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86)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86)화(86/141)
“그 아이를 다시 혼자로 만들어야 해요, 형님.”
6살 난 어린 조카를 고립시키겠다는 말을 하는 것 치고는 여전히 좋은 사람의 탈을 쓴 헬렌의 태연한 말에 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혼자로?”
“네.”
여전히 고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헬렌의 답에 꼬았던 다리를 푼 벨리아가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무슨 수로?”
“주변 사람들을 정리해야겠어요.”
헬렌이 찻잔으로 가볍게 입을 축였다.
“설명을 해 봐.”
“아무리 이능력자라고는 해도 그 아이가 이렇게 날뛰는 게 말이 안 돼요. 그 아이에게 갑자기 성인의 이성이 들어간 게 아니라면, 분명 주변에서 아이를 조종하는 자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
“그 간악한 이들을 떼어 내야 하지 않겠어요?”
아주 그럴싸한 말로 그새 제가 하려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헬렌에 벨리아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적으로 있으면 짜증 나지만 내 편일 때는 이만큼 든든한 사람이 없지.’
흐뭇한 미소를 띤 벨리아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헬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면?”
“우선 그 측근 하녀라는 아이가 가장 수상하죠.”
벨리아의 끄덕임에 헬렌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아리나가 잘못을 하긴 했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아리나의 말대로 그 아이가 먼저 약을 먹이고 있어서 아리나의 약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아주 그럴싸한 말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흡족함이 밀려와 웃음이 나올 정도로.
“그리고?”
“베넷도 샤리에 님과 너무 가깝죠.”
“…….”
“고작 평민밖에 되지 않는 이가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휘두르고 있어요.”
은근히 베넷이 사라져 버리길 바라는 듯한 헬렌의 말에 벨리아가 푹신한 소파에 등을 대고 깊게 묻었다.
“그렇긴 해. 너무 위아래 모르고 설치고 다닌다고 우리 그이도 말을 하더라고.”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귀족’을 데려와야겠어요.”
레티시아의 측근을 쳐내면서 가주님의 곁에 있는 이까지 함께 내치겠다라.
‘꿈이 원대하네.’라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으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 건 사실이었다.
가주님 곁에 우리 사람 하나 심어 놓고 싶어 안드레아가 몇 년째 공을 들이는데도 베넷 때문에 시도도 못 하고 묻힌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이번 기회에 물갈이를 확실히 하는 것도.’
거기다 제 남편이 가주 대행을 하는 내내 베넷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모욕과 설움을 당했던가.
대놓고 말만 안 하지, 멸시와 경멸의 시선으로 저를 본다며 안드레아가 분을 참지 못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놓고 저를 빼고 영지까지 내려가 보고를 하고 있노라고.
‘건방진 것.’
벨리아가 주먹을 틀어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 곁에 유독 아첨하는 간신만 남아 있긴 하지.”
“거기다 나이도 너무 드셨죠.”
“…….”
“물러나실 때가 되었어요.”
헬렌이 벨리아를 빤히 보았다.
그녀답지 않게 굉장히 노골적인 적개심이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낼 때는 분명 바라는 바가 확실할 터.
“뭘 바라, 동서?”
“에시어 무역이랑, 선박 20개.”
무역이라.
지금 저들이 하는 셈에서 그 정도는 충분히 넘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이에게 말은 해 볼게. 너무 기대는 말고.”
어찌 됐든 제게는 손해될 것이 하나 없는 제안에 슬쩍 발을 빼듯 몸을 소파에 묻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웃음이 배슬배슬 나오는 걸 감출 수가 없어 혀를 깨물어야만 했다. 이렇게 되면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음이었다.
레티시아의 오네행을 막고, 베넷을 가주님 곁에서 떼어 내 두 사람을 모두 고립시킨다.
거기다 가주님의 건강은 나날이 안 좋아지고 있질 않은가.
그 권력욕 강한 분이 은퇴까지 하고 영지로 내려갈 정도니.
‘오늘내일하는 게 아닐까?’
그런 기대까지 하게 만드는 상황에 벨리아가 산발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졌다.
헬렌이 그 속도를 앞당겨 줄 모양인데.
‘그렇다면 슬쩍 말을 흘려 주는 것도.’
레티시아의 싹을 말리는 건 샤리에를 짓밟는 것과 똑같으니.
일단은-
“그나저나 자네 말대로 레티시아 곁에 대체 누가 붙어 있는 건지……. 내가 정말 잘못 키웠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혀를 쯧 하고 찬 벨리아가 찻잔을 들자, 헬렌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맥락 없이 던진 말에 낌새를 차린 듯, 저를 빤히 보는 헬렌의 시선에 벨리아가 웃던 표정을 싹 지운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기울임에 헬렌 역시 몸을 앞으로 숙이자, 벨리아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레티시아가 며칠 전 경매장에서 노예 남자아이를 하나 사들였다고 하더라고.”
“세상에!”
벨리아의 말에 헬렌이 경악에 찬 얼굴로 입을 가렸다.
그 매우 만족스러운 반응에 벨리아가 몸을 도로 세우며, 가볍게 혀를 찼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정말 천한 피는 어쩔 수가 없는 건지.”
고개를 내저은 벨리아가 헬렌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행실의 아이가 오네로 가면 어찌 될지…….”
“뻔하죠.”
“그러니까!”
벨리아가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이자, 헬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가주님께 이 일을 정식으로 알려야겠어요. 레티시아를 오네로 보냈다간 에시어만 우스워질 수도 있겠어요. 그 어린 게 벌써부터, 남자라니!”
‘하!’ 하고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헬렌의 말에 벨리아가 손짓을 했다.
“서두르지 마.”
“하지만 형님!”
“내가 다 준비해 놓았으니까.”
발끈해 소리를 높이는 헬렌의 반응에 벨리아가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손을 댔다.
속닥속닥.
지척에 있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게끔 작게 속삭이는 벨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헬렌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거 아주 좋은 방법인 거 같아요.”
“그렇지?”
제 의견에 대한 헬렌의 긍정에 벨리아가 자신감을 얻은 듯 턱을 살짝 올려 들었다.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동서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해.”
“그건 염려 마세요.”
자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엷게 웃은 헬렌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 아이를 위해 주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이들 모두를 정리시킬 생각이니까요.”
마치 이 모든 것이 레티시아를 위함이라는 듯 눈빛을 빛낸 헬렌이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곤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래, 동서.”
한미한 집안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고고한 귀족이었다. 저를 향한 헬렌의 충성심 가득한 눈동자가 만족스러운 듯 벨리아가 엷게 웃었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 제가 가질 권력의 맛을 아주 조금 맛본 듯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 * *
그 시각.
밤새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왼쪽으로 굴러도 속이 답답하고, 오른쪽으로 굴러도 머리가 복잡했다.
처음 이 방에 와서 머리를 대자마자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던 베개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
차라리 일어나자, 일어나.
침대에 누워서 주리가 틀리느니 차라리 일어나 몸을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으니,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만 같았다.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할아버지의 표정과 이때다 싶은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던 숙부와 숙모들.
그리고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나를 보던 챈들러와 제이슨.
그곳에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아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는 당연히 오네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 줬을 테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을 테니까.
아빠는 애당초 내가 후계의 자격을 갖는 걸 싫어하시기도 했고,
‘아빠랑 통화라도 할까.’
협탁 안에 고이 모셔 놓은 마도구를 떠올리듯 그쪽을 한참 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얘기 하면 아빠가 속상해할 거야.’
안 돼.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면 아빠는 또 할아버지한테 화를 낼 거고, 그러면 또 두 사람의 화해는 물 건너가는 거였다.
‘그러면 에시어의 영광도 물 건너가는 거지.’
그러니까 그 영광이 내 알 바냐고.
순간 미친 사람처럼 불쑥 튀어나온 본심에 내젓던 고개를 멈추었다.
그래! 죽어 버리면 그뿐인데!
그냥 적당히 누리다 죽으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12년 뒤에 죽는다는데.
근데 그러면 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
망할.
“아, 몰라.”
진짜 내 운명인지 뭔지 짜증 나네.
멈춰야 할 선을 모른 채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는 불나방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편안하게 지낼 수도 있었다. 근데 또 그렇다고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12년을 그냥 허비하는 건 내 성격상 맞지 않았다.
“덴장.”
어쩌라는 거냐!
절로 튀어나오는 답답함에 발로 바닥을 쿵쿵 굴렀다.
‘데려다 놨으면 답도 같이 달라구요!’
신인지 뭔지를 향해 빽 성질을 내듯 달을 노려보다 이내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나 뭐 하니.’
말도 안 되는 짓에 헛웃음을 지으며 터덜터덜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가 몸을 누였다.
“하아.”
답답함에 다시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내 답답함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은 듯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