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of the Duke of Essia RAW novel - Chapter (97)
에시어 공작가의 레이디 (97)화(97/141)
벨리아 숙모는 할아버지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권한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는 건 엄연히 자신의 의지가 들어간 표현이었으니 정확히는 빼앗겼다는 말이 더 옳았다.
벨리아 숙모는 어떻게든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 마지막까지 발악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고, 유예할 틈도 없이 권한은 베넷에게 빠르게 넘어갔다.
그리고 이에 제일 먼저 기민하게 반응한 건 사용인들이었다.
하녀장과 집사장뿐만 아니라 안채 살림을 맡아 보던 주방장과 여타 사용인들 또한 벨리아에게 보고하던 것을 베넷에게로 옮겨갔다.
오히려 공평하게 일을 처리할 베넷에 대한 기대감도 존재하는 듯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벨리아가 휘두르던 권력은 가주인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건 헬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헬렌이 계획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나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벨리아가 할아버지의 진노를 사 실각하게 되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꽃놀이패.
이쪽이 이겨도 좋고, 저쪽이 이겨도 좋고.
둘 다 망하면 더 좋고.
어찌 됐든 제게는 해가 될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에시어 장학재단에서 손 떼거라.’
‘아, 아버님!’
할아버지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권한도 일부 제한했다.
에시어 장학 재단.
겉으로는 선대 공작부인께서 헬렌에게 물려주신 거였으나, 이것 역시 할아버지가 그냥 내버려 두신 것뿐. 에시어 장학 재단이 윈드런 에시어의 돈줄이라는 걸 알고 계신 듯한 처결이었다.
그렇게 벨리아 숙모와 헬렌 숙모가 대부분의 권한을 잃고, 그 권력의 대부분이 에시어의 가신들에게 분산된 상태에서 할아버지는 영지로 내려가셨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하라며, 아빠가 준 마도구와 똑같은 걸 쥐여 주곤 재력을 과시하셨다.
‘할아비는 500개 정도 사 놓았으니, 언제든 연락하거라.’
‘아니, 매일 하거라.’
아빠가 가진 100개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500개라니.
새삼 에시어의 어마어마한 재산들을 떠올리다 순간 이를 바득 갈았다.
아니, 대체 얼마나 무능하고 멍청하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산과 권력을 갖고도 이걸 다 말아먹고 가문까지 망하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시류를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말이지.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던데.’
에시어가 순식간에 망해 버린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심해서 진짜.’
한숨만 나오는 숙부들의 무능함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테니까.
이번 생은 다를 테니까.
‘그래, 더는 생각하지 말자.’
내가 바꾸면 되는 거야.
다짐을 새기듯 주먹을 꼭 말아 쥔 채 본관 뒷동을 바라보자,
“아기씨.”
때마침 곁으로 다가온 헤일이 다정히 나를 불렀다.
“아기씨.”
“응, 다 됐어?”
“예.”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헤일의 말에 웃으며 몸을 돌리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커다란 짐마차 두 대에 꽉꽉 실린 내 짐들을 보자니 심란해진 탓이었다.
저 짐들이 다 들어가나?
아빠의 집은 이미 내 짐들로 한가득 차 있었다.
근데 이 짐까지 갖다 놓으면 아빠의 집이 터지지 않을까 싶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은 좀 놓고 가자고 할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헤일 짐이 너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헤일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줄일 거 다 줄이고, 뺄 거 다 빼서 더 안 돼요. 더는 못 줄여요. 안 돼요, 아기씨.”
“하지만.”
“최소한의 물품은 빠짐없이 챙겨 가라는 가주님 명령이세요.”
“……아.”
마법의 단어다.
할아버지 명령.
이걸 거역했다간 영지에 내려가신 할아버지가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었다.
헤일에게도 내 것과 똑같은 마도구를 주시는 거 분명히 봤거든.
나를 위해서라면 할아버지에게 가볍게 고자질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헤일의 저력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어.”
아주 약간 의구심이 들어 찜찜하긴 했지만, 더는 실랑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네 둘 곳 없으면 리안이네 좀 주면 되는 거지, 뭐.
얼른 가서 리안이도 봐야지.
리안이 황실에 들어가기 전에 많이 잘해 줘야지 싶었다.
그렇게 떠날 준비를 마친 짐마차들을 보며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할아버지가 떠나기가 무섭게 저택을 나서는 나를 두고 사람들의 시선이 엇갈렸다만-
괜히 오래 있어 봤자 불똥밖에 더 튀겠어?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도 어차피 나갈 거 빨리 나가라고 하셨고.
‘네 아비의 집으로 갈 테냐.’
할아버지가 따로 마련해 두신 가옥이 있었던 모양인데, 거기보다는 그래도 며칠 지낸 아빠 집이 편할 거 같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출발해.”
* * *
그리고 그렇게 난 오네에 왔다!
드디어!
회귀했음을 알게 되었던 그 날부터 간절하게 바랐던 단 하나의 목적.
‘오네에 가서 리안이랑 친해지기.’
별표 백 개짜리 가장 중요한 목적 말이다.
근데.
휘이잉-
“여기 분명히 집이 있었던 거 같은데.”
휘잉, 하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 앞으로 보이는 건 검게 타 버린 집 모양의 잿더미였다.
여기 리안이 살던 곳 맞는데.
고개를 휘휘 돌려 보아도 여기가 맞았다.
내가 분명 저 앞에서 리안이 손을 잡고 있었고, 리안이가 나를 밀어내던 곳은 그 옆, 내 얼굴 한 번 안 보고 들어가 버린 문도 저기 있었고.
내가 전부 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잿더미라니.
이런 보고는 듣지 못했는데.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 집을 지켜보는 두 남자의 존재는 들어 알고 있긴 했으나, 집이 불탄 건 몰랐다.
설마 여기가 아닌가?
고개를 휘휘 돌렸다.
“헤일, 여기 리안이네 맞지?”
“네, 제 기억에도.”
헤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맞는데.”
하지만 밤늦은 시간이라 오가는 사람이 보이질 않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양옆의 집도 불이 다 꺼져 있었다.
그을려 있는 걸 보니, 불이 번져서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어떻게 찾지?
폴은 익투스 때문에 할아버지를 쫓아 영지로 가고, 피어스도 기사단에 가서 일 봐야 해서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일 피어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은 찰나.
“아기씨, 내일 제가 알아볼게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들어가 쉬세요.”
헤일이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테니, 펠에게 물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리안을 만날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나온 걸 알고 있는 헤일의 다독이는 말에 미련 가득한 눈으로 잿더미를 흘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뭐.
“알게써.”
“착하셔요.”
헤일의 말에 손을 내밀자, 그녀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와 손을 번갈아 보았다.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 뜨는 그녀의 얼굴에-
“이제 헤일, 밖에서는 레샤 사촌 언니.”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오네에서는 평민으로 지내기로 했으니까. 얼른 잡아 줘. 원래 아이는 어른 손을 잡고 다니는 거야.”
집 안에서는 평소처럼 지내더라도 밖에서는 평범하게, 귀족 영애인 걸 들키지 않고 지내는 게 목표였다.
애당초 초대 가주님이 이런 가법을 세운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귀족 후계들에게 평민들의 삶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그들이 뭘 필요로 하고, 귀족의 후계들에겐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그렇기에 저택과 똑같이 지낼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물론 쉽게 익숙해지지는 않겠지만, 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거기다 내가 여기서나 귀족 영애지, 난 이미 찐 평민인 이시아와 망해서 쫓겨났던 전생의 레티시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며칠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금세 적응하게 될 거다.
그러니 헤일과도 이전처럼 지낼 수는 없지 않겠나.
“웅?”
해서 손을 조금 더 내밀어 흔들자, 누구의 눈치를 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을 흘끗 둘러보며 주저하듯 내 손을 빤히 보았다.
그 시선에-
“잘 부탁해.”
“!”
그냥 내가 손을 잡아 버리곤 그녀를 올려다보며 헷 하고 웃었다.
그런 내 미소에 어쩐지 헤일의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헤일의 손을 잡고는 앞뒤로 붕붕 흔들며 집 앞까지 걸어왔다.
초록의 지붕 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헤일이 미리 집 안 불을 밝혀 놓아 그런지 창밖으로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겨울의 추위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전혀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이 추위에 대체 우리 애들은 어딜 갔을까.
“에휴.”
내일 일어나자마자 애들부터 찾아봐야지.
하며 집 앞 작은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 앞에서 발을 툭툭 털었다.
“배고프시죠? 펠이 음식을 해 놓겠다고는 했는….”
끼익-
나를 챙기는 헤일의 목소리 너머 끼익 소리와 함께 들린 인기척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어?”
우리 집과 바로 붙은 옆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리안과 그 뒤의 쟈이든의 모습에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쟤들이 왜 저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