠구나, 하고 오해할 법하게끔 하찮아 보였다.
하지만 난 저 허름한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리안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니까.
아이가 황제의 핏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핏자국과 머리카락, 그리고 황제가 리안의 엄마인 안젤라에게 주었던 자그마한 증표까지.
그 모든 것이 아주 단단히 봉해진 저 봉투 안에 담겨 있을 거였다.
하지만 봉투가 너무 허름했다.
왜 궁내부 대신에게 올라가야 할 편지가 행정부의 민원실을 돌다, 궁내부 장관의 서랍에 그대로 처박혔는지 알 것 같은 외형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법한 그 봉투를 빤히 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냥 보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수신인이 궁내부 장관 앞으로 되어 있어서요.”
폴의 조심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에시어의 사람이었고, 에시어와 황가의 사이가 어떻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리안을 그리고 리안의 엄마의 병증까지 알고 있던 내게 묻고 싶었던 거겠지.
내가 아무리 6살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전생에서도 이렇게 전해졌을까?’
소설에서는 아주 짤막하게 황제께 보낸 편지가 늦게 도착했다고만 되어 있었으니까.
이런 내막까지는 세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폴이 저 상태 저대로 우체국으로 가 우표를 붙이고, 우체부가 궁내부 쪽으로 편지를 배달하면.
‘리안은 3년 뒤에나 황제의 부름을 받을 거야.’
소설과 전생의 내용처럼.
그리고 그 사이에 굉장히 많이 어려운 삶을 살아야만 할 거다.
주인공 서사가 있어야 하니까.
‘나도 만나야 하고.’
하지만 지금 내가 저 편지를 받아다 베넷에게 줘서 행정부나 궁내부의 우리 쪽 사람에게 전하든가, 아니면 아마 내일도 저택에 방문할 궁내부 장관인 스벤 백작에게 전해 주면 리안은 내일 당장에 황제의 부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마 안젤라도 조금 더 좋은 치료를 받다 하늘나라로 갈 수도 있겠지. 어쩌면 리안의 곁에 조금 더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설의 서사가 엉망이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나도 그를 만날 수 없겠지.
‘내 동아줄.’
겉으로는 선한 척, 가증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다 해도 나는 뼛속까지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 행복을 위해서 남의 행복을 짓밟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소설의 서사를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
내 미래를 염려하는 거지.
그 모든 서사를 극복하고, 소설의 내용대로 흘러가 황제가 된 그가 나를, 내 가문을 모두 몰살시킬까 봐.
그래서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이 짓밟힐까 봐.
그걸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이기적이게도.
못되게도.
나쁘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염연히 리안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래, 나 나쁜 년이야.’
“리안이 엄마 말대로 편지 부쳐 줘.”
그를 생각하는 척, 오만 착한 척은 다 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이게 굴 수 있는 그런 나쁜 사람이었다.
“아기씨? 근데 왜…….”
순간 나도 모르게 뺨을 타고 주룩 흐르는 눈물이 턱 끝에 맺혀 있다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 모습에 놀란 폴이 나를 부르며, 가깝게 다가섰다.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의 인생을 내 맘대로 움직이려 하는 게 미안해서.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그 어떤 말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 * *
‘리안네 엄마 돌아가실 거 같으면, 바로 연락해 줘.’
심각한 사연이라도 있는 아이처럼,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레티시아의 모습에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서러운 감정이 얽힌 건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편지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지.
괜히 편지를 들고 갔나, 싶은 생각에 길게 한숨을 몰아쉰 폴이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셨어요?”
바닥 청소를 하던 쟈이든이 폴의 모습에 빗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 모습에 폴이 관자놀이를 긁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청소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 역시 여기서 계속 지내야 한다면, 객식구로 지낼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청소라도 하는 거다?”
“예.”
정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 녀석이었다.
우직하다고 해야 할지.
몸이 거의 다 나아 갈 때부터 의원의 크고 작은 잡일들을 도맡아 하며 종종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솔직히 보기에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난 널 노예로 취직시킨 게 아니야. 그리고 널 산 사람 역시, 널 그렇게 대우하지도 않겠다고 했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그러고 있는 건데.”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입니다.”
“…….”
담담한 말에 폴이 미간을 문질렀다.
“다른 걸 할 줄 알면 좋은데, 할 줄 아는 게 노예들이나 할 법한 것들뿐입니다.”
“하아.”
“다른 걸 시키신다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이런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
“제가 마음 하나 편하자고, 의원님을 불편하게 해 드리는 건 죄송합니다.”
쟈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녀석, 말하는 거 하고는.
정말 사람 불편하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또 미워할 수는 없었다.
며칠 간 지켜본 결과 그는 정말로 제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으니까.
아픈 몸을 이끌고 청소라도 해야 할 정도로.
‘폴이 착한 사람이어서 그래. 착한 사람 폴.’
‘착한 건 제가 아니라, 이런 애죠.’
레티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몰아쉰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은 주말이었으니.
“심부름 하나만 하고 와. 그럼.”
“예.”
저 아이 스스로 가치가 있는 일을 하도록 찾아 주는 게 우선일 듯했다.
저런 허드렛일 말고.
‘베넷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하지만 일단 더 늦기 전에 우체국 심부름부터 시키고 봐야겠다 싶은 그가 품 안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
“이 편지, 우체국에 가 부치고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