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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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는 놈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래고, 복수를 이루자고 부르짖던 놈의 피맺힌 외침도 기억하고 있다. 그 눈물, 그 외침은 역할을 다해 교단의 여론은 일제히 이성을 잃었다.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보면 당시 전황으로 볼 때 군단의 투입 자체가 무모했고, 전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군단 전멸 직전까지 통신 기록이 0회라니, 아무리 전투가 치열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지 않는가?
그러나 만신전과의 전쟁을 멈추자는 비둘기파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매파가 교단의 여론을 삽시간에 장악해 버렸기에 이견을 제기하는 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윽고 전쟁 중에 여론을 분열시키려는 만신전 측의 음모론으로까지 몰렸다.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많은 피가 흘렀고, 많은 희생이 따랐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었고, 소멸하지 않아도 되는 신이 소멸해 버렸다. 오로지 감정으로만 이뤄진 전쟁이었으며, 양 세력은 끝없는 소모전을 치러야 했다. 교단이 얻은 것은 복수를 했다는 성취감 정도였다.
만신전과의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휴전한다는 찝찝한 결말을 맺은 그 전쟁에 대해 후대는 이렇게 평가한다.
잊어버린 전쟁.
교단에게 큰 이득이 되지도 않았거니와 별로 명예롭지도 않았던 그 전쟁은 체계적인 정보 조작에 의해 교단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 버렸다.
그러나 그 전쟁으로 모두가 아무것도 못 얻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을 지속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세력이 존재했으며, 그 세력은 교단의 부와 권력과 힘을 빨아먹고 지금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득권 세력의 중심에 놈이 있었다. 복수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외친 그 놈이.
놈은 슬그머니 교단의 요직에서 물러났지만, 교단의 정객들 중에 그가 실각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교단 실세의 막후에는 지금도 놈이 있다.
“그놈, 브뤼스만 라이언폴드 말일세.”
야코프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은 부관의 표정이 굳었다. 마치 밀랍 인형처럼. 이제까지의 당혹과 공포에 젖은 눈동자는 사라졌고, 그 대신 차가운 분노가 자리 잡았다.
“감히, 감히, 가암히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부관의 입에서 인간의 목소리 같지 않은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분의 이름을, 그분을! 놈이라고 부르다니!!”
스르렁.
야코프는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충성스러운 자신의 부관이 살의를 피워 올리며 날카로운 칼끝을 자신에게 들이대는 이 상황이 뭔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어 마땅한 죄! 목숨으로 갚아라!!”
단순히 전투력으로만 비교하자면 부관이 감히 야코프 체렌코프를 상대로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야코프 체렌코프는 전형적인 무관으로, 몸을 단련하는 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야코프는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 직감이 가리키는 바가, 눈앞의 적이 위협적임이 아니라 내부의 적에 대한 경계를 하라는 것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야코프 체렌코프는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아니, 눈앞의 적이 위협적이라고 판단해 주면 좋겠는데.”
스칵.
칼날이 한 번 번뜩이고, 목이 날았다. 날아간 목은 야코프의 것이 아니라 부관의 것이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른 것은 바로······.
“이진혁!”
야코프 체렌코프가 군단을 이끌어 토벌하려 했던 자. 이제까지 그가 찾아다니던 남자. 그 남자가 싱그럽게 웃으며 자신의 부름에 이렇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내 이름을 알고 있나? 그렇다면 자기 소개 할 시간을 아낄 수 있겠군.”
야코프는 어이가 없어 이진혁을 노려보았다.
“······이곳에 숨어들어 와 있었나?”
“그래,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지.”
“경계병들은 대체 뭘 한 거야!”
“그들은 임무에 충실했어. 그건 내가 보증하지.”
그런 뻔뻔한 소릴 지껄이며, 이진혁은 방금 전 부관의 목을 날렸던 칼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야기를 하지.”
그것은 의외의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야코프의 대응은 조금 늦어졌다.
“······우리가 대화나 할 사이던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교단의 모두가 가나안 계획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는 걸 바로 몇 초 전에 알게 되었거든.”
가나안 계획. 그 두 단어는 야코프가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도 가나안 계획에 대해 알고 있나?”
야코프의 목소리에 진중함이 담겼다.
***
이 크루세이더 군단에 하도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아 억지로라도 빈틈을 만들어보기 위해 아예 지휘부에 잠입해 본다는 대범한 계획을 세운 건 내가 아니라 안젤라였다.
교단의 인스펙터였던 시절에 이런 일을 자주 해봤다나. 그리고 성공률은 아주 높았다고 한다. 100%가 아니었던 건 좀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안젤라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실천했다.
그런데 이 대범한 계획이 의외의 성과를 낳은 셈이 되었다.
사실 우리가 이 지휘부에 잠입한 건 이틀 전이다.
요 이틀간 우리는 야코프 체렌코프나 그 부관과 침식을 같이 했다. 그런데 세상에, 잘 때까지 빈틈이 안 보일 줄은 몰랐다. 이 군단장이란 자는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잠을 자는 어이없는 짓거리를 벌였다. 어지간하면 인벤토리에 넣고 잘 텐데 말이다.
게다가 부관이 잘 때는 군단장이 깨어 있었고, 군단장이 잘 때는 부관이 깨어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하루에 30분씩 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이런데 다른 때는 오죽하겠는가? 그야말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몇 분 전에 야코프 체렌코프가 가나안 계획과 그 배후에 대한 걸 부관에게 털어놓더니, 그걸 듣곤 부관이 갑자기 발작해서 그를 습격하는 게 아닌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맞이해 내 두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망설였으나, 그보다 직감이 먼저 판단을 내렸고 나는 늦지 않게 상황에 끼어들 수 있었다.
부관을 치고, 야코프에게 대화를 청한다!
이 짧은 순간에 머리로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대범한 판단이었으나, 태도를 바꾼 야코프를 보니 이 판단이 맞다 싶었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지만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비릿한 웃음을 띠어 보였다.
“가나안 계획에 대해선 우연히 알게 됐지.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이후부턴 그 계획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어. 그리고 당신 입에서 나온 그······, 브뤼스만? 그자가 보기에 나는 꽤나 까다로운 훼방꾼인 모양이더군.”
허세다.
브뤼스만이란 이름은 방금 전에 처음 들은 이름이고, 교단의 배후에 그런 자가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러나 방금 내 발언은 틀림없이 효과적이었다. 야코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런 모양이더군. 자네를 치기 위해 군단 하나를 희생시키려고 하는 걸 보니 말일세.”
나는 내가 맥을 제대로 짚었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브뤼스만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에 대해서도 조금 감이 잡혔다. 크루세이더 군단장이 이런 식으로 나올 자라면, 분명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겠지.
“그래서 어쩔 생각이신지? 순순히 군단을 희생시킬 생각이신가?”
내 이어진 질문에, 야코프의 표정에 다시 날카로움이 돌아왔다.
“내가 여기서 자네를 잡으면 그럴 일도 없겠지.”
“그게 과연 그렇게 될까?”
야코프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에서 힘이 빠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브뤼스만은 보급을 끊고 굶어죽여서라도 우리 군단을 소멸시켜야 성이 풀릴 거야. 우린 이미 가나안 계획에 대해 알아버렸으니, 그 인면독사가 우릴 살려둘 리 만무해.”
브뤼스만의 별명은 인면독사인가. 사람 얼굴을 한 독사라니, 꽤나 인상적인 별명이다.
“잘 아는군. 그럼 같은 질문을 두 번 반복하도록 하지.”
“그럴 필요 없네.”
야코프는 손을 내저었다.
“자네와는 휴전을 청하도록 하지. 우리는 교단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리고 브뤼스만의 음모를 밝혀내고 그의 세력을 탄핵해 낼 것이야.”
꽤나 희망적인 선언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 본인도 별로 가망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건 쉽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러자 야코프는 농담처럼 받았다.
“휴전 말인가?”
“아니, 이 변경에서 빠져나가는 것.”
규모가 좀 작긴 하지만 그래도 세력을 이루고 있는 인류연맹마저도 이 변경까지 포탈을 구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끈 떨어진 연인 이들 크루세이더 일개 군단이 쉽게 이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브뤼스만이란 자가 단순히 보급만 끊으려 들 리 없지. 분명 뭔가 손을 써올 거야.”
고작 나 하나와 크루세이더 군단을 공멸시키겠다는 구멍 숭숭 뚫린 계획을 세울 상대가 아니다. 그 파벌이 다른 수를 써올 거란 건 그야말로 불을 보듯 빤한 이야기였다.
내 말을 들은 야코프는 표정을 굳혔다. 내 말을 듣고 깨달은 게 아니다. 아픈 곳을 찔린 것 같은 반응이다. 하긴, 이 정도도 예상 못 해서야 군단장을 하고 있을 수 없지.
“그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하나 있지.”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맺어야 할 건 휴전조약이 아니야.”
“허, 공조라도 하겠단 말인가?”
“원한다면.”
“······대범하군.”
크루세이더와의 공조는 내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브뤼스만이 부려올 다른 수에 대해 짚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마군주 뤼펠을 조우했을 당시에는 교단이 관리하는 이 세계에 갑자기 악마가 쳐들어온 것에 대해 이상하게만 여겼지만, 다시 생각하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 정보들을 취합해본 결과, 나는 어떤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악마는 교단에서, 정확히는 교단의 어떤 파벌에서 보내온 것이리라고. 그리고 그 파벌은 매우 높은 확률로 가나안 계획을 추진하던 파벌이리라.
뤼펠은 어떤 계약에라도 얽매여 있었는지, 아무리 심문을 해도 확실한 배후를 말해주지 않았다. 아까운 신성을 소모해 [기아스]까지 소모했음에도 악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뒤가 구린’ 뤼펠의 반응이 내 가설에 힘을 더 실어주었다.
악마와의 계약은 공짜가 아니다. 더군다나 뤼펠에게 걸린 계약은 기아스마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것.
결코 가볍지 않을 터인 계약의 대가를 치러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는 이유는 악마와의 연결고리가 발견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일 터. 대외적으로는 악마들과 전쟁 중인 교단의 누군가는 그 조건을 만족시킨다.
뤼펠이 마계를 열었음에도 교단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도 한 가지 근거가 되었다. 모든 근거가 교단을, 교단에서도 가나안 계획을 추진하는 파벌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그러니 브뤼스만은 나와 너희들을 충분히 전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악마 세력을 이 세계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우리가 맺는 게 단순한 휴전조약이라면 우린 브뤼스만의 계산대로 섬멸당할 테지. 우린 놈의 예상을 뛰어넘어야 해.”
“그게 공조라 이건가?”
“그렇지. 그리고 그건 단순한 공조여선 안 돼. 시너지를 이룰 수 있는 공조여야 하지.”
거기까지만 말하고,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직 아닌 것 같군.”
“뭐?”
“자네의 부관 말이야. 지금 어디 갔지?”
내가 직접 목을 베어낸 부관의 시체가 사라져 있었다. 뭐, 카르마 연산이 안 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가 완전히 죽지 않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찌릿찌릿한 직감의 반응. 곧 무슨 일이 생길지, 나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일만큼은 당신 혼자 해결해야 해. 우리가 개입했다간 당신만 곤란해질 테니까. 알겠지? 알아서 잘 해보라고.”
“그게 무슨······. ······아니, 알겠다.”
바깥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부관의 목소리였다. 군단장이 교단을 배신했다며 군단장을 탄핵할 병사를 모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부관의 쿠데타다. 만약 이 사태에 내가 개입했다간 부관의 세력에 빌미를 주는 셈밖에 안 된다.
“무운을 빈다는 말은 이상한가? 어쨌든 잘해내길 바라지.”
그 말만 남기고, 나는 다시 안젤라의 특성 안에 모습을 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