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95)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95)화(95/141)
“그저 규모가 큰 재정을 관리하는 게 손에 익지 않아 잠시 실수한 것일 테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셔요.”
벨리아를 두둔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으나, 실상 그 안의 내용을 따져 보자면 결론은 그녀의 능력이 부족해 레티시아의 돈까지 손을 댄 것이라는 말이었다.
“공작가와 백작가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백작가에서 귀하게만 자라 이런 일은 할 줄 모른다고 말이다.
‘하!’
노골적으로 그녀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닌지라 화를 내거나 따져 물을 수는 없으나, 눈치가 아예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무시였다.
‘이제 발톱을 드러내시겠다?’
자그마한 틈을 보이기가 무섭게 제 자리를 차지하려 마고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헬렌을 보며 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고 채근하려 하였는데-
어쩌면 그녀는 제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내 뒤통수를 이렇게 치시겠다.’
양손으로 움켜쥔 손수건을 찢을 듯 조여 잡은 벨리아가 헬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넘기려면 헬렌의 말을 받는 수밖에는 답이 없었다.
‘내, 이 상황만 넘기고 나면.’
절대, 결단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한 벨리아가 금세 낯빛을 바꾸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아버님.”
“…….”
“조금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부족한 걸 알면 물러나야죠, 형수님.”
입술을 말아 문 채 납작 엎드려 있던 벨리아가 걸쭉하게 취해 헛소리를 하는 윈드런을 빤히 노려 보았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윈드런을 자제시켰을 헬렌도, 알레프도 오늘만큼은 마음을 먹은 듯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것들이!’
아주 작정을 했구나 싶어 고개를 쳐들자-
“취했으면 조용히 있어.”
내내 못마땅한 얼굴로 앉아 있던 안드레아가 윈드런에게 면박을 주며 미간을 좁히자, 발끈해 일어서려는 윈드런을 막듯 헬렌이 어깨를 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쯧.”
그 모습에 혀를 쯧 하고 찬 안드레아가 벨리아를 향해 고개를 들어 짧게 끄덕였다.
얼른 상황을 마무리하라는 듯한 그의 신호에 손수건을 세게 움켜쥔 벨리아가 마고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예, 아버지. 고작 그런 실수로 벨라를 나무라시는 건 옳지 않아 보입니다. 그거 돈 몇 푼 된다고. 지금이라도 제가 두 배로 채워…….”
탕!
거들먹거리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안드레아의 태도에 마고가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어린 조카를 두고 고작 금화 100개에 횡령과 불법을 운운하던 네 놈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듯하구나.”
“아버님!”
자신의 말에 발끈해 고개를 드는 안드레아를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둔 마고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모두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마고가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 마고의 모습에 서로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가리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울먹이며 ‘죄송해요, 아버님.’라 말하고 나서야 만찬장을 나선 벨리아까지 모두 떠나고.
“쉐이드.”
한참 만에 홀로 남은 마고가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에시어의 그림자들을 불러냈다.
“헬렌 님께서 엘린을 직접 만나신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그 아이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습니다. 불이 났더군요.”
‘그 아이를 지켜 줘야 해요!’
간략하게 보고를 하는 그림자들의 목소리에 레티시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겹쳐졌다.
‘설마 했는데.’
“누구의 짓이더냐.”
“벨리아 님과 헬렌 님 두 분 모두 연관이 있어 보였습니다.”
쉐이드의 목소리에 마고가 고개를 돌렸다.
“벨리아 님께서 고용한 용병들이 헬렌 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
쉐이드의 말에 마고는 헛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평소 제 막내며느리가 욕심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다만, 사람을 해치는 데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을 줄이야.
“뒷문과 앞문을 모두 지키고 있었던 걸 보자면 죽일 작정은 아니고, 집 밖으로 나오게 할 목적이었던 거 같습니다.”
“…….”
쉐이드의 말에 마고가 눈을 감았다.
‘너무 안일하게 내버려 두었어.’
내부의 문제는 모두 보고받아 파악하고 있으니, 충분히 통제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레티시아의 계좌는.”
“벨리아 님의 허락하에 안드레아 님의 수하인 테오가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마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넷이 고개를 숙였다.
“이건 제 불찰입니다.”
“…….”
“굳이 부딪힐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한 것이 화근이었던 모양입니다.”
베넷이 입술을 깨물었다.
“송구합니다.”
재차 이어지는 베넷의 사죄에 마고가 손을 내저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었으니까.
솔직한 말로, 레티시아에게 이능이 보이지 않았다면 자신의 시야에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을 아이였다. 냉정하다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랬으니 벨리아가 그런 짓을 마음껏 저지를 수 있었겠지.
‘샤리에가 후계자가 되면 끝날 문제건만.’
고집을 부리는 샤리에를 떠올리며 심란함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자 베넷이 고개를 들었다.
“허면 아기씨에 대한 건 어찌할까요.”
“무엇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두 부인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를요.”
‘샤리에를 견제하기 위함이겠지.’
그 이유야 뻔하지.
샤리에의 딸인 레티시아가 후계의 자격을 얻게 되고, 그녀가 후계가 되고자 한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테니까.
샤리에가 제 딸을 위해 형제들을 제치고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아이의 이능이 뭔지도 모르고.
솔직히 아이의 명줄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이능 발현을 막거나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걸 거부했고, 아이의 이능은 이미 발현되어 버렸다.
‘시간이 가고 있다.’
20살이라는 나이가 애석하지만.
샤리에의 능력에 레샤의 이능이 더해져 에시어가 더 위대해진다면-
‘아이를, 샤리에를 사랑해 줘요, 마고’
‘깊이, 소중하게 대해 주세요.’
아비가일이 남긴 유언 중 하나는 들어줄 수 있을 거였다.
소중히 대해 줄 수는 없었지만, 제가 샤리에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애정과 사랑.
‘애비, 내가 당신의 아들을 꼭 가주 자리에 앉힐게.’
‘당신의 아들을 꼭 에시어의 가주로서 이 나라의 정점에 올려놓아 줄게.’라고 죽어 가던 그녀의 손을 붙잡고 울며 했던 그 말.
그 말은 지키고 싶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제가 여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샤리에에게 제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
그게 마고가 샤리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샤리에에게 이번 상황을 상세히 알려라.”
그가 돌아와 난리를 칠 게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이런 상황을 다 알게 되면 제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단단히 먹겠지.
레티시아에겐…….
‘할부지!’
‘앞으로 할부지 고기 금지, 술 안 대여. 맨날 산책도 해야 해.’
‘잠두 자야 해요. 피곤하면 안 돼. 일도 그만하셔야 해요, 일 많이 하고 신경 많이 쓰면 몸 아픈 거래요.’
제 건강을 챙기며 해맑게 웃던 레티시아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에서 시작된 싸한 통증이 온몸으로 번지는 것만 같았다.
남은 살리려 아등바등하면서 저 살 궁리는 떠오르지 않는 걸까.
‘젠장.’
‘아이의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없는 것이냐.’
‘이미 발현이 시작되어…. 송구하지만, 없습니다.’
‘…….’
‘차라리 서둘러 오네로 가서 그 이능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에시어에게나 테파로아 제국에게나. 아기씨 개인에게는 불행이겠지만요.’
올가의 차갑도록 현실적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미 발현된 이능을 없앨 방법은 인간 따위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신께선 무슨 생각이실까.’
순간 내쉬는 숨결 사이로 시큰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른 마고가 고개를 들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에 얼굴이 희게 변한 그 순간-
“가주님!”
그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챈 쉐이드와 베넷이 가깝게 다가섰다.
“포, 폴을 불러오겠습니다.”
“…됐다.”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려는 베넷을 붙잡은 마고가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시큰거리며 저릿하게 퍼지는 심장의 울림이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 때문인지, 아니면 제 병 때문인지 쉬이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 아이를 이용하는 게 옳은 것인가.
근원적인 물음에 가느다란 숨이 터지고, 이어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
“가주님, 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숨을 툭 하고 내쉰 그 순간, 딱 맞춘 듯 폴의 방문을 알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눈앞이 까맣게 변했고,
“가주님!”
이어 귀로 들리는 건, 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뿐이었다.
‘이 상태로 죽어서는 안 돼.’
애비.
아비가일.
내 사랑.
내게 조금만 시간을 줘.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조금만.’
* * *
‘레티시아 아기씨의 명이셨습니다.’
마치 짜 맞춰 놓은 듯한 폴의 등장이 의아할 새도 없이 마고를 치료한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공작가에 들어와 대기하고 있으라 하더군요.’
‘마침 익투스 치료제가 완성 단계라 가주님께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싶어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약효가 있는 듯합니다.’
안도에 숨을 푹 하고 내쉬던 폴의 얼굴을 떠올리던 베넷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그저 다행일 뿐이라고.
가주님께서 쓰러지신 순간, 그 매우 적절한 시기에 맞춰 폴이 들어왔고 치료제가 개발되었음이 다행이라고.
‘운이 좋았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과연 전부 운이고, 우연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