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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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럼··· 볼 거 없군. 자기 직업 주 능력치 등한시하고 별 쓸데도 없는 의지 같은 거나 올린 놈은 필요 없어. 아까운 마구니나 111개체나 낭비했군. 작업 리스트에서 지우고 넌 다시 인류연맹이나 작업해라.”
사실 의지는 그렇게 쓸데없는 능력치는 아니었지만, 마구니들에게는 카운터나 다름없는 능력치이기에 그들은 일부러 허세를 부려 쓸모없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리고 그게 아주 근거 없는 발언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의지가 높은 대상이라 한들 여러 번 홀리기를 시도하면 확률적으로 한 번쯤은 걸려들게 마련이고, 마구니가 그 대상을 잡아먹기엔 그 한 번이면 족하니.
문제는 홀리기를 시도할 때마다 마구니 1개체를 소모해야 한다는, 이를테면 투자 대비 수익이 안 좋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이 보기에 이진혁은 이미 111회의 매혹 시도를 흘려낸 대상이었다. 과투자를 피하려면 적당한 시점에서 손절해야 하는 것은 투자의 기본이었다. 설령 이미 과투자가 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본전 생각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그로서도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그런데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진혁이 의지 능력치에는 아예 투자한 적이 없는 깨끗한 몸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진혁이 모든 능력치를 한계 돌파시킨 미친 괴물이라는 것도 알아챌 수 있을 리 없었다. 인류연맹에도 알리지 않은 정보인데 끈 떨어진 첩자밖에 정보원이 없는 마구니 두령이 그런 걸 알 리 만무했다.
그래서 마구니 두령도 자기 상관의 그 지시가 합당하다 여겼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조용히 고개 조아리고 이렇게 대답했겠지만 말이다.
“네, 분신님.”
“마라 님이라고 불러!”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은 소리를 빽 질렀고, 마구니 두령은 꽁무니 빠지게 내빼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마라 님이라고는 부르지 않은 채.
***
해장용으로 끓인 콩나물국은 아주 소소한 경험치만을 주었다.
내가 직접 만든 요리의 평가가 수치로 정확하게 뜨는 셈이라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같은 등급 요리라도 경험치가 적으면 맛없고 경험치가 많으면 맛있다는 소리니까.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지.
“맛있어요, 선배!”
“맛있어요, 로드!”
“맛있어요, 맛있어요!!”
애들의 빈말이 뼈에 시민다. 하지만 음식의 평가를 듣는 것도 요리사의 경험치를 얻는 데 도움이 되므로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입가심이나 하라고 인류연맹 상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려주고, 나는 호미를 들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농부 직업 레벨 업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선배, 여기 계속 있을 거면 차라리 집 지을까요?”
내가 그러고 있으려니, 안젤라가 내게 그런 제의를 해왔다. 정글에서 집 짓고 살았던 때의 추억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건지,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그렇다 보니 이런 대답을 하는 게 좀 꺼려지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아냐, 짓지 마. 우리 또 움직일 거야.”
내 대답에 안젤라는 약간 실망한 듯했지만 아직 포기는 안 한 듯 이어서 의견을 개진했다.
“하지만 농부 레벨 올린다고 했잖아요. 그럼 수확까지 해야 되지 않아요?”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내가 보통이 아니잖아.”
나는 적당히 갈아엎은 흙에 씨를 뿌리고 물을 콸콸 쏟았다. 그리고 마력을 생명 속성으로 바꿔 퍼부었다. 그러자 씨앗에서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뻗어 쑥쑥 자라더니, 이윽고 딸기 하나가 열매 맺었다.
이것이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스킬과 마력의 무서움이다! 플레이어의 힘이다!!
“자, 먹어봐.”
나는 그렇게 열린 딸기를 안젤라의 입에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딸기를 씹던 안젤라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달고 맛있어요!!”
“그렇겠지. 비싼 품종이거든.”
비싼 만큼 경험치도 많이 준다. 당연히 전투 경험치가 아니라 농부 경험치지만.
달고 맛있다는 소리에 키르드와 케이, 테스카까지 와서 줄을 섰다. 나는 그들에게도 딸기를 하나씩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딸기를 수확해 인벤토리에 넣은 후 손을 탁탁 털었다. 이걸로 오늘 딸기농사는 끝이다.
“그럼 이제 심마니 일을 해볼까?”
“그거 어제도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거 사기 아니에요?”
안젤라가 그런 소릴 했다. 그녀는 어제 심심하다며 날 따라와서 내가 한 걸 봤으니 할 수 있는 소리였다.
솔직히 난 뜨끔했다. 아직 덜 자란 약초를 찾으면 생명 속성 마력을 퍼부어 키워서 뽑고, 없으면 씨앗을 뿌린 후에 키워서 뽑고 그랬으니.
전자는 그렇다 치지만 후자는 확실히 사기였다. 이거 농업 아냐? 하지만 오르는 건 심마니 경험치였다. 시스템이 그렇다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본업이 아니니까 괜찮아.”
내가 생각해도 별로 좋은 변명이라곤 할 수 없었다.
***
3개월이 지났다.
3개월 동안 별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씨 뿌리고 밭 갈고 약초 캐고 요리하는 안온한 삶만을 보낸 건 아니다. 세계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살아남은 토착 인류종족을 구원하고 필드 보스를 처치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새삼 깨달은 거지만 [지배의 권능]에 걸려 있던 필드 보스의 비율은 그리 많지 않은 걸로 보였다.
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럭저럭 많은 수의 필드 보스와 조우했음에도, 케찰코아틀과 테스카틀리포카, 그리고 로제펠트에게 당했던 거대 사자 아르슬란을 제외하면 모두 그냥 거대 몬스터에 불과했으니.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이렇게 열심히 ‘가나안 계획’을 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인퀴지터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젠 이놈들이 이 세계를 진짜 관리하고는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안전한 건 다행이지만 내겐 불만스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교단의 끄나풀을 처치함으로써 인류연맹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전공 보상도 아쉽지만, 고급 스킬과 전투 경험치, 무엇보다 강적과의 싸움에 목마른 내겐 이 안온함은 갑갑함마저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더욱이 내 전투력이 너무 올라 이젠 어지간한 필드 보스 상대로는 전투 경험치조차 얻을 수 없게 되었으니, 성장곡선도 같이 완만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요리사 레벨을 올려서 5성까진 아니지만 3성 요리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게 다행이었다. 전공을 올리지 못해 5성 식사권을 수급할 수 없게 된 이상 가끔 완성되는 3성 요리가 내 주요 경험치 수급처가 되고 말았다.
아, 그래도 신성은 꽤 올릴 수 있었다. 세계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구한 인류 종족들을 규합시키고 나를 믿게 해 신앙 점수 수급을 더 크게 올릴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구세주 레벨도 5가 되었고, [세계의 힘 파편]도 꽤 모였다.
안온한 세월이었지만 거머쥔 게 없는 건 아닌 셈이다.
그렇게 3개월하고도 며칠이 더 지난 날 아침. 몸을 일으킨 나는 직감적으로 오늘은 뭔가가 다르리란 걸 느꼈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해 왔듯, 내 직감은 별로 틀리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행복했으면 좋겠군.”
혼잣말을 하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교단. 유일교단이라고도 불리는 집단의 모처.
칼로 반듯하게 자른 것 같은 정육면체의 하얀 건물. 그 건물 안에 일백 명의 플레이어 출신 전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집결시킨, 그들의 지휘관에 해당하는 자가 단상에 서서 소리를 높였다.
“제군들! 우리가 누군가!!”
“크루세이더!!”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우리는 크루세이더! 성전을 마다하지 않는 전사!! 교단을 수호하고, 교단을 위협하는 이교도를 처단하는 십자군이다!! 그런데 여기에 교단을 위협하는 자가 나타났다!!”
하얀 벽면에 영상이 떠올랐다. 그 영상에 비친 존재는 단 하나.
이진혁이었다.
스크린에는 그가 악마 뤼펠과 싸우던 때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상대가 악마임은 교묘하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마기를 두른 칼을 휘둘러 누군지 모를 적을 베어내는 모습은 강조되어 찍혀 있었다.
잠시간의 웅성거림. 지휘관인 자는 전사들이 그러도록 잠시 내버려 두었다가,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곧 소리를 높였다.
“저 강대한 적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다른 그 어떤 외교적 절차도 밟지 않고 우리 교단의 영역인 그랑란트를 침략해 자기 영역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 이런 잔악한 행위를 우리 크루세이더가 그냥 놔둬야 하는가!!”
“Nein! Nein! Nein!!”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Crusade!!”
“그렇다! 성전이다!! 크루세이더 제12군단 군단장 야코프 체렌코프는 그 고유의 권한으로 성전의 발동을 선언한다!!”
함성소리가 하얀 건물 안을 진동시켰다.
1 대 101의 전쟁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
“아쉬워.”
낡은 오두막의 건물 안에서, 남자는 김빠진 맥주를 홀짝거리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놈, 이름이 뭐랬지?”
“이진혁입니다.”
“그래, 이진혁. 그놈이 악마화까지 써줬으면 더 괜찮은 그림이 나왔을 텐데. 우리의 영역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것보다 강렬한 선동 문구는 없으니 말이지.”
일반 플레이어가 악마를 상대하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다. 처음부터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고, 보통은 살아남기 위해 악마사냥꾼을 택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불가능하다면?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악마사냥꾼 직업의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킬들 중 가장 강력한 스킬이 바로 [악마화]였다.
보통은 배운 것을 그냥 쓰기 마련이다. 그 상대가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악마군주라면 더욱 그러하다. 설령 타락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더라도, 당장의 생존과 승리를 위해서라면 최강의 스킬을 아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진혁은 악마사냥꾼으로 전직하긴 했지만 악마화를 쓰지 않았다. 악마화를 쓰지 않고도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한 파워 업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랬다면 고작 1개 군단으로 놈을 덮칠 일은 없었을 거야. 여기까지 작업하는 데 3개월이나 걸리지도 않았을 거고.”
고작 100명으로 군단을 칭하는 건 우습게 여겨지나, 그것이 교단의 크루세이더라면 웃던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힐 것이다. 적어도 크루세이더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말 그대로 일당백의 전사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대대급의 전력을 보유한 이들이 바로 크루세이더였으니.
더욱이 군단장인 야코프 체렌코프는 어떠한가. 그 또한 크루세이더의 군단장이 되기 전에는 1인 군단이라는 칭호로 불린 적이 있을 정도의 걸물이었다.
즉, 실제론 2개 군단 정도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대병력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크루세이더 제12군단을 보고 ‘고작’이라 칭하며, 그마저도 모자라다고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남자가 이진혁을 정말로 처치하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물론 그 방법은 불법적이고 음성적인 것이겠지만 신속하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수단을 동원해 교단 최고 회의의 인준을 받아 정규 크루세이더 군단을 파견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것이 정공법이고 옳은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남자의 선택에 의구심을 느끼는 것은 이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잔혹하고 냉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혈의 소유자. 그것이 이 남자에게 어울리는 칭호였다.
그런 이 남자가 정공법이라니?
분명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남자는 이런 적법한 방식의 일처리를 혐오한다. 효율적이지 않다고 말이다. 다른 의도가 있지 않는 한 이런 방법을 택할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뭐지?’
그렇다고 남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간 죽을지도 모르니까. 여자는 그저 부동자세로 입술을 꾹 다문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여자가 그러든 말든, 남자는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아쉽구나.”
여자는 볼 수 없는 각도에 위치한 그의 입술은 길쭉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