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90)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90)화(90/141)
해가 짧은 초겨울의 하늘답게 일찍이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귀가를 재촉하는 어둠과 서늘한 밤공기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졌고, 다닥다닥 붙어 높게 솟아오른 굴뚝 위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온기라고는 창문에서 흐릿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전부인 그 거리 한 귀퉁이에서 검은 연기가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타닥타닥-
나뭇결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 불이야!”
화마가 순식간에 작은 집 한 채를 집어삼키며 맹렬하게 솟아올랐다.
“아, 아이쿠! 저걸 어째. 불이야! 불!”
“저긴 저, 어린 것들만 사는 곳인데!”
“물이라도 뿌려야지!”
“뭣들하고 있어요! 애들부터 구해야지!”
불에 타들어 가는 집을 넋 놓고 바라보며 발을 동동거리던 사람들이 사내의 외침에 저마다 물동이를 가져와 우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리 다급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사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문을 빤히 바라보던 두 개의 그림자가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이내 스윽 몸을 돌려 사라지듯 빠르게 움직였다.
* * *
‘불이야!’
순간,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목소리에 걸음을 뚝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계단 위쪽에는 아무도 없었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화염이나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능인가?’
어딘가에 불이 난 건가 싶어 숨을 크게 몰아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이상하네.
환청 같은 소리가 들리고 나면 항상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그 아래에서 바삐 오가는 사용인들뿐이었다.
“아기씨?”
그리고 곁에 서 있는 린지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 눈을 깜박이며 꽉 쥔 양손을 펼쳤다.
‘이능이니?’
하지만 내 물음에 답을 하듯 금빛 가루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온몸을 꽉 채우는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그 특유의 느낌도 없었다.
잘못 들은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렇다기엔 너무 또렷한 목소리였다.
‘예민해진 건가.’
그렇다고 그냥 넘겨 버리기엔 뭔가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잠잠한 이능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 어지러웠어. 가자.”
대충 둘러대곤 계단을 마저 내려가 만찬장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섰다.
“린지 님!”
하지만 한 발 채 떼기도 전에 저 뒤쪽에서 린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들어온 하녀 중 하나로 보이는 이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자, 양손을 꽉 맞잡은 채 린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하녀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뭐 문제 생긴 모양이네.’
요 며칠 린지가 바쁘게 움직인다 싶더라니,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었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존재.
“만찬장 바로 앞이니까, 혼자 갈 수 있어. 갔다 와.”
“…예.”
하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린지가 내 말에 의심조차 없이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따라 들어갈게요.”
“응, 그 전에 헤일이 돌아오면 헤일 들어오라고 하구.”
“네.”
린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몸을 돌렸다.
바삐 움직이는 린지의 뒷모습에 작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저리 서툴러서야.’
제가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 건지 너무 훤히 드러나는 린지의 얼굴에 혀를 끌끌 차며 만찬장으로 걸어갔다.
만찬장으로 향하는 긴 회랑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고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내 인생길 같달까?
‘아니지, 내 인생길은 짧으니까.’
그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오늘 과연 저 만찬장에서 나오는 순간 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회랑을 천천히 지나가며 품에 안은 악어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내 편 들어줄 아빠가 있었다면…….
‘아니야.’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아빠의 얼굴을 지우듯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빠가 알아봐야 속상하기만 하지.
그리고 이 정도 일은 나 혼자도 해결할 수 있었다.
난 나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숙모들이 만반의 준비를 한 것처럼 나도 만만찮게 준비하지 않았던가.
“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성큼 걸음을 내디딘 그때-
“야.”
누군가의 부름에 만찬장과 뒷동을 연결하는 왼쪽 복도에서 고개를 돌리자 횃불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제이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슨?’
단짝 챈들러와 제 엄마는 어디로 간 건지 숨어 있던 것처럼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제이슨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
“그래,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렇긴 하지.
“왜?”
또 무슨 난리를 치려고.
설마 헬렌 숙모가 얘까지 이용하는 건가? 싶어 경계하듯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그런 내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뒤쪽을 흘끗대다 다급히 내 앞으로 다가온 제이슨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네 하녀가 네 방에서 뭘 가져왔다고 했고, 엄마가 돈도 줬어.”
“…뭐?”
앞뒤 상황을 다 자르고 다짜고짜 하는 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제이슨은 제가 한 말에 대해 설명까지는 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뒤쪽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다급히 나를 지나치려다 말고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리 혀, 형을 조심해.”
우리 형이면, 알레프?
헬렌 숙모에 대한 건 그렇다 쳐도 알레프를 언급하는 그의 뜻 모를 말에 몸을 돌렸다.
“제…….”
“야! 제이슨!”
그는 이미 만찬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고 남은 건 제이슨을 긴장시킨 발소리의 주인인 챈들러뿐이었다.
날 보자마자 얼굴을 구기는 그의 표정에 나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알레프를…….
조심해?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에 그가 사라진 만찬장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레샤.”
“…….”
‘제이슨이 말한 게 뭘까.’
챈들러가 내 어깨를 퍽 하고 치고 지나가고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나를 챙겨 만찬장으로 들어온 건 리리아나였다. 하지만 지금 내겐 리리아나의 부름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설마 헬렌 숙모가 제이슨까지 이용한 걸까?
‘아니야.’
그건 아닐 거다.
헬렌 숙모 같은 완벽주의자가 어리숙하고 실수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제이슨에게 무슨 역할이든 맡겼을 리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제이슨이 내게 해 준 말로 헬렌 숙모가 얻는 이득이 없었다.
‘나를 실수하게 할 작정이라면 몰라도.’
내가 몰래 숨기려는 것이 있다면,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들키지 않게 옮길 거라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실수하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야.’
그것도 맞지 않았다.
제이슨이 ‘찾고 있어.’라고 했다면 내 가정이 옳겠지만, 분명 제이슨은 내 하녀들 중 하나가 어떤 물건을 헬렌에게 가져다줬다고 했으니까.
‘엄마가 돈도 줬어.’
빠르게 속삭이던 제이슨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가정만 남았다.
제이슨이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왜?’
그래, 그가 나를 도우려고 했음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타당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이슨이라면 전생에서부터 챈들러랑 같이 나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하던 아이가 아닌가.
이번 생에서도 나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혼이 난 것도 여러 번이라 억하심정을 가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리리아나에게 듣기론 며칠 전에 내가 호수에서 구해 준 일로 챈들러가 제이슨을 교묘하게 괴롭히고 있다고 했는데.
‘그럼 나를 미워해야 맞지 않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심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맞은편에 앉은 제이슨을 빤히 보자, 그가 의식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아래로 파묻었다.
‘설마 내가 구해 줘서, 그런가?’
잠깐만.
제이슨이 그런 은혜를 안다고?
눈을 깜박였다.
세상에.
그래, 솔직히 우리가 정상적인 관계이고, 쟤가 정상이었다면 그게 가장 타당한 이유이긴 했다.
하지만 저 제이슨이 은혜를 안다니.
‘놀랍네.’
제이슨의 다갈색 정수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구해 준 보람이 있긴 하네.
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마음은 없다만.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리리…….”
“레티시아.”
하지만 그런 내 시선을 잡아끌 듯 나를 부른 알레프가 생긋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할아버지와 닮은 푸른 눈에 헬렌 숙모와 같은 다갈색 머리칼을 잘 빗어 넘긴 그는 전형적인 귀족 영식의 자태였다.
그것도 아주 잘 자란.
“웅, 알레프 오빠두 잘 지냈어?”
“…….”
그 순간, 내가 오빠라고 부를지 몰랐던지 헬렌 숙모의 날 선 시선이 내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윈드런 숙부는 이미 술에 취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아니,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지, 뭐.
도련님이라고 불러 줘? 아니면 알레프 에시어 님?
그들이 대체 뭘 바랐던 건지 알 수 없어 그 불쾌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되레 해맑게 웃자-
“히야, 이능이 대단하긴 하네.”
내 오른쪽에서 레오나르도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족들 다 모인 자리에서 레티시아 목소리도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