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88)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88)화(88/141)
그 시각.
헤일의 집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의라고는 없는 거친 두드림에 펠이 얼굴을 굳혔다.
“누구세요!”
거친 두드림에 대응하듯 한층 까칠하고 앙칼진 목소리에 쾅쾅 예의 없이 두드리던 문밖의 기척이 멈췄다.
펠은 슬쩍 문을 잠그고, 완전히 열리지 않게끔 잠금 고리를 걸었다.
그러고 나서야 안심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누구시냐구…….”
“여기가 헤일과 펠의 집이오?”
“아뇨, 여긴 우리 엄마 아빠 집인데요.”
문은 열지 않고 말대꾸를 하는 펠의 목소리에 문밖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헤일이 여기 사는 거 알고 왔으니, 문 좀 열어 보시오. 뭐 물어볼 게 있으니.”
“거기서 물어보세요.”
“아 글쎄, 물어보려면 뭘 보여 줘야 하니까 문 좀 열어 보쇼.”
그 말에 펠이 문의 정중앙에 난 직사각형의 자그마한 창을 홱 하고 열었다.
손가락 세 개를 겹친 높이에 남자 손으로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너비의 작은 창에 사내가 눈알을 갖다 댔다.
“뭐 볼 거 있으면 여기로 볼게요. 뭐요.”
“아니, 문을 좀 열면 시원시원하니 서로가 편할 텐데.”
“싫어요. 그럼 안녕히…….”
“아, 알겠소. 알겠어. 거참 성깔 더럽…….”
“안녕히 가세…….”
사내의 말에 작은 창을 닫으려 손을 올리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창을 닫지 못하게 막은 남자가 사납게 물었다.
“너 경매장 갔었지.”
앞뒤 다 자르고 뱉은 사내의 말에 창을 닫으려던 걸 멈춘 펠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지금 여기서 ‘아니다.’라고 질색하며 문을 닫아 버리면, 이들의 의심만 심해질 게 분명했다.
여긴 나랑 안나밖에 없는데 이들이 작정하고 들어오려고 하면 막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레샤 아기씨처럼 뻔뻔하게 나가자.’
“무슨 경매장이요? 그리고 손가락 빼요. 확 닫아 버리기 전에.”
펠의 협박에 사내가 금세 손을 거두었다.
그 모습에 괜히 보이지도 않는 그들 앞에서 턱을 빳빳이 올려 들었다.
“거짓말 안 하는 게 좋아. 몇 주 전에 당신, 에시어의 레티시아 아기씨랑 오네 뒷골목에 있는 경매장 갔잖아. 여기 증인도 있어!”
“난 아닌데요?”
“그럼 네 언니야?”
“언니도 아닐걸요?”
“야!”
“말조심하시죠?”
버럭 성질을 내는 남자를 향해 펠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우리 엄마 아빠도 나한테 ‘야’라고 안 하거든요?”
“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남자가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한층 젊은 듯한 사내가 가깝게 다가와 그와 똑같이 작은 창문에 매달렸다.
“저, 그 날 그 이야기를 해 주셔야 저희가 아기씨를 보호해 드릴 수 있어요.”
“무슨 보호요?”
“그게, 경매장에 갔던 걸 가주님께서 아셨거든요. 저희는 가주님께서 고용한 정보원들이고요. 저희가 아는 건 ‘어린 아기씨가 경매장에서 남자 노예를 사서 가지고 논다.’라는 것뿐이에요.”
가지고 논다니?
이게 무슨 개 멍멍이 소리인가 싶어 입술을 달싹이다가 흠칫 숨을 멈췄다.
그런 펠의 반응을 놓치지 않은 사내가 고개를 한껏 비틀어 좁은 창 너머의 그녀를 보려 아등바등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홀리는 말은 멈추질 않았다.
“저희가 내밀한 사정은 모르니까요. 근데 나도는 소문이 이렇다고 가주님께 이야기를 하면 아기씨께 큰일이 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펠 씨가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대충이라도 설명을…….”
“거, 그 일 때문에 아기씨가 얼마나 난처해지셨는지 아우? 심지어는 댁네 동생이 아기씨 옷을 훔쳐 입었다는 소문이 돌아서 헤일이라는 그 하녀도 곧 쫓겨나게 생겼어, 이 사람아.”
걸걸한 목소리로 뒤쪽에서 소리를 높이는 사내의 말에 놀란 안나가 벌떡 일어나 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놀란 듯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에 펠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괜찮아.’
다독이는 말에 안나가 손등으로 눈물을 슥슥 닦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웃지도 못하고 제 옷을 꽉 잡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날 받은 옷을 입고 돌아다닌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 풀죽은 모습에 펠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펠은 여전히 모르쇠였다.
“난 모르는 일이에요.”
왜냐면 레티시아 아기씨에게서 그 어떤 언질도 받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펠에게 그 날 일은 모르는, 아니 없었던 일이었다.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거 같네요.”
“저, 페, 펠 씨!”
창문 틈에 입을 밀어 넣고 다급히 외치는 남자의 부름을 차단하듯 문을 닫고는 등을 기댔다.
등 뒤에서 뭐라, 뭐라 말하며 문을 두드리다, 이내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으나 머잖아 조용해졌다.
“언니, 갔나 봐.”
“그래.”
그제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안나가 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무 일 없겠지?”
잔뜩 겁에 질려 묻는 말에 펠이 웃으며 안나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렸다.
“없을 거야.”
헤일도, 아기씨도.
지금 자신들의 말처럼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펠이 눈을 감았다.
‘아무 일 없게 도와주세요.’
하지만 그 순간, 문밖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고, 이어-
똑똑.
누군가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온도에 펠이 조용히 문에 귀를 댔다. 그러자 그런 펠의 기척을 느낀 듯 문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어스예요.”
“…….”
“아기씨께서 보내셨습니다.”
* * *
방위대 사건은 할아버지가 돌아오신 것과 동시에 해결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들어오는 길에 보이는 방위대 놈들을 죄다 돌려보내셨다고 했다. 베넷을 시켜 직접 방위대에 말까지 넣어 주셨다기에 안심하고 자고 일어났는데.
“그러니까 펠이 협박을 당했다고.”
다음 날 바로 들어온 피어스의 보고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예.”
헤일을 떼어 내기 위해서 펠과 안나까지 건드리다니.
그것도 이번엔 방위대가 아니라 웬 남자들을 동원해서 내가 경매장에 갔던 일을 캐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하, 숙모들 바쁘시네.’
어떻게 할아버지가 집을 비운 딱 하루 동안 이렇게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지, 황당할 지경이었다.
벨리아 숙모와 헬렌 숙모가 힘을 합치면 이런 시너지가 나오는 거였구나.
‘이런 짓을 안 하셨으면, 오히려 쉬우셨을 텐데요.’
‘12년의 시한부 생활 동안 탱자탱자 놀기나 할까?’라는 생각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그들의 권력욕에 되레 의지가 불타올랐다.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악마성의 각성이랄까?
내 특성이라는 이타성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내가 갖고 나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너희한테는 죽어도 못 주겠다는 악랄한 생각을 품게 하다니.
‘진짜 대단하세요.’
대체 어디까지 갈까, 이제는 궁금할 따름인 그들의 행보에 헛웃음이 나왔다.
포동포동한 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피어스, 너는? 넌 누가 안 괴롭혀?”
“네.”
대답이 너무 빠른데.
하긴 누가 괴롭힌다고 해도 피어스는 절대 말 안 하겠지.
그리고 솔직히 누가 마검사를 함부로 괴롭힐까.
그러다 죽을 수도 있는데.
그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 두고 엘론을 바라보았다.
“엘론은?”
“전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 많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럼 됐어.”
그래 저 둘은 걱정할 게 없었다.
내심 피어스가 걱정이었는데 나름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고,
그럼-
‘폴이랑 베넷이 남았나.’
베넷은 그래도 할아버지의 사람이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테고,
‘폴은 나름 저명한 의사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전생에 그가 가문에서 어떻게 버려졌는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쫓겨났던 그의 모습을.
그래, 표정 자체는 행복해 보였지만, 경제적으로는 궁핍하게 살아갔던 전생의 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들이 베넷을 가만둘 리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필립은?’
오직 할아버지한테만 충성하는 집사장인 그를 고까워하던 전생의 안드레아를 떠올려 보자면 그의 말년도 편하지만은 않았을 거다.
어디 그만의 일일까.
이 집안에서 버려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끝까지 버텼다 한들 에시어가 망하면서 그들도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을 텐데.
황가에서는 에시어 일족에 대한 현상금까지 내걸어 가며 모두를 죽이라 명령했으니까.
가신들과 그 집 사용인이었던 이들까지 모두.
‘죄없이 죽어 갔을 그들을 모두 다 지키려면.’
그래,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안드레아든 윈드런이든 그들에게 에시어를 넘기지 않는 것.
‘그래, 이미 알고 있었던 거잖아.’
신들이 바란 에시어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시한부 12년과 상관없이 아빠가 가주가 되는 것.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걸.
그러니 내 바람이었던 가늘고 긴 삶을 이룰 수 없다면,
짧고 굵게 살다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