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92)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92)화(92/141)
“가주님을 뵙습니다.”
로플렝 남작이 뒷덜미에서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리리아나가 질색하며 얼굴을 찌푸렸고, 이는 미쉘 고모도 다를 바가 없었다.
뒤룩뒤룩 살이 찐 그의 뒷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러운 탐욕 덩어리처럼 보였으니까.
“그래, 할 말이 있다고.”
“예, 가족분들이 모두 모이신 식사 자리임을 알고 있음에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말끝을 슬쩍 늘이며 웃은 그가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안드레아와는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사전에 말을 맞춘 모양이었다.
현명하네.
두 사람의 찰떡 같은 쿵짝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 급한 일이라면 그럴 수 있지.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인지.”
할아버지의 순순한 말에 침을 꼴깍 삼킨 로플렝 남작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내게 미안해하는 의미는 아닌 듯했다.
그냥 ‘쯧, 불쌍한 것.’ 이 정도?
내가 자기들의 희생양이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초리였다.
“오네의 뒷골목에서 들려오는 에시어에 대한 소문이 하도 수상쩍고 믿기가 어려워 제가 직접 알아보았사온데, 아무래도 레티시아 님께서 베넷을 이용해 가문의 돈을 허락 없이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뭐? 이런!”
“세상에-”
벌떡 일어난 안드레아와 그런 그의 곁에서 이마를 짚은 벨리아가 연극배우처럼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응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할아버지가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필립을 향해 ‘베넷 불러와.’라며 손짓했고 이어 로플렝을 빤히 보았다.
“얼마나.”
“금화 100개입니다.”
“금화 100개.”
로플렝 남작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자신감이 붙은 건지 마른침을 꼴깍 삼킨 로플렝이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뿐만이 아니라 베넷이 개인적으로 가문의 돈을 횡령한 정황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더군요.”
“내 그럴 줄 알았지!”
로플렝 남작의 말에 테이블을 ‘탕!’ 하고 내려친 안드레아가 소리를 높였다.
“보십시오, 아버지. 제가 뭐라 했습니까.”
“…….”
“그 평민 놈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셨다, 그러지 마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가문의 재산이나 훔쳐 먹는 쥐새끼 같은 놈.”
누가 누구 보고 쥐새끼라고 하는 건지 모를 안드레아의 말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제가 못 미더우셨다면, 차라리 방계들에게 주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에시어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에시어가 아닌 자에게 너무 과한 권한을 주셨어요. 그러니 이런 일이…….”
“둘째야.”
하지만 안드레아의 말을 자르듯 할아버지가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명백한 무시에 안드레아가 시근덕거리며 입술을 씹자 벨리아가 그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며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예, 아버님.”
“레티시아가 금화 100개를 써서 노예를 사들였다고 했더냐.”
“예.”
“그래.”
벨리아에게 상황을 확인하듯 되물은 할아버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구나.”
“……예?”
순간 벨리아가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그 노예는 레티시아가 아니라, 베넷이 사들인 것일 테고. 또한.”
할아버지가 로플렝 남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돈은 내가 베넷에게 준 것인데 횡령이라니.”
“그, 무슨.”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벨리아가 고개를 들자, 내게 시선을 빤히 고정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내 허락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 * *
며칠 전.
쿵!
“아기씨!”
다짜고짜 할아버지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는 내 행동에 놀란 필립이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할아버지한테 빌어야 할 타이밍이었으니까.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실직고하자, 서류를 살피던 할아버지가 안경 너머로 내 모습을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오금이 저리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일어나 앉아.”
“꿇을래요.”
“그런다고 네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무릎을 꿇든, 앉아 있든 잘못을 했으면 벌을 줄 거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일어날 수가 없는걸.
해서 고개를 들고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말해 보아라. 무슨 잘못을 했더냐.”
“할아버지 몰래 밖에 나가서 불법 경매장에 갔어요. 가서 물건도 사고 금화 100개 주고 노예도 샀어요.”
“…….”
“잘못했습니다.”
돌려 말하는 거 하나 없는 정공법에 할아버지와 필립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모르셨던 모양이었다.
‘베넷이 진짜 말 안 했나?’
의외였다.
뭐 나도 말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자수하러 온 거였지만, 그래도 진짜 말을 안 했을 줄이야.
그럼 그 돈은 진짜 베넷이 낸 건가?
베넷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 때쯤-
“그게 다냐?”
머리 위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같잖다는 듯한 말투였다.
“네.”
“그럼 알았으니 나가 보아라.”
“…….”
벗었던 안경을 다시 올려 쓰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설마.
“알고 계셨어요?”
“몰랐을 거라 생각했더냐.”
하긴 벨리아와 헬렌 숙모도 아는 걸 할아버지께서 모르고 계신다는 게 한편으로는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 귀족 집안에서 아이들을 구해 내지도 못했겠구나.
베넷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뒤에 있으니 대단한 거지.
‘권력 최고다.’
눈을 반짝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 태연한 행동에 할아버지가 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용서를 더 구하지 않을 셈이냐.”
“네.”
크게 끄덕이는 내 말에 할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지?”
“제 덕분에 다른 노예들도 구했고, 황후 쪽 돈줄인 귀족 팔도 자르셨잖아요.”
“…….”
맹랑한 내 말에 나를 빤히 보던 할아버지가 파앗 하고 웃었다.
“그러니 잘한 것이다?”
“어린 제가 혼자 그렇게 밖에 나간 건 잘못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자 내 머리 위에서 할아버지의 물음이 이어졌다.
* * *
‘가서 그 노예 말고 또 무얼 샀느냐.’
“아버님, 물론 믿기 어려우실 테지만, 이런 행동까지 두둔하시면 아이의 버릇이…….”
짧게 스치는 며칠 전의 기억을 끊어 내는 벨리아 숙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치 하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몰아쉰 벨리아가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하녀를 향해 손짓했다.
“제가 정말 이런 것까지는 공개하지 않으려 했는데.”
망설이는 듯한 대사와는 전혀 다른 반짝이는 눈빛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벨리아 숙모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하녀로부터 기다랗게 둘둘 말린 가죽보를 건네받은 벨리아 숙모가 나를 보았다.
“며칠 전, 레티시아의 침실을 치우던 하녀가 발견하고는 제게 가져온 것이랍니다.”
아하.
벨리아의 의기양양함에 고개를 돌려 제이슨을 보았다.
제이슨이 말한 게 저거였던 모양이었다.
“사라졌다던 웨르시펠이요.”
벨리아 숙모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가죽보를 천천히 풀며 할아버지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샤리에 님의 물건이니 아이가 갖고 싶어 하며 그 험한 곳에 갔을 수는 있지만, 그것과 노예를 사들인 건 별개가 아니겠습니까.”
테이블 위에 웨르시펠을 올려놓은 벨리아가 턱을 올려 들었고-
“구거 진짜 아닌데.”
의자에서 폴짝 내려온 난 총총 걸어 할아버지 앞에 놓인 단검을 집어 들었다.
“이거 가짜 칼인데.”
“뭐, 뭐?”
“이거 진짜 아니구, 아빠가 가짜로 만들어 준 거. 오네 집에서 가져온 건데. 봐 봐요.”
칼자루를 꼭 쥔 채 벨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 벨리아의 행동과는 달리 단검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 내 손등 위에서 이능이 일렁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이게.”
당황한 벨리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하녀를 응시했다.
‘헬렌 숙모가 아니고 하녀를 보는 거 보면.’
아무래도 헬렌 숙모가 직접 움직여서 검을 전해 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지.
어쨌든 둘 다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그리고 아주 딱 알맞게 헤일이 만찬장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 역시 나쁘지 않은 걸 보니,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타이밍 딱이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그 경매장에서 이 물건을 사 간 게 작은 계집아이였다고.”
벨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빤히 보다 이내 검을 빼앗았다.
“아버님, 다른 이능력자를 불러 주세요.”
* * *
하지만 벨리아 숙모가 바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웨르시펠이 아닙니다.”
당연하지.
진짜는 내가 아주 안전한 곳에 모셔 놨으니까.
한마디로 숙모들은 헛수고만 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제이슨이 말을 해 주었을 때도 하녀가 내 방에서 무엇을 가져간 건지 대충은 예상 가능하기도 했고.
‘쟈이든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고 있는데, 웨르시펠에 대해 모를까.’
그리고 내가 웨르시펠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 날 거기 있었다는 증명도 될 테니 너무 당연한 추론이었다. 물론 이건 내가 대략적인 상황을 다 알고 있고, 할아버지가 내 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할아버지께서 날 믿어 주지 않았다면, 난 꼼짝없이 추잡한 일을 벌인 6살 난 아이가 되어 가문에서 쫓겨났을 거다.
전생에서 후계의 자격을 박탈당했던 그 날처럼.
날 믿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다르잖아.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지금은 할아버지도 나를 믿어 주고 계시고, 리리아나도 있었다.
그리고 곧 베넷도 올 거고, 헤일도 곁에 있었다.
여전히 절대다수가 나를 적대시하고 있었지만, 이만큼이나 내 편이 생긴 것이 이전의 삶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러니-
“숙모가 잘못 아신 거예요.”
당당하게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니, 내어도 괜찮았다.
“전 에시어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