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69)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69)화(69/141)
아니면 아빠 때문인가?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집 때문은 아니었을 거다.
이시아 때부터 혼자 살았던 그 시간 내내 집을 아무리 옮겨 다녀도 난 잠을 잘 못 잤었으니까. 어딜 가나 선잠을 잤고, 깊은 잠들지 못해 온몸에 피곤을 달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근데 여기서는 꿈도 꾸지 않고 아주 깊이 잘 자고 일어난 걸 보면 아마도 아빠가 곁에 있다는 든든함과 여기서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었다.
가족이라는 거, 부모님이라는 거.
그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그냥 가만있어도 든든한 거.
‘좋다, 아빠.’
엄마는 그럼 어떤 느낌일까?
원장 수녀님 같으시려나? 아니면 헤일?
“레티시아, 뭐 갖고 싶은 게 있니?”
살갑게 나를 챙기던 두 사람을 떠올리다 문득 들리는 아빠의 물음에 진지하게 턱 끝을 톡톡 두드렸다.
“움.”
뭐가 좋을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 여기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 같아서 다른 건 필요가 없었다. 근데 이 상황에서 ‘갖고 싶은 거 없는데. 아빠랑 있는 게 선물이야!’라고 말하면 너무 어린애답지 않아 보이지 않겠나.
거기다 내 선물 사 준다고 나왔는데 아무것도 안 고른다고 하면 아빠도 조금 실망할 거 같고.
“인형요!”
그래서 제일 만만한 인형을 골랐다.
아빠는 ‘또 인형이니?’ 하는 시선이긴 했지만, 아빠 생각날 때 끌어안고 있을 수도 있고. 그 인형을 보면 오늘 일을 오롯이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리아나네 집에서 봤는데 목에 리본을 달고 있는 곰돌이 인형, 그거 갖고 싶어요.”
“그래.”
설명까지 덧붙이는 내 말에 아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신나서 앞을 바라보았다.
근데 하필 내 시선이 딱 닿는 데에 아빠 손이 있었다.
‘손 잡으면 안 되겠지?’
흘끗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편할 거야.
키도 안 맞으니까.
아빠 힘들 거야. 그래.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앞을 바라보자 눈앞에 아빠 손이 수욱- 하고 나타났다.
“응?”
그 손에 고개를 돌려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손잡고 가야지.”
오늘 진짜 내 생일인가?
아빠가 먼저 손 내밀어 주다니.
좋아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웅!”
아무래도 이번 생은 뭔가 행복한 일들만 가득한 것 같았다.
‘신이 나를 예뻐하나 봐.’
아빠가 내밀어 준 손을 잡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은 요 몇 달간의 기억만으로도 행복할 거라…….
‘아니야. 여기서 한계를 짓지 마! 퉤퉤퉤.’
말이 씨가 된다고. 생각조차 내쫓으려는 듯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아빠가 잠시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으나 앞을 보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씩씩하게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네의 아빠 집에서 상업 지구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눈에 익은 거리가 보였다.
“아.”
밤에는 캄캄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리안의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이 보이는 거리였다.
여기서 저기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리안이 사는 집이 있었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여기서 고개를 쭉 빼고 보자,
‘리안이네다.’
리안이 앉아 있던 그 거리와 리안네 집 문이 보였다.
근데 닫혀 있네.
당연한 말인데.
창문도 열린 곳 없이 캄캄한 집에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아직도 울고 있을까?
어제 그렇게 밀쳐졌으면서 걱정할 마음이 드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잘해 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해 줄 거라고.
그리고 어제 리안이 나를 밀어낸 건 리안이 착해서였다.
아빠랑 같이 가라고, 그리고 자기 우는 걸 더 안 보여 주고 싶어서였겠지.
리안이는 자존심이 아주 많이 강한 아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리안이 나를 만나고, 황궁에 들어가서 울지도 않고, 감정도 잘 안 드러내고 그랬던 건 감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강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는 건 그리고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건 리안이의 입장에선 자신의 약점을 꺼내 보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게 우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았겠지.
은화 두 닢부터 어제 일까지, 내게 자신의 약한 부분을 너무 많이 보여 줬으니까.
‘그래서 나를 더 싫어하려나?’
자존심 상한다고 느낄지도 몰라.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 단검만이 유일한 살길이려나.
돼지를 얼른 잡아야겠군.
“레티시아?”
돼지를 떠올리며 짓던 사악한 표정을 감쪽같이 지우곤 고개를 들었다.
“웅?”
“가 보고 싶은 거야?”
아빠의 물음에 잠시 골목 안쪽을 흘끗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은지 걱정돼서.”
“그럼 가 보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준 아빠가 내 손을 꼭 잡은 채,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피어스랑 같이 갈 때에도 마음이 든든했는데, 아빠랑 같이 가니까 진짜 두려운 게 없었다.
이럴 때 피에르 애드먼 그 애송이들이 나타났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진짜 뼈도 못 추렸을 그들을 떠올리며 콧숨을 훙, 하고 내쉬었다.
“피어스.”
“예.”
그러곤 집 앞에 다다라 피어스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에 그가 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잠겼는데요.”
노트 몇 번을 하다 문고리를 돌려 보던 피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쪽에서 인기척도 안 느껴집니다.”
“그럼.”
어딜 간 거지? 싶어 아빠를 올려다보자,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던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폴에게 가 볼까?”
“아!”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빠의 똑똑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디 의원에도 리안은 없었다.
폴도 마찬가지였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묘지에 가셨습니다.”
쟈이든 뿐이었다.
“벌써?”
‘어제 돌아가셨는데, 뭘 벌써 장례를 치르는 거지?’라는 생각에 쟈이든을 올려다보자-
“병에 걸렸는데, 그 병이 아무래도 전염병인 거 같다고 하셨어요.”
“…….”
“기침할 때에 피도 많이 나오고요.”
기침할 때 피면.
결핵인가.
근데 그렇다기엔 함께 시간을 보낸 리안도 폴도 멀쩡하지 않나.
특히나 리안은 아무런 증상도 없어 보였다.
근데 만에 하나 정말 결핵이면. 리안이 옮았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에 고개를 들자-
“의원님께서 혹시 모르는 거니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쟈이든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아마도 폴은 리안이 너무 오래 그녀 곁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그걸 걱정하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군가 빨리 결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어린 리안은 절대 자기 엄마를 보낼 수 없을 테니까.
전생, 소설에서는 그 역할을 누가 했을까.
어쩐지 조금씩 아주 미미하게 달라지는 상황들을 인지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바꾸는 미래들이 이 소설의 어느 부분을 바꾸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난 그냥 내 미래만 아주 조금 바꾸려고 한 건데.
내가 바꾸는 미래가 주인공과 너무 밀접하다 보니, 조금씩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듯했다.
지금은 아주 작은 실금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커다란 댐을 무너트리진 않을까 싶은, 오직 나만 아는 나비 효과.
‘후.’
그렇다고 안 바꿀 수도 없고.
지금은 너무 초반이라 티가 잘 안 나는 내 행동이 나중에 무슨 결과를 가져올까 뒤늦게 걱정스러웠다.
‘지금 이 행복이 다 무너지면.’
난 살 수 있을까?
입술을 살짝 깨물며, 꼭 잡은 아빠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그런 내 꼬물거림에 아빠가 시선을 맞추듯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레티시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살피는 아빠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여.”
그러곤 쟈이든을 돌아보았다.
“묘지가 어딘데?”
“그거 알려 주지 말라고 하던데요.”
“……왜?”
폴이 그랬을 리는 없고, 또 리안이 나를 밀어내는 건가 싶어 그를 보았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누가 의원님과 리안을 동시에 찾으면 오지 말라고 전해 달라 하더군요.”
“누가?”
“리안이요.”
역시.
쉽지 않네.
위정자가 청탁 끊어 내는 것처럼 매정하게 그어 버리는 선에 마음이 아주 조금 상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다.
리안에 대해서 유독 너무 무르게 군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다잡지 않으면 옹졸한 내 마음이 그에게 서운함을 품을 것만 같았다.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
리안이는 나한테 동아줄이고, 전생에서는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으니까. 전생의 빚을 갚고, 나 좀 잘 봐 달라고 말하려면 서운함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알겠어. 그러면 나 왔다는 이야기두 하지 마.”
그래서 애써 웃으며 고개를 들자, 쟈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숨을 푹 하고 내쉬고, 어깨를 툭 떨어트렸다.
“아빠, 레샤 인형요. 인형 사러 가요.”
그러곤 아빠의 손을 잡고 당겨 흔들었다.
그 어리광에 나를 빤히 보던 아빠가 머리를 툭툭 두드려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미처 한 발을 떼기도 전에 들린 쟈이든의 목소리에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근데 혹시…… 그 경매장에서 날 낙찰받은 사람이 혹시 아기씨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