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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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하겠냐고?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당연하지!
“그래!”
한다! 나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런 메시지가 떴다.
– 전직하시기 위해선 전직 퀘스트를 통해 전직에 필요한 물자를 수급하고 전직 자격을 증명하셔야 합니다.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안 해!”
그러고 보니 이거 시스템 전직이었지. 그동안 주리 리의 직업소개소에서만 전직해 왔던 터라 전직 퀘스트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직업소개소에선 전직 퀘스트가 면제였으니까.
그렇다면 선멸자도 직업소개소를 통해 전직하면 퀘스트 면제 혜택이 따라오겠지?
“주리 리! 주리 리!!”
나는 애타게 주리 리의 이름을 불렀다.
= 부르셨습니까? 대영웅 님.
주리 리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나타났지만, 그 양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왜일까? 내가 애타게 불러서?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보다 중요한 건 전직이다.
“나 선멸자로 전직할래!”
= 선멸자 말씀이십니까? 검색해 보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 주리 리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게 실시간으로 내게 보였다. 아차! 그래, 맞다. 히든이랬지. 어쩌면 인류연맹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선멸자라는 직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 ······죄송합니다만, 대영웅 님.
그리고 나쁜 예감은 잘 들어맞는 법이지.
“알았어. 데이터베이스에 없구나. 괜히 히든 직업이 아니네.”
내 말에 주리 리는 그녀로선 드물게도 반짝이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 히든 직업 말씀이십니까? 저희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히든 직업의 출현 조건에 제보해 주시면 소정의 보상을 해드립니다.
“그래?”
이미 내 특성을 밝힌 상대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선멸자 직업의 개방 조건을 말해주었다.
“반격가 레벨 50 달성이야.”
듣고 난 주리 리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 어차피 대영웅 님 외엔 찾아내기 힘들었을 히든 직업이로군요. 다른 이들이 이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만 약속한 보상은 드리겠습니다.
“역시 그렇지? 미안하네.”
보상은 스킬 포인트 100개였다. 흡족하다!
“그럼 나 전직 퀘스트 받고 다시 올게.”
=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다시 레벨 업 마스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직업 창을 불러냈다.
***
[선멸자 전직 퀘스트 1] – 종류 : 수련– 난이도 : 알 수 없음
– 임무 내용 : 기초부터 다시 다지기! [후의 선] 100회 사용해 보기.
[주의!] 스킬 시전 목표는 매번 달라야 함
– 보상 : [선멸자 전직 퀘스트 2] 개방
“단순 노가다네.”
원래대로라면 꽤 골치 아팠을 퀘스트였으나, 다행히 내가 머무르는 주둔지에 크루세이더 101명이 있다. 아, 몇 명 죽었으니 숫자가 좀 부족한가. 모자란 숫자야 우리 일행이나 그림자 용병으로 메우면 되겠지. 이런 퀘스트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 직업 제한은 딱히 없었기 때문에 굳이 반격가 상태로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 퀘스트를 완료한다고 바로 선멸자로 전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속 퀘스트를 계속 해결해야 하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신살자도 50레벨까지 찍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그건 잠깐 접어두자. 어차피 35레벨에는 아무 스킬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데다, 여기서부터는 레벨 업에 정말 막대한 경험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의 전력 강화를 위해서는 포대 지휘자 레벨을 올리는 게 더 효과적이다. [예의 살]과 시너지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포대 지휘자로의 재전직을 선택했다.
“자, 그럼 음식값을 청구하러 가볼까?”
퀘스트도 깰 겸 스킬을 뜯기도 할 겸, 나는 야코프의 지휘소로 향했다.
***
결론부터 말하면 크루세이더를 상대로 스킬을 뜯는 건 별로 좋은 발상은 아니었다. 이들은 군대고, 조직적으로 싸우는 데 특화되어 있다. 이게 뜻하는 바가 뭐냐면, 대부분의 구성원이 비슷한 스킬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가리킨다.
게다가 크루세이더는 이제까지 만나본 고위 플레이어치고는 특이하게 직업 스킬을 잘 활용한다. 직업 스킬은 뜯어 오질 못하니 나로서도 갑갑할 따름이지.
뭐, 그래도 어느 정도의 수익은 있었다. 몇몇 부사관들에게서 높아봐야 유니크급이긴 했지만 크루세이더가 되기 전에 익혔던 스킬을 꿩 대신 닭 겸으로 뜯어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군단장인 야코프가 진국이었으니까.
야코프로부터는 다른 크루세이더는 익히지 않은 전설급 스킬을 몇 개 뜯어낼 수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협조 체제라지만 내 밑천을 다 보여줄 순 없지. 미안하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전설급 스킬을 몇 개씩 보여주고도 이러니, 야코프는 확실히 강적이라 할 만 하리라.
“크루세이더랑 동맹 맺길 잘했네!”
그리고 전직 퀘스트 1도 깼다. 애초에 스킬 뜯는 데 쓴 스킬이 [후의 선]이었으니 매우 자연스러운 형태로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었다.
[선멸자 전직 퀘스트 2] – 종류 : 수집– 난이도 : 알 수 없음
– 임무 내용 : [악마의 뿔] 1쌍, [마구니의 뼛조각] 한 무더기, [타천사의 깃털] 한 다발을 구해 오시오.
[Tips!] 카테고리가 일치하는 비슷한 아이템으로 대체 가능.
– 보상 : [선멸자 전직 퀘스트 3] 개방
아, 그럼 그렇지. 2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한 적 없다. 역시 3으로 이어지는군.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는데.
[악마의 뿔] 1쌍은 일전에 뤼펠과 싸웠을 때 놈의 뿔을 부러뜨린 걸 주워둔 게 있고, [마구니의 뼛조각]은 일전에 [욕망의 독]에서 나온 마구니들을 잡았을 때 모아둔 게 인벤토리 가득 쌓여 있었다. 뭐, 뭣하면 [마라 파피야스의 오금뼈]를 갈아다 내도 될 테고.문제는 [타천사의 깃털]인데······. 이걸 어디서 구하지?
“링링!”
나는 혹시나 싶어 레벨 업 마스터를 켜 링링을 불러다 인류연맹의 상점이나 경매장에서 [타천사의 깃털]을 파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심플했다.
= 없어요!
자랑이다!
“에이, 모르겠다.”
나는 레벨 업 마스터를 인벤토리에 도로 넣고 퀘스트 창을 노려보다가 그냥 꺼버렸다. 잊고 살자. 그러다 인연이 있으면 타천사를 잡을 일도 생기겠지.
그 전까지는 그냥 계획한 대로 움직이자. 일단은 포대 지휘자의 레벨 업이다. 그러려면······.
“······일단 굶어야겠군.”
비싸고 맛있는 음식에 길들여진 혀의 역치를 다시 내리는 게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굶은 후에 먹을 맛있는 먹을 것, 가능하면 성급 요리를 구해야지. 이건 뭐······, 링링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상점표 2성 요리라도 회식의 시너지 효과를 보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더 좋은 방법은 물론 직접 재료를 구해다 요리해서 먹는 거다.
“이 김에 농부 레벨이나 올려야겠다.”
나는 농사를 짓기로 결의했다. 이 참에 남는 인력들도 동원해야지. 여기에서 남는 인력들이란 물론 크루세이더들을 가리킨다.
크루세이더 여러분, 혹시 대민지원이라고 들어는 보셨는지?
***
감금된 곳에서 탈출한 카자크는 천천히 움직였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투명화 스킬과 추적 방지 스킬, 흔적을 지우는 스킬 등등을 덕지덕지 켜놓았기 때문에 여자의 추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래 봬도 인스펙터 출신이다. 잠입과 탈출, 은신과 은밀 행동은 그의 전문이었다.
그렇게 카자크는 한가롭게 주변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조사 결과, 그는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전에 본 적 없는 이상한 세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치 거대한 쓰레기장 같군.”
용도를 알 수 없는 문이 두 개 달린 거대한 흰색 직육면체 금속 덩어리. 문을 열어보니 안은 새하얗게 칠해져 있었고, 음식물이 쉰 것 같은 냄새가 약간 남아 있었다. 뭔가를 밀봉할 생각이었던지, 문에는 부드러운 재질의 자석이 붙어 있어 살짝만 닫아도 단단히 닫혔다.
그보다 작은 검정색 금속 덩어리에는 문이 하나 달려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설명이 부착된 다양한 버튼이 달려 있었다. 가장 큰 버튼을 눌러보니 문이 열렸다. 검정색으로 칠해진 내부에 깨져 나간 유리그릇이 보였다.
바람이 나올 것 같은 구멍이 달린 거대한 직육면체 금속 덩어리도 있었다. 바람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판 같은 게 여럿 달렸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난방 기구인 걸까? 알 수 없었다.
금속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직육면체들에겐 공통적으로 검정색의 꼬리가 달려 있었다. 간혹 흰색이나 다른 색도 있었지만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같았다.
귀여우라고 달아놓은 장식인 걸까? 카자크로선 이 물건들의 제작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만들어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런 식으로, 지금은 용도조차 알 수 없는 골동품들이 아무렇게나 잔뜩 버려져 있었다.
“아니, 쓰레기장이겠지.”
카자크가 이제껏 감금되어 있던 안전가옥도 이 쓰레기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어쩌면 여자가 안전가옥을 일부러 쓰레기들 속에 파묻어 숨겨놓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아마 그렇겠지. 나는 지금 공식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여자는 카자크의 생존을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라고 자신했었다. 상부에도 사망을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여자에게 있어 생존한 카자크는 존재 그 자체로 역린이다. 약점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크크크.”
카자크는 낮게 웃었다. 즉, 자신의 생존을 대외에 알리는 것만으로 여자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게 누가 애착 같은 걸 가지래.”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봐도 웃긴 일이다. 자신의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취미와 음습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문하던 대상에게 애착을 품다니.
“진짜 변태네.”
크크큭, 하고 카자크는 다시 웃었다.
일부러 재생은 하다만 상태였기에, 그의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전신이 아팠지만, 이 모습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여자에게 사회적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통 대신 쾌감이 느껴졌다.
“어쨌든.”
그러려면 일단 이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지난한 일이었다. 이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고,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버려진 지 오래되어 보였으니까.
탈출 수단도 없고, 연락 수단도 없다.
현지 주민이라도 한 명 만났으면 좋으련만, 여기선 사람 그림자는커녕 누군가가 거주한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오.”
그러나 일주일 동안에 걸친 집요한 탐색 끝에, 카자크는 드디어 민가 한 채를 발견했다. 낡고 볼품없는 오두막집이었다.
“그런데······, 되게 수상하네.”
민가 주변에만 쓰레기가 없는 거야 이해할 만하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히 쓰레기를 치워뒀을 테니. 문제는 그 민가의 재질이었다.
그 오두막집은 통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주변에 자재가 되어줄 만한 철과 플라스틱이 가득 있는데, 이 세계에선 구하기도 힘든 통나무로 집을 짓다니. 어지간히 변태가 아닌 이상에야 할 수 없는 짓이다.
“진짜로 돈 없고 갈 곳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걸로 집을 짓진 않겠지.”
카자크는 턱을 만지며 몇 분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저 수상한, 함정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오두막집에 들어가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삼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여길 그냥 떠나는 건 왠지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분했다.
“[감시자의 수정].”
결국 카자크는 스킬로 수정 하나를 생성해 바닥에 박아놓았다. 그의 손에서 떨어지자마자 수정은 투명해져 눈에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스펙터의 직업 스킬 중 하나로, 감시와 탐색, 좌표지정 등 두루두루 쓰이는 스킬이다.
“이걸로 누가 드나드는지 정돈 볼 수 있겠지.”
어쩌면 이게 새로운 배신의 힌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카자크는 아직 배신에 굶주린 채였다. 여자는 지금까지도 카자크가 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이 배신을 통한 달콤함을 맛보지 못했다.
“아주 그냥, 내가 돌아왔다고 큰소리로 광고를 해야지.”
여자의 배신감을 맛볼 생각에 부르르 떨며, 카자크는 다시금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한 탐색에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