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9)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9)화(9/141)
이틀 전 할아버지 집무실에서 돌아온 이후, 난 별관의 내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 집무실에서 가져온 책을 읽느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괜히 잔뜩 성이 난 챈들러와 제이슨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컸다.
그 날 내가 약을 좀 올렸어야지.
그들의 더러운 성미를 잘 알고 있는 내가 피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너무 좋았고, 책도 거의 다 읽어 가는 탓에 오후가 조금 지루해 방에만 있기는 아까웠다.
‘슬슬 나가 볼까?’
어차피 며칠 뒤 수업에서 만나야 하니 언제까지고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그냥 나가자!
해서 나왔는데.
“야!”
나 기다리고 있었나? 싶게끔 별관에서 몇 발자국 나오기가 무섭게 마주친 챈들러의 시비에 어깨를 늘어트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챈들러 에시어와 챈들러의 똘마니 제이슨 에시어.
위풍당당하게 내 앞을 막아선 이들이 바로 에시어의 미래를 짊어질 우리 집 어린 망나니들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참, 딱하시지.’
마고 하이덴 에시어.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능력으로 치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뛰어난 재략부터 수와 시류를 보는 탁월한 눈, 거기다 완벽한 정치력까지.
그 덕분에 애당초 대단한 에시어 공작가는 황가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가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마고 에시어에게도 딱 하나 부족한 점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자식 농사였다.
자식 일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마고 에시어의 자식들-우리 아빠 빼고-은 하나같이 개차반들이었다.
그리고 그 엉망인 자식 농사 아래 당연히도 망친 손주 농사가 이어졌다.
아마도 그들이 가주직을 이어받는다면 그 아래 증손주 농사가 어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이랬으니 안 망하고 배기겠는가?
아무튼 그 엉망인 손주 농사 한가운데 있는 녀석들이 내 눈앞의 두 놈이었다.
짝!
‘오빠?’
‘네가 감히 에시어 직계라고 떠들고 다녔다며? 네 더러운 피가 어떻게 에시어야!’
‘입 닥치고 살아.’
제 분풀이를 하듯 이유 없이 나를 흠씬 두들겨 패는 건 예사고, 할아버지에 아버지까지 잃은 나를 조롱하는 걸로도 부족해 나를 도둑으로 몰아 방을 뒤져 돈 될 만한 것들을 죄다 빼앗아 갔었다.
‘도둑년.’
‘더러운 년!’
술에 취해 풀어진 눈으로 누런 치아를 드러낸 채 나를 자기 구둣발 아래 두고 악마처럼 웃던 챈들러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진짜 이런 것들이랑 어울려 보겠다고 버둥거렸다니.
한심함에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나도 어렸지.’
히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비켜.”
“뭐?”
“길 막지 말고 비키라구.”
“너 미쳤냐?”
내 말에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린 챈들러가 씩씩대며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역성 좀 들어 줬다고 아주 기고만장하다?”
“만장하다?”
챈들러의 말을 없어 보이게 따라 하는 제이슨의 마른 얼굴을 한심하게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내가 지금 7살, 8살이랑 싸울 레벨이 아닌데.
“후.”
고개를 털레털레 내저으며 그 두 사람의 옆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싸우지 말자.’
괜히 여기서 말 섞어 봐야 나만 손해였으니까.
하지만 내 무시가 기분이 나빴던지, 얼굴을 싹 굳힌 챈들러가 씩씩대며 내 어깨를 잡아챘다.
“야!”
그리고 그 순간, 난 힘 조절을 하지 못한 사내아이의 억센 힘에 그대로 떠밀려 넘어졌다.
“아!”
엉덩방아를 아프게 쾅 찧으며 벌렁 넘어진 몸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머리를 부딪칠 뻔한 모습에 잠시 움찔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이내 엉망으로 흐트러진 내 꼴을 보며 웃음으로 물들어 갔다.
“큭큭, 꼴 좋다?”
“꼴 좋다?”
“그러니 개기지 말았어야지.”
“말았어야지!”
아, 진짜 오랜만에 예쁜 옷 입고 나왔는데.
흙먼지가 잔뜩 묻어 버린 옷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리나가 또 난리 치겠네.’
쫓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짜증을 부릴 아리나의 쨍쨍거리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툭툭 치맛자락을 털며 일어났다.
“비켜.”
짜증은 났지만, 별다른 표정 없이 그를 빤히 보는 내 시선에 챈들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당연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이미 지독하게 힘들었던 전생을 겪고 다시 태어난 내게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밀쳐지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먹을 것이 없어서,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고작 이런 일로 운다고?
웃기시네.
해서 그를 빤히 보며 보란 듯이 지나쳤다.
그 모습에 당황한 챈들러가 제이슨을 흘끗 보다 미간을 좁혔다.
“너 진짜 자꾸 개길래? 사생아 자식 주제에.”
“…….”
어허. 이 녀석 선 넘네.
가던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웃은 챈들러가 이죽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살짝 굽혀 시선을 맞췄다.
“네 주제를 알아야지.”
“…….”
“할아버지 계실 때나 네가 나랑 이렇게 마주 설 수 있는 거지 이 더러…….”
“그룸 할부지 돌아가시고 다시 말해. 지그믄 비키고.”
“……뭐?”
“아니 자꾸 ‘뭐? 뭐?’만 하지 말구! 비키라구. 나 방에 가서 쉴 거야 피곤해.”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마치 어른처럼 차분히 말하는 내 말에 챈들러가 입을 벌렸다.
제이슨은 이미 아까 전부터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멍청이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싶었다.
내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옆으로 피해 걸어갔다.
하지만.
“이게 진짜!”
그런 내 행동에 화가 잔뜩 난 듯 얼굴을 굳힌 그가 내 어깨를 다시 잡아챘고, 난 그대로 또 넘어졌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똑같이 치마를 털었다.
‘차라리 들어가자.’
더 이상 그와 실랑이 하고 싶지 않았다.
“비켜.”
그리고 내가 여기서 아무리 악다구니를 쓴다 해도 체격 차이를 보자면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직계 도련님에게 대항해 나를 도와줄 사용인도 없었으니까.
그냥 무시만이 답이었다.
하지만 그 무시에 대한 대가는 별관으로 돌아오기까지 열 번 넘어져 옷이 엉망이 되고 무릎이 다 깨져 피가 나는 것이었다.
“하, 이 병신 같은 게!”
“채디 형, 이제 그만하자.”
씩씩대며 별관 앞에서부터 나를 졸졸 쫓아와 끝내 열한 번째 발을 걸어 넘어트린 챈들러가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엉망인 챈들러 모습과 달리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는 내 표정을 흘끗대던 제이슨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제 가자. 응?”
“놔!”
하지만 제 옷자락을 잡은 제이슨의 손을 거칠게 팍 하고 쳐낸 챈들러가 내 말간 얼굴에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쳐들었다.
그 순간 사락 뭔가를 밟아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어? 베넷 부관님!”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머리 위쪽으로 드리워진 나무 위에서 들린 것도 같은 착각마저 드는 그 낯선 소리에 제이슨이 챈들러의 옷을 잡아당겼다.
“진짜 베넷이면 할아버지 부관이잖아. 그 사람한테 걸리면 진짜 혼날 거야! 쟤 꼴 좀 봐! 이르면 어떻게 해!”
“…….”
제이슨의 말에 주먹을 틀어쥔 챈들러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한 대 치지 못해 분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만-
“운 좋은 줄 알아.”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며 몸을 돌렸다.
“나중에 보자.”
멀쩡히 서 있는 내 어깨를 팍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치고 지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일단은 지금 이 상황이 끝났다는 것보다는 베넷이 왜 여기에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별채 주변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뭐지?
분명 베넷이라고 했는데.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베넷은커녕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귀신인가.
어쨌든 그 덕분에 이 상황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으니까.
내겐 좋은 일이지.
얼른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책이나 봐야지 하는 마음에 책을 당겨 안아 몸을 돌리자-
“아기씨!”
별채 뒤편에서 걸어 나오던 헤일이 내 모습에 빨래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내 상태가 그렇게 엉망인가?
난 내 모습을 보질 못하니까.
그냥 대충 엉망이겠다 싶었는데, 내내 무표정하던 하녀의 표정이 저렇게 심각해지는 걸 보니, 좀 심한 모양이다 싶었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
한데 괜찮다고 말을 하는 입술이 벙긋벙긋 벌어졌다 모아지며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대신 나를 부르며 다급히 달려오는 헤일의 얼굴만이 눈앞에 가물가물거리다 이내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퍽!
“성적 이따위밖에 못 받아 와?”
퍽 소리와 함께 작은 야구공을 배로 집어 던진 고아원 원장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꿈인가?
‘꿈이어야 하는데.’
끔찍한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래서 내가 후원자님께 면이 서겠어?”
현대식 행정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바뀐 고아원 원장님은 전에 계시던 원장 수녀님과 많이 달랐다. 화가 나는 날이면 분이 풀릴 때까지 원생들을 괴롭혔다.
죄송하다고 해도 맞았고, 대들면 더 맞았다.
“네가 에스대를 가야! 후원금이 늘 거 아니야!”
“…….”
“대답 안 해? 너 나갈래? 어? 어디 시골 촌구석에 처박아 줘?”
싫다고,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모습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아원 원장이 씩씩대며 다가섰다.
“반항하겠다 이거지!”
그러곤 뒤에서부터 손을 들어 뺨을 내리쳤다. 그 떠밀리는 힘에 바닥에 쓰러진 순간, 바닥이 달라졌다.
“네가 우리 가문을 말아먹을 작정이었더냐! 샤리에가 그리하라고 시키더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 아니 반문도 하기 전에 발길질이 날아왔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쓰레기 같은 년놈들!”
둘째 숙부, 안드레아의 발길질이 웅크린 작은 몸에 그대로 실렸다.
그야말로 온몸의 뼈를 부러트려 놓을 작정인 듯 힘을 실어 내리찍는 안드레아의 폭력은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안드레아를 그 방 안에 있는 누구도 막지 않았다.
막기는커녕 사람들은 안드레아의 화를 부추겼고, 벨리아는 마치 역겨운 것을 본 듯, 찌푸리고 있었다.
경멸과 조롱. 비웃음.
눈을 감고 싶은데 감기지 않았다.
꿈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으나, 깰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통증은 없으나, 그 시선과 목소리가 심장을 난도질해 놓는 것만 같았다.
‘싫어.’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절대. 다시는.
그 끔찍한 시절로.
“싫어.”
제발, 누가 나 좀 살려 줘.
간신히 고개를 저으며 흐릿하게 낸 소리에 그 순간 온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래, 기회를 주마.”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손.
안드레아 숙부도, 고아원 원장도 보이질 않는 그 금빛 온기에 간신히 손을 움직여, 눈앞에 보이는 손을 움켜쥐었다.
나도 살고 싶어.
살고 싶어.
행복하게 살아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