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09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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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군주 뤼펠의 마계, 텅 비어 있던 악마성의 옥좌.
파앗!
그 옥좌 위에 작은 구슬이 하나 생겨났다. 그것은 뤼펠의 코어였다. 그 코어로부터 뼈가 돋아나고, 살이 붙어, 어느새 뤼펠의 형상이 되었다.
“끄어어어······.”
그러나 이진혁의 앞에 드러냈던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특히 난도질당한 등의 상처가 심각했다. 더욱이 뿔이 하나 잘려 나갔으며, 무엇보다 그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
빌딩을 연상케 만들 정도로 거대했던 뤼펠의 크기는 지금은 기껏해야 불과 지구인 정도의 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크큭, 그그극!!”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옥좌에서 기어 아래로 내려온 뤼펠은 아직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허겁지겁 악마성의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식자재 창고였다.
원 상태의 뤼펠은 이 식자재 창고에 출입도 하지 않는다.
본래는 악마성 전체가 그의 몸이나 마찬가지라, 그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별다른 스킬이나 능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 인간의 육체로 비유하자면, 그저 숨을 쉬기만 해도 공기가 폐로 들어가 산소를 흡수하고 적혈구를 통해 전신에 자동으로 공급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생명력과 마기를 지나치게 잃은 터라, 악마성조차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말하자면 목숨은 붙어 있지만 심장은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참담한 기분을 느낄 새는 없었다. 뤼펠에게는 더 급한 용무가 있었으므로.
뤼펠은 식자재 창고에 놓인 인류종의 혼을 하나 집어, 급히 씹어 먹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갖가지 방법으로 인류종의 혼이 지르는 고통과 공포의 비명 소리를 음미하며 조리를 마친 후에나 입에 대련만, 지금의 그에게 그런 악마군주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명의 혼을 집어삼켰을까. 아니, 수십 명, 수백 명에 달하리라. 그동안 비축해왔던 혼의 절반쯤을 먹어치우고서야 뤼펠이 먹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구인만 하던 체구도 약간은 커져 두세 배쯤은 되었고, 악마성도 이제 그의 말을 듣기 시작해 자신의 손으로 인류종의 혼을 움켜잡고 먹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컥, 쿠흡. 쿨럭! 후우우우······.”
그제야 그 자리에 나자빠지듯 드러누운 뤼펠은 기침을 몇 번 하고는 호흡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혼의 힘이 전신을 돌며 잃었던 힘을, 마기를 보충시켜준다. 그리고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듯, 악마성도 그에게 세계를 침식해 얻은 마기를 공급해주기 시작했다.
“사, 살았다······.”
허기가 가시자 안도가 찾아왔다. 마계를 열어놓고도 밖에 나갔다 죽는 얼간이가 될 뻔했으니, 안도할 만도 했다.
“그, 그 지구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일단 몸이 편해지자 이제까지 잊고 있던 분노가 되살아났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자신의 목숨을 한 번씩이나 빼앗은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뤼펠은 그 지구인의 혼을 되도록 깨끗이 뽑아내, 수천 년 동안에 걸쳐 핥아먹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뤼펠이 아무리 악마라도 더 이상 무모한 방법을 택할 순 없었다. 악마사냥꾼을 상대로 마계 바깥에서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라는 것을 그 또한 실제로 한 번 죽어서 보면서까지 학습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지구인은 플레이어였다. 정말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아마도 자신을 죽이면서 다시 한 번 크게 성장했을 터였다.
“······한동안은 힘을 쌓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계는 세계를 집어삼키며 멋대로 영역을 넓혀갈 거고, 뤼펠은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마기를 수확하기만 하면 됐다.
그가 그 시간 동안 할 일이란 그저 악마성의 옥좌에 앉아 인간종의 혼을 씹어 먹으며 권태로움과 싸우는 것이 전부였다.
***
“······역시 틀어박히기로 결정한 모양이로군.”
나는 지금 악마의 마계 앞에 와 있었다.
마계는 꾸물거리며 주변의 세계를 먹어치우고 있었지만, 내가 이렇게 가까이 와 있음에도 악마가 뛰쳐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악마를 꼬여낸다는 원래 계획대로 [욕망의 독]을 마계 앞에 꺼내놨음에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아무리 욕망에 충실한 악마라도 한 번 사망했던 트라우마마저 무시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골치 아픈데.”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계 안의 악마는 내가 못 이긴다. 이건 직감이 내게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마계 안의 악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마지막으로 마계 때문에 주변의 차원좌표가 엉클어져서 인류연맹으로의 도주도 불가능하다.
“데드 엔드잖아, 이거.”
악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였던 시뻘건 눈동자가 기억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다. 용암처럼 들끓는 원한이 그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악마는 결코 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굳이 직감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쉬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반드시 죽여야 해. 무슨 수를 써서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나와 악마의 관계는 이미 그렇게 정립되고 말았다.
그때였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안구에 새로운 퀘스트가 들어왔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불러내 그걸 확인했다.
[세계 퀘스트] – 의뢰인 : 세계– 분류 : 구원
– 난이도 : 매우 어려움
– 임무 내용 : 악마의 마계가 세계를 침식하고 있습니다. 구세주여, 부디 이 세계에 구원을!
– 수락 보상 : [세계의 힘 파편] 10개
– 해결 보상 : [레벨 업 쿠폰] 10매, 월드 타이틀 [구세주]
음? 뭐지? 이 퀘스트는? 의뢰인이······, 세계?
나는 레벨 업 마스터를 켜서 이 퀘스트가 뭔지 크리스티나에게 물어보았다.
= 이 퀘스트라뇨?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제가 대영웅님께 드린 퀘스트도 없고요. 그런데 의뢰인이 세계라고요? 어······, 정말인가요?
어째선지 크리스티나는 굉장히 당황한 것 같았다.
= ······아무래도 그 세계가 대영웅님을 구세주로 선택한 모양이네요.
“구세주라고?”
= 네. 세계의 의지를 대행해 ‘세계를 구하는 자’, 즉 구세주요.
아, 그러고 보니 구세주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었지.
= 다른 수락 조건은 없나요? 세계의 대리인이 되라든가, 뭐 그런 말을 퀘스트 내용에 써놨을 것 같은데.
“없어.”
= 없어요!?
없다는 말에 더 놀라다니. 보통 때는 있는 게 당연한 건가?
= 그렇다면 세계의 힘을 무료로 빌릴 수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세계의 힘을 빌리다니? 무료?”
= 방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퀘스트 수락 보상이요.
그래, 그렇게 말했다. 세계의 힘. 정확히는 [세계의 힘 파편]. 세계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퀘스트를 수락하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데서, 크게 좋은 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크리스티나의 반응을 보니 내 인식보다는 대단한 것인 듯했다.
“그게 대단한 거야?”
= 네. 세계의 힘을 구세주에게 밀어줌으로써,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어요. 해당 세계에서만 쓸 수 있다는 제약이 붙어 있지만, 거의 신의 힘에 필적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죠.
신의 힘이라······. 사실 이미 내겐 신의 힘이라 할 수 있는 권능 스킬이 있긴 하다. 그리고 조건을 만족시켰을 경우 권능 스킬은 정말 대단한 위력을 내기도 하고 말이다.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경우가 문제지만, 세계의 힘은 아이템을 사용한다는 간단한 조건만 충족시키면 되는 셈이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그쪽 세계가 급하긴 급했나 보네요. 원래라면 조건을 여러 개 건다든지, 플레이어끼리 경쟁을 시킨다든지, 수락보상이 아니라 해결보상으로 준다든지 했을 텐데······.
크리스티나의 말을 들어보면 보통의 경우 세계가 세계의 힘을 이렇게 쉽게 내어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세계 자체의 힘을 내어주는 거다 보니 사용자를 가리는 것이겠지. 내 추측이지만, 크게 틀린 추측은 아니리라.
하지만 세계의 힘을 대리해서 행사할 플레이어가 이 주변엔 나밖에 없기 때문에, 특례로써 내게 그냥 힘을 몰아주기로 한 것 같다.
정확히는 나 외의 플레이어는 안젤라와 키르드가 있지만, 내가 더 강하다. 더군다나 저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힘을 지닌 플레이어는 나뿐이다.
물론 내가 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지금 직업이 악마사냥꾼이라 그렇다. 이미 경험해 본 바지만 악마사냥꾼 직업의 힘을 빌리지 않고, 특히나 [악마에 대한 증오심] 스킬 없이 악마를 상대하는 건 매우 힘들다.
“좋아, 그럼 수락한다?”
= 수락 조건이 없다면야 뭐, 그러시는 편이 좋겠네요.
크리스티나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삐죽이긴 했지만, 결국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인류연맹 소속인 그녀 입장에서는 세계에게 나를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라도 드는 걸까? 뭐,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는 질문이리라.
나는 퀘스트를 수락했다. 수락 보상은 바로 내게 주어졌다. [세계의 힘 파편]이 아이템 형식으로 내 인벤토리에 굴러 들어왔다.
“······흠.”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서 [세계의 힘 파편]을 하나 꺼내 손에 들었다. 그러자마자 나는 이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세계의 힘 파편]을 꽉 쥐자, 파편이 부스러지면서 세계의 힘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힘은 주변을 물들이기 시작했다.아니, 물들였다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나. 왜냐하면 파편에서 뿜어져 나온 세계의 힘에 적셔진 주변 공간은 더욱 진한 색채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 오감과 직감이 주변의 모든 것에서 존재 그 자체가 진해졌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순간, 비로소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 세계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위화감이라는 게 있었다.
이곳은 내 고향이 아니고,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감각. 어쩌면 내가 지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때때로 지구에 대해 강하게 의식하고 마는 것은 그 감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힘을 다루는 능력을 지니게 된 나는 더 이상 그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의 편이 되었다. 이 세계 자체가 내게 힘을 빌려주고 있다. 웃기게도, 나는 마치 가족과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지구에서 가족 같은 건 가져보지도 못한 주제에 말이다.
“아무튼 좋아. 어쨌든 좋아.”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억지로 그 감정을 끊어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이 힘으로 뭘 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느냐. 그거였으니까.
세계의 힘은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세계의 힘 파편]을 부숴 힘을 다루게 된 나를 중심으로 약 100m 정도의 공간이 전부였다. 이 공간에 세계의 힘이 집중된 셈이다.
이 공간 안에 한해서 나는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