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zy genius striker RAW novel - Chapter (108)
나태한 천재 스트라이커-108화(108/202)
< 107화 – 유로 결승 >
“들러리가 되지 말자. 주인공이 되어 보자고.”
“남의 집을 빼앗는 게 더 재밌는 법 아니겠어?”
휘슬이 울리기 직전.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모인 스페인 선수들은 전투력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결승전을 상대 팀의 홈에서 하게 된 스페인 선수들이다.
다만, 그렇다 보니 더욱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남의 집에서 경기하는 것도 뭣 같은데, 지기까지 한다면 서러워서 살겠나.
무조건 이겨서, 웸블리를 자신들의 것으로 강탈할 생각이었다.
“이아고.”
“바모스.”
“파블로.”
“바모스, 바모스.”
페르난도 비에가와 이아고 퀸테스, 파블로 엔리케가 포옹을 나누며 승리를 다짐한다.
같은 리그에서 뛰고 있긴 하지만, 소속 팀이 모두 다른 셋이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이 셋은 긴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호흡이 좋다.
덕분에 스페인이 유럽에서 가장 무서운 트리오를 보유한 팀이 됐고.
“페르난도. 오늘도 잘 부탁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페르난도 비에가.
비에가에겐 오늘이 올 시즌 두 번째 결승 무대다.
한 번은 챔피언스 리그.
오늘은 유로.
커리어 동안 한 번 밟아 보기도 어려운 무대를, 동시에 서게 된 비에가.
물론 팀 커리어만으로 한 선수의 기량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 대표팀 모두에서 비에가는 핵심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수 전반에 걸친 중원에서의 넓은 활동량.
준수한 피지컬과 라리가 특유의 테크닉.
무엇보다, 천재적인 패스 능력.
비에가가 결장했을 때의 레알과 스페인의 경기력을 보면 알 수 있다.
비에가 하나 때문에 팀이 돌아간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다만, 그런 비에가도 오늘은 쉬운 경기가 될 거라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방금 전, 상대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며 받았던 깊은 인상.
모두가 인상을 쓰고, 손에 힘을 꽉 주며 악수를 건네왔는데, 한 선수만이 아무 생각 없다는 듯한 얼굴로 악수를 했었다.
요한 반.
비에가도 바보는 아니라, 진짜 그런 건지 아니면 척하는 건지는 딱 보면 안다.
녀석은 진짜였다.
오늘 같은 경기에서, 어찌 그렇게 동네 조기 축구회에 공차러 나온 듯한 얼굴일 수 있는지.
녀석은 의식이 되지도 않는걸까.
오늘 경기에 아주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는 것이.
솔직히 그래서 조금은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직사각형의 경기장 안에서라면 그 어떤 상대도 두렵지 않은 비에가지만, 딱 한 가지 무서운 상대가 있다면.
그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대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른 잡생각 없이, 오롯이 90분 동안의 경기 자체에 말이다.
본인조차도 오늘 경기를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었다.
오늘 경기를 이겨서 우승을 차지한다면, 조국이 16년만에 유로 우승을 거머쥐는 것이고.
자기 자신으로서는 국가대표로서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이며, 첫 발롱도르에 한 발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패배한다면.
준우승에 그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이런 경기 외적인 생각들로 쉽게 잠에 들지 못했던 비에가였다.
어떻게 하면 잉글랜드를 더 쉽게 부술 수 있을지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아니, 애초에 생각할 시간에 1분이라도 더 자야 했다.
뭐, 어찌 됐든 만반의 준비를 해온 건 사실이다.
이길 수 있다.
아니, 이겨야 한다.
“삐이이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
<양 팀 선수들의 간격이 상당히 좁습니다.>
<경기장의 절반만 이용하려는 건가요? 중원 싸움이 상당히 치열합니다. 서로 라인을 올리고, 압박을 타이트하게 가져갑니다.>
<초반 주도권 싸움이 중요하겠는데요.>
보통의 결승전은 생각보다 심심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양 팀 모두가 신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경기.
90분 동안의 결과가 대회 전체의 성과를 좌우하는, 결승전.
허나, 오늘은 좀 다른 듯 했다.
시작부터 경기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나 스페인이나, 스타일만 놓고 보면 비슷한 팀들이다.
수비보단 공격 쪽에 무게감이 있고, 중원에서의 패스 플레이를 통해 주도권을 잡고 경기를 하는 타입.
그런 성향의 팀들이 만났고, 서로 자신의 스타일을 양보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으니.
양 팀의 싸움은 하프라인 근처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잭 프라이스! 좋은 탈압박입니다!>
<프라이스도 오늘 설욕해야 하는 날입니다. 웸블리에선 웨스트 햄에게 FA컵 우승을 내줬었고, 스페인의 비에가에겐 챔스 우승을 내줬었거든요.>
전반 초반,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여준 건 맨시티의 잭 프라이스.
해설자들의 말대로 프라이스 역시 오늘, 보다 더 잘 해야 하는 이유가 많다.
그 덕분인지 몸 놀림이 가벼운 프라이스는 맨시티가 라리가 팀들보다도 테크니컬한 팀이고, 자신이 그 팀의 중심이라는 걸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방으로 찔러줍니다! 잘 봤어요!>
<수비 사이를 가로지르는 스루 패스! 요한에게 향합니다!>
상대 수비를 벗겨내는 탈압박에 이어, 날카로운 스루 패스까지 찔러넣는 프라이스.
그러나,
스페인 선수들은 공을 따라가는 대신, 일제히 한 손을 들며 부심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 깃발이 들렸습니다. 오프사이드.>
<느린 그림으로 다시 볼까요. 아, 앞서 있었네요. 패스 길은 정말 잘 봤는데, 상대의 대응이 좋았습니다.>
스페인의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려 무산되는 찬스.
한 몸처럼 움직이며 좋은 라인 컨트롤을 보여주는 스페인의 포백 라인.
사실 요한이 그리 높은 위치에 있던 것은 아니나, 워낙 최후방 라인 자체를 높게 가져가고 있는 스페인이다 보니.
조금의 움직임만으로도 오프사이드가 되고 말았다.
<오늘 계속해서 이 오프사이드 트랩이 요한을 성가시게 할 것 같은데요.>
<라인을 높게 올리는 건 부담이 있는 일 입니다만, 그걸 오히려 잘 활용하는 게 스페인의 수비입니다.>
언뜻 보기에, 스페인은 수비가 휑하다 싶을 정도로 뒷공간을 크게 두고 경기를 풀어간다.
저러다 역습이라도 당하면 어쩌려는건가 싶을 만큼 말이다.
때로는 최후방 수비수들까지 중원에 가담해 상대 미드필더들을 압박할 정도니까.
다만 그렇게 허술해 보이는 것과 달리, 스페인은 실점이 그리 많은 팀이 아니었다.
그 비결은 방금 보여준 것처럼, 오프사이드 트랩을 기막히게 사용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이는 요한을 상대하기에 꽤 잘 맞는 전술이기도 해 보였다.
어쨌든 요한이 아무리 공을 잡기만 하면 못 말린다지만, 심판의 휘슬은 요한도 멈추게 만들 수 있다.
어차피 개개인의 역량만으로 요한을 막을 수 없다면, 팀적인 움직임을 통해 막는다.
이는 스페인이 꽤나 좋은 접근법을 들고 온 것으로 보였다.
<짧은 프리킥으로 경기를 이어가는 스페인.>
오프사이드로 공격권을 따낸 스페인의 반격.
잉글랜드도 중원의 간격을 좁히고 압박의 강도를 높인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한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는 듯 하다는 건데.
그 방향이 왼쪽, 스페인 입장에선 오른쪽이다.
스페인의 코어는 우측이다.
페르난도 비에가가 우측 하프 스페이스를 주 무대로 활용하는 미드필더이고, 이아고 퀸테스가 우측 윙어이기 때문.
그런 스페인의 오른쪽을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잉글랜드의 포진이었다.
의도적으로 왼쪽에 쉬운 길을 만들어 주어서, 그쪽으로 공격을 유도하겠다는 뜻.
그러나,
<계속해서 짧은 패스를 주고 받으며 조금씩 전진합니다. 역시 비에가를 이용하죠?>
스페인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굳이 잉글랜드 선수들로 빽빽한 오른쪽으로 공을 전개시키는 스페인.
아무리 상대 의도대로 움직여 주기 싫다 해도, 굳이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찾아 들어가는 게 좋은 방법으론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 공간을 빠져 나옵니다! 오른쪽을 봤습니다! 퀸테스에게 연결되는 패스!>
비에가가 그걸 뚫어낸다.
유려한 볼 컨트롤과 동료들을 이용하는 원터치 패스로, 좁은 공간 속에서의 강한 압박을 풀어내고 퀸테스에게 공을 연결시키는 비에가.
그 덕에, 퀸테스는 편하게 풀백과 1대1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툭, 툭-!
수비 하나를 앞에 두고, 리드미컬하게 드리블을 시작하는 퀸테스.
퀸테스는 직선적인 드리블보다는,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테크니션.
즉, 프리미어 리그에선 보기 힘든 유형의 드리블러다.
타타탓-!
<어엇! 뚫리면 안되는데요! 깊게 파고드는 퀸테스!>
퀸테스의 낯선 리듬에 온몸으로 난색을 표하는 잉글랜드의 레프트백 대니 화이트.
화이트를 제쳐낸 퀸테스는 박스 우측까지 깊게 파고 들었고,
파아앙-!
중앙을 향해 땅볼 크로스를 올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크로스와 컷백의 중간 형태 같은 느낌이랄까.
퀸테스의 패스는 파블로 엔리케를 향한 것이었는데, 엔리케의 위치가 퀸테스보다 뒤쪽이었으니.
수비를 등지며 자리를 잡고 있던 엔리케는,
파아앙-!
그 공을 다시 뒤로 내줬다.
패스의 흐름을 그대로 살리며, 방향만 살짝 바꿔주는 패스.
그 공을 향해 달려드는 게,
타타탓-!
어느새 올라온 비에가였다.
뻐어어어엉-!
<나이스 클리어! 벨라미가 한발 먼저 터치 라인 바깥으로 걷어 냅니다!>
<벨라미의 판단이 빨랐습니다. 하마터면 비에가에게 슈팅을 내줄 뻔 했어요.>
<하지만, 어쨌든 스페인의 공격 작업이 썩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역시 만만치 않은데요.>
<워낙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스페인의 세 선수들입니다. 패스를 주고 받는 템포가 아주 빨라요.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도 없거든요.>
다행히 비에가가 슈팅을 때리는 일은 없었다.
비에가의 침투를 확인한 첼시 센터백 셰이 벨라미가 한발 먼저 끊어냈기 때문.
그러나,
일단은 여기까지 전개를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긴 했다.
스페인의 공격력, 확실히 무섭다.
첫 공격부터 여기까지 쉽게 올라오는데, 과연 90분 동안 무실점으로 버틸 수 있을까.
<스페인의 스로인. 뒤로 길게 공을 뺍니다. 후방에서부터 다시 만들어가려는 모습.>
<쉽지 않네요. 방금의 공격으로, 잉글랜드가 전체적으로 내려 앉았습니다. 주도권을 내줬다는 거죠.>
어느새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가져간 쪽은 스페인이 되었고, 잉글랜드는 일단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먼저가 되어 버렸다.
확실히, 스페인은 헛으로 결승까지 올라온 팀이 아니었다.
*
<아, 지금도 잘 봤는데요. 부심의 깃발이 올라갔습니다. 벌써 오프사이드만 3개째.>
<패스 타이밍을 조금 더 빠르게 가져갈 필요도 있겠습니다. 스페인의 트랩을 깰 수 있는 빠른 타이밍의 패스 말이죠.>
일단 경기는 스페인의 주도 아래 잉글랜드가 선수비를 하는 형태였지만, 잉글랜드도 마냥 수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비는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역습 각을 보며 날카로운 패스가 전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부심의 깃발이 역습을 저지했다.
잉글랜드의 패스가 나오는 순간, 일제히 뒤가 아닌 앞쪽으로 움직이는 스페인 수비수들의 움직임은 보는 이들에게도 감탄이 나오게 만들었다.
“쫄리지도 않나.”
“아슬아슬하네.”
확실히 대담한 짓이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삐끗해서 반응이 늦을 경우, 오프사이드 트랩은 상대에게 완벽한 찬스를 스스로 내주는 꼴이 되고 만다.
특히나 중앙으로 향하는 패스면 더더욱.
사이드로 향하는 패스라면 트랩이 뚫리더라도 지연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지.
중앙은 트랩에 실패할 경우 그대로 끝이다.
정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인 셈.
그러나 아직까지는, 스페인 수비수들의 집중력이 베일 듯 날카롭게 서 있었다.
“집중! 집중!”
“옆에 봐! 옆에!”
“아스파스! 좀 더 앞으로! 라인 맞춰!”
물론, 그런 스페인 수비수들도 진땀을 흘리고 있긴 했다.
만약 한 번의 실수라도 나온다면, 그 뒤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자명한 사실.
부심의 깃발이 들리지 않고, 요한에게 1대1 찬스가 가는 순간.
허무하게 실점하고 말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오늘 스페인 선수들의 집중력이 더욱 날카롭게 살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흠.”
벌써 세 번째 오프사이드에 걸린 요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을 빼앗긴 것도 아닌데, 공을 두고 돌아서야 한다니 허무할 수밖에 없다.
잔재주나 부리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어이, 꼬맹아.”
“?”
“잠깐 와봐.”
요한을 부르는 셰인 머레이.
머레이는 요한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입을 가리고 말했다.
“하프라인 위로 올라가지 마.”
“하프라인요?”
“그 아래에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
하프라인 아래에 서 있으라는 머레이의 말.
요한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자가 하프라인만 넘지 않는다면, 상대 수비의 위치와 상관없이 오프사이드 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수비 라인을 끌어 올린다 해도 최종 수비가 하프라인을 넘는 일은 거의 없기에, 오프사이드 하나를 피하겠다고 하프라인 밑에서 대기하는 공격수는 없다.
그건 상대 수비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위치 선정일 뿐이니까.
역습을 당하는 상황인데, 상대 공격수가 하프라인 밑에 있다면 뭐가 무섭겠는가?
하지만, 셰인 머레이가 요한에게 그런 말을 한 건, 믿기 때문이었다.
요한의 스피드를.
<이번에도 오른쪽! 아, 그러나 이번엔 화이트가 한발 먼저 패스를 차단합니다!>
<역습으로 올라가야죠!>
<대니 화이트, 셰인 머레이에게! 머레이, 곧바로 전방을 봅니다!>
<아··· 요한의 위치가···?>
이어지는 상황.
스페인의 공격이 차단 당했고, 잉글랜드에게 다시 역습 기회가 찾아왔다.
대니 화이트가 끊어낸 공을 머레이가 넘겨 받았고, 머레이는 곧바로 전방을 향해 패스를 띄웠다.
그런데, 그 패스를 받아야 할 요한은 머레이의 말대로 하프라인 아래에 서 있었다.
물론 그 덕에 부심의 깃발이 올라갈 일은 없다.
다만, 누가 봐도 스페인 수비에게 유리한 경합이었다.
공간을 노린 머레이의 패스는 당연히 스페인 진영으로 향하는데, 수비수들과 요한의 스타트 라인이 수 미터는 차이가 났으니까.
하지만.
요한은 일단 뛰었다.
상대의 잔재주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한결 몸이 가벼웠다.
타타타타타탓-!
<요한이 뜁니다!>
<어어, 빨라요! 빨라요!>
공을 향해 뛰어가던 스페인 수비수들은, 뒤를 흘끗 바라보곤 갑자기 식은땀이 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