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82)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82)화(82/141)
엄마를 땅에 묻고 돌아온 그 날부터 리안은 마치 짙은 어둠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누워 있던 침대는 주인을 잃은 동시에 온기가 사라졌고, 그 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리안은 침대가 보이는 방의 한구석, 찬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머리에서 시작된 기억은 어깨에 닿고, 가슴으로 흘러,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리안은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몸을 아무리 웅크려 보아도 흘러내리는 기억을 붙잡을 수 없었고, 어릿어릿한 가슴의 통증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몸이 사라져 버렸으면 싶었다.
아니면 이대로 아침이 오지 않거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담은 채,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야, 아침이야. 일어나.”
그런 밤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방문을 열어젖히는 저 붉은 머리가 제 삶을 들쑤시고 들어왔다.
“꺼져.”
“지겹다, 지겨워. 열흘 내내 나만 보면 똑같은 말. 난 지겨운데 넌 괜찮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쟈이든이 리안의 앞에 물 잔을 내밀었다.
“마셔.”
“…….”
“마시라고, 물이야.”
“꺼져.”
물 잔을 흘끗 보곤 도로 바닥 모서리에 얼굴을 박고 누우려는 리안의 몸을 다리로 막은 쟈이든이 그의 코앞까지 잔을 들이댔다.
“비…….”
“어제처럼 억지로 마시고 싶은 거 아니라면 순순히 마셔.”
밤새 울고 일어난 제 입을 벌려 억지로 물을 먹이던 어제의 쟈이든을 떠올린 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에 쟈이든이 어깻짓을 하듯 물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건강에 좋아.”
딱히 나를 비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각하게 걱정을 하는 것도 아닌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법한 표정에 순순히 물 잔을 받아들었다.
그래, 지금 당장 목이 마르기도 했고.
“고맙습니다.”
“…….”
쟈이든이 물 잔을 받아 한 모금 머금는 리안을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따라 해 봐. 고맙습니다.”
이젠 별걸 다 바라네 싶은 리안이 얼굴을 굳힌 채 물 잔을 다 비우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누가 물 달라고 했나.”
손등으로 입가에 남은 물기를 닦아 낸 리안의 말에 쟈이든이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부스스 흐트러트렸다.
“하지 마.”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놈.”
웃는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퉁명스러운 쟈이든의 말에 그의 손을 탁, 하고 쳐 버린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촤아악!
며칠 내내 쟈이든이 예의 없이 불쑥 들어와 확확 쳐 대던 커튼을 이번에는 직접 걷었다.
어차피 칠 거라면 남의 거친 손길에 맡기는 것보다는 제가 직접 하는 게 나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웃던 쟈이든이 리안이 내려놓은 물 잔을 집어 들고는 문 앞에서 나오라 손짓했다.
“나와, 아침 먹게.”
“…….”
순간 쟈이든의 입에서 나온 아침이라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웩 소리를 낸 리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웩?”
“그래, 웩.”
리안이 아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니, 그도 그럴 것이 며칠 동안 쟈이든이 요리를 잘한다고 큰소리 뻥뻥 치며 만들어 준 아침 식사는 네투아식 향신료를 가득 넣은 고기 수프와 달걀 스크램블이었다.
근데 향신료의 강한 향은 그 지방의 특징이라 어쩔 수 없다 해도, 고기 수프라고 해서 토마토와 감자를 넣어 끓인 정체불명의 국물 요리는 먹을 수 없을 만큼 짰다. 빵에 조금 찍어 입에 넣으면 바닷물을 퍼먹는 것처럼 짜서 쓴맛이 날 정도였다.
거기다 스크램블이라고 해 놓은 건 어디 달걀 껍데기와 같이 스크램블을 하는 조리법이라도 있는 건지, 입에 넣을 때마다 껍데기가 씹혀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리안 입장에서는 듣자마자 웩 소리를 내며 얼굴이 찌푸릴 수밖에.
“안 먹어.”
뭐 나아지는 부분이 있어야 시도라도 하겠는데, 점점 기괴해지는 쟈이든의 요리를 더는 입에 대고 싶지 않아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리자-
“이번엔 내가 안 했어.”
쟈이든이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내가 요리 안 했어. 펠이 가져왔더라. 그러니 안심하고 먹어도 돼. 나도 내 요리 엉망인 거 아니까.”
“…….”
그런 거라면.
펠의 음식이라는 말에 바로 몸을 돌린 리안이 쟈이든이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응접실로 나갔다. 그 뒷모습에 “저 이씨.”라고 입을 삐죽인 쟈이든이 주먹을 잠시 쥐었다 풀었다만, 리안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되레 억지로 끌고 나와 식탁에 앉혔던 첫날과는 다르게 순순히 의자에 앉아 아주 맛있게 수프를 먹었다.
“……맛있네.”
밤엔 끝도 없는 어둠 속을 헤매다, 낮이면 쟈이든의 강요라고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억지로라도 빛 사이로 한 발쯤 걸쳐 놓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그저 귀찮기만 했던 그 행동들이 열흘이 지난 지금은 아주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잘 먹네. 그래, 많이 먹고, 그릇은 네가 펠네 집에 가져다주고 와.”
“…….”
의자를 쓰윽 빼서 그 앞에 앉은 쟈이든이 수프를 한 국자 퍼먹었다.
“내가 한 것보다 맛있긴 하네.”
“당연하지.”
“그래, 그래.”
쟈이든이 수저를 달랑달랑 흔들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곤 힘을 주어 주욱 뒤로 밀자 의자의 앞다리가 들린 채 흔들렸다.
어찌 되었든 며칠 사이 먹는 양도 늘고, 울며 깨는 일도 줄어든 것 같았다.
처음엔 얘랑 어떻게 같이 있나, 하고는 주인님을 원망도 했었는데…….
문득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던 제 모습이 보이기도 해 짠한 마음이 들었다.
얘가 사람 노릇 할 때까지는 옆에라도 있어 줘야 하나 싶고.
‘제대로 코 낀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로 누였던 몸을 앞으로 숙여 수프를 한 입 더 머금은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 누구 올 사람 없……. 설마, 주인님인가?”
느닷없는 방문자의 등장에 쟈이든이 수저를 퍽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쟈이든의 말에 리안은 관심 없는 척 수프 그릇에 코를 박고는 있었지만, 온 관심은 문 쪽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에이, 폴이네.”
레티시아가 아닌 폴의 등장에 쟈이든은 크게 실망하며 어깨를 늘어트렸고, 리안 역시 시선을 거두어 수프를 마저 먹었다.
“뭐냐, 그 노골적인 실망들은?”
“주인님인 줄 알았거든요.”
“아기씨는 어제 샤리에 님께서 출병하신 후에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셨지.”
응접실로 들어온 폴의 설명에 쟈이든이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인사는 하고 가실 줄 알았는데.”
“저택을 오래 비우셨으니까.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고.”
“그래도.”
“곧 다시 나오실 거야.”
“네.”
폴의 말에 쟈이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을 가리켰다.
“아침 드실래요?”
“네 집 아니야.”
“그래, 그래. 수프?”
손으로 수프 그릇을 가리키는 쟈이든의 모습에 폴이 웃으며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럼 네 집이니까 네가 퍼 드릴래?”
“시끄러워.”
“그래, 그래. 내가 할게.”
걱정과는 달리 투닥거리며 잘 지내고 있는 듯한 두 아이들의 모습에 폴이 흐뭇하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맛있네. 펠 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
“네.”
쟈이든이 그릇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안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를 잃은 지 고작 며칠.
아이에게 멀쩡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저는 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데.
한숨처럼 긴 숨을 몰아쉰 폴이 리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리안아, 나 간다.”
“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꾸벅 고개를 숙이는 리안을 등지고 문을 열고 나가자, 쟈이든이 뒤쫓아 나왔다.
“나 간다, 잘 좀 챙겨.”
“…….”
하지만 폴의 뒤를 따라 나온 쟈이든의 대꾸가 돌아오지 않자, 자리에 멈춰 선 폴이 고개를 돌렸다.
“쟈이든?”
“아, 어. 네.”
뭔가에 시선을 빼앗긴 듯한 모습에 폴이 그를 보다 말고 쟈이든의 시선이 닿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이게끔 양옆으로 사라지는 남자 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이쪽을 보고 있었던 거 같은데.
“저 사람들…….”
“어제도 있었어요. 아까 선생님 들어오셨을 때도요.”
여전히 앞쪽을 주시한 채 폴을 향해 이야기하는 쟈이든의 말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왜 여길?
의아하기만 한 폴이 쟈이든을 돌아보았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폴의 물음에 쟈이든이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쟈이든의 말에 폴이 그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징조였다.
레티시아 아기씨가 관심을 두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폴이 입술을 말아 문 채 쟈이든을 돌아보았다.
“또 오는지 살펴보고 얼굴을 익혀 놔, 쟈이든.”
폴의 말에 쟈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