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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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에게 털끝의 도움이라도 되어보자’는 키르드가 야심차게 계획한 이번 일, 그러니까 이진혁의 전투에 난입해 아르크 후작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낸 건 키르드가 혼자 아무 생각 없이 나선 게 아니었다.
키르드도 한계돌파로 인해 스킬 포인트를 벌어 [대신 맞기] 스킬의 랭크를 올렸고, 케이와 테스카도 어느 정도 신성을 회복해 키르드 한 명쯤은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손에 넣었기에 과감하게 저지른 거였다.
키르드도 자신이 딱 한 방 맞고 바로 죽을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부활이라는 보험 수단을 미리 마련해 둬서 다행일 뿐이었다.
“네 일방적인 욕구를 채웠으면 이제 그만 후방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저 악마 세잖아.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그때, 테스카가 한마디 얹었다.
“고대 신 주제에 악마가 무서워서 후퇴하자니.”
케이가 그런 그녀의 말에 한심한 듯 중얼거렸다.
“너도 알잖아. 다 옛날이야기야.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테스카의 솔직한 일침에 케이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미안, 테스카. 이미 돌아갈 길은 막혔어. 우리 계속 선배 따라다녀야 돼. 만약 선배의 권역에서 벗어나면 마계의 지독한 마기에 짓눌려져 사망할걸.”
그러나 그런 테스카에게 찬물을 끼얹은 건 안젤라의 냉정한 현실인식이 담긴 지적이었다.
“윽······! 그런가!!”
테스카는 절망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뭐,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선배가 이길 거 같으니까. 그보다······.”
안젤라의 눈빛이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저 여자 대체 누구지?”
그런 안젤라에게, 테스카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안제여. 아직도 모르겠는가? 은인께선 네게 관심이 없으시다. 아니, 정확히는 성적인 관심이 없으신 게지.”
“그건 나도 알아!”
안젤라가 살기 어린 시선을 뿌리며 테스카를 노려보았다. 테스카는 그런 안젤라를 타이르듯 따스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은인께서 저 여자에게도 똑같이 관심이 없으리란 건 파악할 수 있을 터. 쓸데없는 걱정 말게나.”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이진혁을 바라보는 안젤라의 시선에 애절함이 담겼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테스카는 싱긋 웃었다.
“자네는 사랑스러운 처녀로군.”
“자네라고 하지 마. 혼자 늙은이인 것처럼 말하지 마. 마지막으로 난 여자에게 관심 없어.”
그런 테스카의 말에 돌아온 대꾸는 냉담할 뿐이었다.
***
루시피엘라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아무리 지금 칼을 휘두르는 중은 아니라 한들, 전투 상황인 건 매한가지였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건 불가능했다.
“저는 오로지 이진혁 님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전부 다 드리고, 그런 후에도 그저 부탁만을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 어떤 강제성도, 합당한 계약마저도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러니 부디 저를 마음껏 써주십시오.”
루시피엘라가 너무 간단하게 생략해 버린 터라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문제점이 생겼지만, 그녀가 정말로 어렵고 복잡한 사정을 떠안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리고 그 사정을 해결할 가능성이 내게 있다는 것도 말이다.
필요 없다고 그냥 내치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르지만, 지금 루시피엘라를 적으로 돌리는 건 별로 현명한 판단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선한 존재가 아니다. 타천사다.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으리라.
하려면 아르크 후작을 처치한 후, 그리고 악마 여왕을 적어도 후퇴시킨 후에나 루시피엘라를 적대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그 전까지는 그녀 스스로 요청한 대로 그녀를 마음껏 부려먹는 게 도리였다.
뭐, 그것도 상황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지. 아르크는 대체 악마성에 틀어박혀서 무슨 짓을 하는지. 어쩌면 뤼펠처럼 옥좌에 앉아 벌벌 떨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멸자로의 전직은 이 마계를 닫은 후에나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일단은 다른 직업으로 전직해 두었다. 포대 지휘자의 다음 전직 직업인 [폭격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폭격가라는 직업은 실로 판타스틱한데, 포를 공중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 포탄이 아니라 포를 말이다!
게다가 포를 허공에 방열시킬 수 있다. 포가 허공에 단단히 고정된 장면은 내가 해놓고도 황당했다.
포격 스킬로 공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할 직업임은 틀림이 없으나, 마기가 지나치게 짙은 마계에서는 당장은 쓸모가 없다. 나중에 찬찬히 수련치를 채우기로 마음먹으며, 나는 일단 천자총통을 인벤토리에 수납해 두었다.
폭격가로 전직한 다음에 한 일이란 바로 마계를 천천히, 느긋하게 거니는 것이었다. 나를 중심축으로 한 세계의 힘 권역이 충분히 마계를 잠식할 수 있도록 속도를 맞춰야 했으니 걷는 게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향은 악마성. 마계 전체를 잠식할 필요는 없고, 악마성만 지워 버리면 임무가 끝난다.
이상할 정도로 평화롭지만, 이것도 폭풍전야의 고요일 뿐이다. 당장이라도 깨질 수 있는 평화다. 아르크가 악마성 바깥으로 뛰쳐나오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놈은 아마 곧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세계를 사르는 불꽃].”
신살자 30레벨 스킬. 꽤 거창한 이름의 스킬이다. 그러나 스킬의 효과는 그런 첫 인상을 없애 버리고도 남을 만했다.
화르륵.
왜냐하면 이 스킬은 정말로 세계를 불사르니까.
“이곳은 마계지. 너의 세계다, 아르크.”
그렇다면 불살라 버려도 클레임 같은 건 들어오지 않을 터다.
사실을 말해두자면 이 스킬을 수련하면서 그랑 란츠 세계의 항의를 좀 받았다. 시스템 메시지로 – 그랑 란츠가 그 불꽃을 싫어합니다. 라고 날려댔으니 말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랭크를 못 올렸는데······.
“이젠 좀 올릴 수 있겠군.”
[세계를 사르는 불꽃]이 마계에 옮겨 붙었다. 불꽃의 방향은 정확하게 악마성 쪽. 세계의 힘 권역에는 불이 붙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정했으므로 우리 쪽에 피해가 올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태우고 말고는 내가 정할 수 있으니, 애초부터 쓸데없는 걱정이지만 말이다.“자아, 불살라라!”
화르르르륵!
처음에는 작았던 불꽃이 마계의 모든 것들을 불사르며 삽시간에 커졌다. 마계에 충만한 마기를 태우고 없애 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계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 버리는 수르트의 불! 이대로 내버려 두면 마계 전체에 번져 버릴 테니, 아르크도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을 터였다.
“크아아악! 네, 네놈!! 당장 그 불을 꺼라!!”
아르크 놈도 양반은 못 됐다. 양반이 아니라 악마 군주, 악마 귀족일지는 몰라도. 내가 생각할 때쯤 저렇게 기어 나오는 걸 보니 말이다.
아니, 아직은 목소리만 들렸다. 여유가 남은 모양이지?
“내가 왜?”
나는 놈을 비웃었다. 그러자 아르크는 비장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쯤해서 승부를 걸어야겠군.”
아르크 후작은 비장하게 선언했다.
쿠구구구구구······.
악마성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쿵! 쿵! 쿵!
땅에 파묻혀 있던 세 개의 다리를 지면으로 꺼내 일어선 것일 뿐이니까.
······응? 뭐?
“일어섰다고?”
그랬다. 성이 일어섰다. 세 개의 다리를 징그럽게 움직이며 악마성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런 것도 가능했단 말인가.
“악마성 안에 틀어박혀서 뭘 하는지 궁금했는데, 저런 걸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황당하긴 한데 웃기기보단 위협적이다.
워낙 거대하다 보니, 크기 자체가 한눈에 안 들어올 정도다.
그리고 성에 솟아 있던 두 개의 탑이 마치 거대한 포처럼 우리 쪽을 겨누었다.
“네노오오오오옴! 죽어라!!”
투쾅! 펑!
그러나 날 향해 쏘아질 것 같은 마기의 포탄은 엉뚱한 곳으로 떨어졌다. 아니, 사실을 알고 보면 엉뚱한 곳인 건 아니었다. 단번에 퍼부어진 그 막대한 마기는 내가 지른 [세계를 사르는 불꽃]을 단번에 꺼버리고 말았으니까!
“젠장! 역시 아직 스킬 랭크가 낮아서!”
나는 그렇게 불평했지만 허세였다. 과연 랭크가 높았다면 저 마기포탄에 불이 안 껴졌을까? 그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기 힘들 정도로 포탄에 담긴 마기는 지독했다.
“이젠 네 차례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날 노릴 거라는 듯 악마성의 포구가 돌아갔다.
“이진혁 님. 명령을.”
루시피엘라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콰앙!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악마성의 포가 굉음과 함께 발사되었다.
“공격을!”
“네!!”
펑!!
***
그냥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만 있는 것도 지겹다, 고 비토리야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 틈을 타 크루세이더들을 쓸어버려야겠다고 그녀는 결심했다.
“함대 전진.”
이진혁이 없으니 포격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아르크의 마계에 갇혀 있으니, 저마계가 깨지기 전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면 함대를 전진 배치시키고 전함의 주포사격으로 적을 섬멸해도 문제는 없을 터.
“각 전함, 임의대로 포격을 개시하라. 표적은 크루세이더. 발사!”
악마 군주들도 크루세이더와의 전투 경험이 있었다. 이진혁이 말도 안 되는 변수를 생성한 탓에 손을 못 썼던 것뿐이다. 정확히는 악마 여왕의 이진혁을 상처 입히지 말라는 터무니없는 명령 탓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각 전함을 지휘하는 악마 군주는 자신들의 사거리는 확보되고 크루세이더의 검은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범위를 확보해 각기 포격을 개시했다.
크루세이더들도 바보가 아니다. 전함의 움직임을 보고 그들이 포격을 개시하리라고 예상한 그들은 전진했다. 후퇴해 봐야 전함의 이동속도가 더 빠르므로, 포격의 일방적인 먹잇감이 될 뿐이다. 그러니 검이 닿는 거리까지 전진해서 반격을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각 전함, 방해마를 살포하며 거리를 유지하라. 포격은 계속하라!”
이어지는 비토리야나의 지휘. 방해마는 온몸이 찐득거리는 작은 악마들로, 전력은 별 볼 일 없으나 움직임을 방해하고 발을 묶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만들어내는 데 드는 마기도 별 볼 일 없어 소모하는 것에도 큰 부담도 없다.
“끼에에!”
“키에에엑!”
그런 방해마들이 하늘을 뒤덮을 것 같은 기세로 몰려와 크루세이더들을 덮쳤다.
방해마들이 크루세이더들에게 들러붙으려 들었지만, 크루세이더들은 익숙하게 그것들이 접근해오기 전에 칼로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작 자체가 크루세이더를 느려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임무에 성공한 것이다.
게다가 숫자가 숫자다. 아무리 베어도 끝이 없다는 건 강인한 크루세이더들이라도 질리게 만들 수 있었다.
“거리 좋네. 계속 쏴.”
여왕의 지시에 따라 전함들은 포격을 계속했다. 그 와중에 크루세이더들에게 들러붙은 방해마들도 그 포격에 함께 쓸려 나가고 있었지만, 악마 군주들은 조금도 포격을 망설이지 않았다.
“전진! 전진하라!!”
크루세이더 군단장, 야코프는 목이 터져라 지휘하고 있었지만 일방적인 포격에 전력이 깎여 나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이진혁이 없을 경우의 정상적인, 그리고 일반적인 전황이지.”
비토리야나는 쓸려 나가는 크루세이더 병사들을 보며 붉은 액체가 든 유리잔을 기울였다.
부하들이 죽어나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적들이 쓸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욱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