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7)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7)화(7/141)
“다만 얼른 보고는 반드시 자리에 돌려놓아라.”
가족들 앞에선 처음 제 역성을 들어 준 할아버지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일렁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인정받았다, 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할아버지의 시야 안에는 들어온 듯했으니까.
거기다 돌려놓으라는 말.
언제든 집무실에 들러도 된다는 말이었다.
책도 책이지만 할아버지의 저 말이 더 큰 수확이었다.
‘시작된 거야.’
“녜.”
마음을 다잡듯 책을 작은 손으로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감샴…….”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제게서 몸을 돌린 뒤였다.
“이만들 나가 봐.”
이제야 익숙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엷게 웃으며 숙모 곁으로 총총히 걸어가자, 눈높이에서 저를 보는 챈들러와 제이슨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숙모와 숙부는 뭐 말할 것도 없었고.
금방이라도 작은 골방에 저를 처넣을 것처럼 사나운 얼굴로 코평수를 넓히는 안드레아의 표정부터 서늘하게 웃는 벨리아까지.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를 상상하게 만드는 각기 다른 얼굴들에 깊게 숨을 몰아쉬자-
“넌 나가서 보자.”
제 옆으로 다가선 챈들러가 잇새로 작게 속삭였다.
저 나름대로는 위협적으로 보이려 험상궂게 얼굴까지 일그러트리고는 엄지로 목을 그은 듯한데.
‘어쩌나 하나도 안 무서운데.’
해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끔 고개를 돌려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 모습에 퉁퉁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챈들러가 손을 뻗었다.
“이게!”
“채디.”
하지만 내 쪽으로 달려드는 챈들러를 만류하듯 제 반대쪽으로 빼낸 벨리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똑같이 굴지 말라고 했잖니.”
“하지만!”
“쉬이.”
“나가서 하렴.”
아아.
여기서는 하지 말고, 나가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싶어 작게 나온 헛웃음에 고개를 숙였다.
‘전생에서도 똑같았겠지.’
다만 그때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것뿐.
어렸을 때는 더욱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을 테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 뒤쪽에 서 있던 베넷이 창밖을 흘끗 보곤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그 표정에 가신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창밖을 보곤 작게 욕설을 짓씹으며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가주님.”
그 모습에 조용히 몸을 돌리자-
“잠시, 작은애야.
손을 들어 가신들을 잠시 멈춘 할아버지가 벨리아를 불렀다.
“예, 아버님.”
그러잖아도 왜 불렀는지 애가 닳아 있던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가 벗어 두었던 안경을 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직계 선생들 다 자르거라. 며칠 내로 베넷이 아카데미에서 다시 뽑아 올릴 테니.”
“……예?”
놀란 벨리아가 뒤를 돌아보다 이내 도로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자질들이 부족해.”
그 말로 끝.
“나가 보거라.”
할아버지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축객령을 받은 벨리아의 곁에 있던 난 소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남몰래 흐흐흐 웃으며 말이다.
탁 소리와 함께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차단한 마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문 너머 줄줄이 선 마차와 그 선두에 높게 세워 올린 황실의 깃발이 유난히 바람에 펄럭거렸다.
“가주님.”
“…….”
리비에 백작의 부름에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빤히 보던 마고가 깃발에 닿아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알레시아.”
“예, 가주님.”
몸을 돌려 자리에 앉은 마고가 리비에 백작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펠루아나 쪽 움직임은 어떠하지?”
느닷없이 펠루아나를 언급하는 마고의 물음에 미간을 살짝 좁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겉보기에는 조용합니다만, 대륙을 통일한 펠루아나의 새로운 칸이 귀족들을 규합하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올라오고는 있습니다.”
“은행 쪽은.”
“돈이- 새고 있습니다.”
서류를 뒤척이던 리비에 백작의 말에 마고의 눈썹이 살짝 들려 올라갔다.
“새고 있다?”
“예. 펠루아나의 지방 귀족들이 제법 많은 돈을 빌려 가고 있습니다. 워낙 중앙 귀족들에 비해 미미한 금액이라 따로 확인을 하지 않았었는데.”
서류를 자세히 보던 리비에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전쟁인가.”
“내전 아니겠습니까.”
곁에 있던 수아레 남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즉위한 젊은 칸이니. 노리는 이들이 많겠지요.”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일 수도 있지.”
나직이 덧붙인 마고의 말에 수아레 남작이 얼굴을 굳혔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불필요한 피를 보아야 할 수도 있음이었고, 거기다 에시어의 권속들 중에서는 펠루아나 제국과 영지를 맞댄 곳이 많아 더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수아레 남작의 바람을 저버리듯 리비에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예, 가주님의 말씀대로 그럴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
“특히 테파로아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펠루아나 제국의 지방 영지들에서 보고되지 않는 소액 거래가 자주 있어 보입니다. 자세한 것은 서류를 좀 더 확인을 해 봐야 하겠으나.”
“그대의 판단으로는.”
“내전이든, 전쟁이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드는 리비에 백작의 말에 반듯이 앉아 있던 마고가 팔걸이 끝을 문질렀다.
‘곧 펠루아니아에서 전쟁을 일으킬 거예여.’
평소였다면 그냥 무시해 치웠을 이야기였다만…….
이능 발현이 뒤늦게 일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아이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주저함도 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에 찬 목소리.
‘이능이 예지 쪽으로 발현되려는 건가.’
만약에 그런 거라면, 샤리에는 절대 레티시아의 이능을 발현시키려 하지 않을 거다.
예지를 이능으로 타고 태어난 이능력자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제 명대로 살다 간 이가 없었으니까.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 끝내 상대편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거나 신의 미움을 받아 병을 얻어 일찍 죽게 되는 저주받은 이능이 예지였다.
하필.
마고가 주먹으로 팔걸이를 툭툭 내리치다 고개를 들었다.
“베넷.”
“예, 가주님.”
“레티시아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반년 뒤 7살이 되십니다.”
후계의 자격을 얻게 된다면, 반년 뒤에는 오네로 가야 했다.
그 전까지 이능을 다른 방향으로 틀든가, 아니면 샤리에가 알기 전에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가문에는 득이 될 테니.’
매정하다 생각될지도 모르겠으나, 가주인 제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오직 가문의 이익뿐이었다.
“올가를 선생으로 뽑아 올려라.”
“……예, 알겠습니다.”
베넷이 노트에 올가의 이름을 적어 올리자, 리비에 백작과 수아레 남작이 흘끗 마고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얼른 물어보라는 듯한 눈짓에 베넷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 가주님.”
“…….”
베넷의 주저하는 목소리에 마고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허면 황궁 감시단은 어찌할까요.”
“저 한구석에 처박아 두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기는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이들인데요. 빌미를 주는 건 좋은 수가 아닙니다.”
“허면 언제까지 이리 지내야 한다는 소리입니까.”
“폐하의 억지소리가 도를 지나치질 않습니까.”
마고의 곁에 남은 리비에 백작과 수아레 남작이 소리를 높였다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베넷, 좋은 수가 없겠는가.”
“있다면, 진작에 사용했겠지요.”
베넷의 무심한 목소리에 남은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가 가택 연금을 당해 가장 힘든 사람이 베넷이었으니까.
전엔 마고 한 사람만 모시면 되었는데, 가주님의 가택 연금 때문에 무능한 안드레아를 도와 일도 해야 하고, 마고에게 보고까지 일이 두 배가 늘지 않았는가.
하지만 황제의 억지소리를 이겨 낼 방도가 없었다.
조용히 팔걸이를 문지르고 있는 마고의 옆모습을 보며 베넷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꼬투리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했으나, 나이를 먹어 감에 더 심해지고는 있었다.
‘대체 이 억지소리를 대체 언제까지 참아 내야 할지.’
황실에 대한 예의를 중요시하는 마고의 성향상 이번에도 참아 낼 작정인 듯했다.
황제의 억지라는 걸 아시면서도.
“후.”
눈가를 꾹 눌렀다 떼는 베넷의 한숨에 마고가 팔걸이를 통통 두드리던 손으로 입술을 훑었다.
‘가택 연굼. 그거어 할부지가 은퇴하면 돼요.’
‘은퇴, 은퇴라.’
마고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웃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수임에는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레티시아의 예지가 맞아 전쟁이 일어난다면 더더욱.
‘내가 물러나는 게 답이지.’
어찌 되었든 가택 연금령이 내려진 것은 귀족 회의 의장인 황제의 신하라 내려진 벌이었으니까.
죄를 청하든 아니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든 직을 내려놓고, 떠나겠다고 하면 황제는 저를 막지 못할 테고, 그 즉시 연금령은 풀릴 거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당황할 테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하이에나 떼들이 저보다 더 사납게 달려들겠지.
누가 우군이고, 적군인지 파악하기조차 어려울 터.
권력이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 제가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떠한 파란을 몰고 올지 자명했다.
특히나 펠루아나가 공격해 들어온다면.
‘이에로 그 늙은 너구리 놈을 골탕먹일 수 있겠어.’
제 앞에서 와작 일그러질 황제의 얼굴을 떠올린 마고가 몸을 등받이에 깊게 묻었다.
“베넷, 조사단이 원하는 바가 있으면 다 들어주고, 닥터 콜린을 불러들여.”
“어디 아프십니까?”
“아플 예정이야.”
“예?”
알아듣지 못한 듯 되묻는 베넷의 표정에 답은 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마고가 침실로 향하는 벽에 걸린 가족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림자처럼 뒤쪽으로 물러서 있는 샤리에.
‘네놈이 걷어 찬 후계의 자격을 네 딸이 얻겠구나.’
방방 뛸 샤리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듯, 후후 웃은 마고가 침실로 걸어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