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96)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96)화(96/141)
‘그럴 리가.’
이걸 단순히 운이 좋고, 우연의 일치라 말하기엔 모든 상황이 레티시아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갔다.
벨리아와 헬렌은 실각했고, 레티시아는 자신의 계좌를 되찾았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 여전히 벨리아로부터 레티시아의 재정이나 여타 처우가 좌우된다면, 그녀의 삶이 어찌 되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거기다 그녀가 저택을 떠나 있는 동안 벨리아와 헬렌은 서로를 견제하며 끊임없이 싸우게 될 거였고, 그 누구도 완벽한 에시어의 후계로 부상하지 못할 터였다.
‘가주님께서 황도를 떠나 계신 상황에선 더더욱.’
만약 그걸 노리고 그 날 가주님에게 먼저 찾아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소상히 고백한 거라면-
‘영리한 행동이었지.’
그런 상황에서 안드레아와 윈드런 부부의 민낯까지 드러나게 했으니.
레티시아와 샤리에가 가문을 떠나 있는 지금, 후계 자리를 차지할 이는 나타나지 않을 거였다.
근데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그럴 리가.’
한참 창밖을 바라보며 멀리 동이 터 오르는 걸 보던 베넷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만 유리한 우연은 존재할 수 없지.’
그녀가 짜놓은 판이 아니라면.
하지만 고작 6살.
‘아기씨의 이능이 대체 뭘까.’
단순한 예지는 아닌 건가.
그저 미래를 보는 데 그치지 않는 그녀를 떠올리자, 기대감에 심장이 기분 좋게 박동하는 게 느껴졌다.
레티시아가 꿈꾸는 건 무엇일까.
그가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 판을 전부 레티시아가 짠 거라면, 그녀의 생각을 제가 가늠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직접 여쭤봐야 하나.’
‘묻는다 하여, 말씀해 주실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복잡한 머릿속을 가득 메운 그때-
똑똑.
나직한 노크 소리와 함께 페일런이 안으로 들어섰다.
“부관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래, 곧 가지.”
“그리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베넷의 앞에서 길게 숨을 몰아쉰 그가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딱딱하게 굳어진 심상찮은 표정에 베넷 역시 별다른 말없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 * *
“할부지가?”
“네, 직계 2세분들과 집 안에 남아 있는 3세분들을 모두 부르셨대요.”
린지의 말에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리 이른 시간에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으신 거면.
‘어제 일에 대한 결정이구나.’
떠나기 전에 매듭을 짓고 가실 모양인 듯했다.
“알겠어.”
해서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할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채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벨리아 숙모의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채 살림은 본디 공작부인의 몫이 아닙니까. 공작부인이셨던 어머님께서 제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걸 어찌 저자에게.”
헐.
안채 살림에 대한 권한을 전부 빼앗으신 거야?
대박.
그저 그녀가 가진 권한을 분산시키기만 해도 성공이겠다 싶었는데, 의외의 수확이었다.
벨리아 숙모가 안채 살림을 맡는다는 건 그녀의 남편이 가문의 후계자라는 의미였는데, 그 상징을 빼앗긴 거였으니까.
이건 솔직히 숙모의 전부를 빼앗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명확히 하시려는 거구나.
물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처럼 이 일로 인해 벨리아 숙모와 헬렌 숙모가 더 단단히 뭉칠 수도 있겠다만.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지.’
뭉치기엔 이번 일로 두 사람 사이의 골이 너무 깊어졌으니까.
벨리아 숙모는 제 앞에서 발톱을 드러낸 헬렌 숙모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고, 막내 숙모 또한 그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전략적으로 손을 잡는다 한들 어찌 되었든 끝은 정해진 거였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에시어의 가주.
물론 벨리아는 제 남편의 자리로 보고 있었고, 헬렌은 제 아들의 자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다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하나뿐인 그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 하니 결말은 파국이 아니겠나.
어쩐지 나도 모르게 흐흐 웃어 버릴 것만 같아 입 안의 여린 살을 애써 씹으며 조용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벽에 붙어 섰다.
“다시 재고해 주세요, 아버님.”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탓인지, 숙모와 숙부들은 내가 들어온 것도 알지 못했다.
“예, 이건 에시어의 기강이 달린 문제입니다, 아버지. 제가 고작 평민 따위에게 돈을 받아 쓸 수는 없…….”
“받아 써야 한다면 그리 해야지.”
“아버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쳐든 안드레아가 미간을 좁혔다.
“가문 장남의 면을 이렇게 깎아내리실 수는 없는 일…….”
“네가 다 큰 모양이구나. 장남의 면을 생각해 주는 걸 보니.”
“……예?”
순간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안드레아가 이내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이에 별다른 반박도,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뿐.
족보에 올라가 있는 가문의 장자는 자신이 아니라, 샤리에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안드레아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고개를 돌린 할아버지가 뒤쪽으로 한참 물러서 있던 나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레티시아에 대한 것 또한 내가 책임지마.”
아빠가 계시지 않는 상황에선 할아버지가 보호자라는 소리였다.
에시어의 가주인 할아버지가 내 뒷배가 되어 준다니.
이 집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3세들에겐 더더욱.
“아버님!”
그렇기에 내 오네 행을 막으려던 숙모들의 입장에선 지금 이 상황은 전혀 달갑지 않은, 아니 달가운 정도가 아니라 최악일 거였다.
후계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였으니.
“아직 어린 레티시아에겐 어미의 손이 필요할 겁니다. 제가 살갑지는 않아도 그래도 기른 정이…….”
필사적으로 나를 자신의 곁에 두려는 벨리아 숙모의 목소리가 가늘게 이어졌지만 할아버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내 아이에 대한 건 베넷에게 그때그때 전해 받겠으나, 내 영지에 있는 동안은 살갑게 챙기지 못하겠지.”
“그러니 이제껏 해 온 대로 제가…….”
“해서 벨리아와 헬렌, 두 사람 모두에게 동시에 책임을 지울 생각이다.”
“예?”
순간, 뒤로 물러서 있던 헬렌까지 소환하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할아버지에게로 향했고, 이어-
“만약 내가 영지에 가 있는 동안 레티시아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직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두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물어 너희의 남편이나 자식의 후계 자격을 영원히 박탈하고, 내 대는 문을 닫을 것이야.”
“무, 무슨.”
“아버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묻는 그들의 날 선 목소리에도 할아버지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에시어는 방계가 이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 앞에 놓인 알량한 것을 지키려면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할아버지 나름의 경고였다.
그리고-
“데려오거라.”
그 경고에 쐐기를 박듯, 할아버지가 포박 상태로 재갈을 문 두 남자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
숙모들의 얼굴이 희게 질려 가는 게 보였다.
벨리아뿐만 아니라 헬렌도.
‘저자들이구나.’
리안네 집에 손댄 자들.
그리고 펠을 협박한 이들.
그런 그들을 고용한 이들까지.
그 뻔뻔한 얼굴을 빤히 보며 주먹을 쥐자-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벨리아와 헬렌을 향한 나직한 경고가 이어졌다.
이 정도로 그들을 내칠 수는 없으셨던 모양이었다.
내가 바란 것도 그들이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보다 더한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들 것이다.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저들이 굳건히 저 자리를 지키고 서서 다른 이들을 견제해 주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오네에서 힘을 기르는 것도 수월해질 테니까.
벨리아와 헬렌 두 사람을 모두 실각시킨 것으로 충분했다.
계좌를 되찾았으니, 이제 오네에 가서 쓸 일만 남았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그곳에 가면 아빠를 도울 길이 더 잘 보일 거다.
그러니 빨리 나가야 해.
시간이 없어.
머릿속으로는 ‘12년은 길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조급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리안이도 있고.
쟈이든도 있고.
그리고 돈도.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쭉 그리듯 목록을 늘어놓자-
“처리해.”
“예, 가주님.”
“읍! 으븝!”
할아버지의 ‘처리해.’라는 말의 무게감을 아는 건지 사내들이 격렬히 저항하듯 고개를 저었다.
죽이지는 않으실 텐데.
그래도 삶이 편치는 않을 거란 생각에 가볍게 혀를 차자 할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셨다.
“레티시아는 오네로 갈 준비를 끝냈느냐.”
할아버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이목이 순간 나를 향했다.
각양각색의 감정을 담고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에 턱을 살짝 올려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네로 갈 준비는 다시 되돌아왔던 그 날부터 되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