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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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스만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네, 너무 약하군.”
지금 브뤼스만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바로 카자크의 상태창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상태창을 들여다볼 수 있을 리 없지만, 브뤼스만은 지금 카자크의 능력치부터 스킬 목록까지 다 확인하고 있었다.
카자크가 자신의 상태창을 공개로 전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카자크는 브뤼스만의 말에 딱딱하게 대답했다.
지금 그는 브뤼스만 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마치 충성을 맹세한 가신처럼. 하지만 목소리와 표정은 텅 비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마치 자아를 빼앗겨 버린 것처럼.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브뤼스만의 [지배의 권능]에 막 걸린 대상은 보통 이런 태도를 취하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배의 권능]은 심저를 파고들고, 곧 진심으로 자신에게 충성심을 바치게 될 터임을 브뤼스만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괜찮은 말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이 정도라니 실망이야. 내가 뭘 믿고 임무를 맡기겠어? 내 참, 귀찮게.”
브뤼스만은 혀를 끌끌 찼다.
“하는 수 없지. 내 힘을 조금 나눠 주마. 임무 수행에 보탬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브뤼스만은 카자크의 딱딱한 대답을 듣곤 마음에 안 드는 듯 다시 혀를 차다가, 시선을 돌려 TV 쪽을 바라보았다.
코드명 신 가나안, 그랑 란츠 세계에서의 전투가 TV 브라운관에 떠올라 있었다.
지금은 악마 함대의 포격에 의해 크루세이더 군단이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는 장면이 비쳤다. 그 장면을 보며, 브뤼스만은 낡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옛 속담도 있지.”
“처음 듣습니다만.”
카자크의 입에서 딱딱한 대꾸가 돌아오자, 브뤼스만은 큭큭거리며 웃었다.
“좀 마이너 했나? 아니, 심하게 마이너한 격언이지.”
“그렇습니까?”
어디에 기원을 둔, 어떤 의미의 격언인지조차 카자크는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지배의 권능]에 당한 직후의 지능저하는 브뤼스만으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페널티다.
“뭐, 그거야 어찌 됐건 상관없는 일이지. 그보다······.”
브뤼스만은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자네에게 기아스를 건 게 이진혁이더군.”
움찔. 거의 자의식이 없다시피 하던 카자크였지만, 이진혁이라는 이름에는 반응했다.
“그놈 참, 재미있어. 모든 게 뻔해져 버린 이 세계에서, 내가 파악하지 못한 변수를 만들어낸 녀석이거든.”
“그렇, 습니까?”
카자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브뤼스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현상도 곧 사라질 테니까. 본인의 감정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앞서게 될 것임은 명백했다.
“그래. 그래서 나는 놈을 한번 키워볼 생각이야.”
“어째섭니까?”
“판을 흔들기 위해서는 적절한 변수가 필요한 법이거든.”
브뤼스만의 눈동자에 기괴한 안광이 깃들었다. 그 안광이야말로 그가 인면독사라는 별명을 얻게 한 연원이었다.
“놈은 그 변수가 되기에 충분한 존재야.”
***
이번 토벌전에서 나는 악마성을 먼저 세계의 힘 권역으로 침식시켜 없앤 후 악마 군주를 죽이면 그 시점에서 악마 군주는 더 이상 부활할 수 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즉, 완전한 사망이라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 셈이다.
악마 군주에게 있어 마계를 여는 건 최후의 수단이라고 하더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악마 군주의 부활은 일견 무한해보이지만 사실은 만족시켜야 하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꽤 많았고, 악마성의 옥좌는 다른 무엇보다 앞서는 필요조건이었다.
실험에 협조해 준 악마 군주 아르크에게 감사를.
날 죽이려 든 아르크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는 건 이상하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내가 얻은 게 워낙 많았다. 비단 실험에 협조해준 것 뿐만이 아니었다.
악마성과 결합한 악마 군주는 아예 다른 존재로 카운트되는지, 처음 아르크를 죽였을 때보다 많은 경험치를 얻었다. 하긴 그 마기의 질량, 부피, 그리고 밀도는 아르크 단일 개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었으리라.
아무튼, 그 결과. 나는 성장했다.
3차 직업인 폭격가의 레벨이 다섯 단계 성장했지만, 솔직히 이건 별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지금 당장은 들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이것. 세계 퀘스트를 해결해 얻은 [세계의 힘 파편] 10개와 [레벨 업 쿠폰] 10매. 그러나 이것보다도 중요한 게 존재한다.
– [선멸자]로의 전직이 가능합니다.
– 전직하시겠습니까?
드디어 히든 직업의 전직 퀘스트를 다 깨고 전직이 가능해졌다!
정말 아르크에게는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아낌없이 주는 악마, 아르크에게 찬사를!
뭐, 농담이지만.
“도와줘서 고마워요, 루시.”
농담은 이쯤 해두고. 나는 진짜로 감사해야 하는 대상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냥 반말로 하셔도 돼요.”
이번엔 반말이냐. 애칭을 쓰라는 것보다 훨씬 부담스럽다. 그러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이건 이거다.
마계가 닫히고, 마계의 짙은 마기가 흩어지고 있다. 마치 스모그와도 같았던 그것이 걷히면서,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그 뿌듯함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거대한 악마 전함이 내 머리 위를 날고 있고, 전함의 주포가 크루세이더 군단을 휩쓸어 버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은 악마들이 전함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와 백병전을 유도하고 있었다. 포격에 함께 휩쓸리면서 말이다.
하핫, 하는 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정말, 쉴 새가 없군.”
나는 마계에선 큰 쓸모를 바라기 힘들었던 [천자총통]을 도로 꺼내 들었다.
“[상유십이], [동시방열].”
차라라라락. 12문의 천자총통이 방열되었다. 그리고 방열된 천자총통들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폭격가] 스킬, [허공방열]이었다. 아르크를 처치함으로써 잠깐 꺼져 있던 [필사즉생]은 다시 곧 켜지겠지. 다행히 [강화포탄 생성]으로 만들어둔 포탄 저장량은 충분했다.
“루시, 도와줄 겁니까?”
“그럼요.”
저 함대는 당신 편일 텐데요? 라는 의문이 뒷면에 살짝 발려 있는 질문이었으나, 루시피엘라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단 한 점도 묻어나지 않았다. 곧장 하늘로 날아오른 루시피엘라는 우글우글 몰려드는 작은 악마들을 빛의 검으로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행동으로도 대답한 셈이다.
그렇다면야, 뭐.
“[대파괴 오케스트라].”
이번에는 합주곡이라도 연주해 볼까.
***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은 훨씬 좋지 않았다.
야코프를 비롯한 크루세이더 군단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이미 패배가 정해진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사기는 떨어졌고 전투력도 손실되었다. 크루세이더들 중에 살아남은 건 30% 미만이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태반이 중상자였다.
만약 이것이 인류간의 전쟁이었다면 크루세이더는 이미 대패했음을 인정하고 항복을 택했을 결과였다.
그러나 상대는 악마고, 항복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악마에 의해 육체는 희롱당하고 영혼은 뽑혀 냉동고에 보관되다가 요리라는 이름의 고문을 당한 후에 잡아먹히는 최후를 뜻한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끝까지 싸워야 하는 전투였다.
그렇기에 크루세이더들은 말을 듣지 않는 사지를 억지로라도 움직이려 애쓰며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
차라리 전장에서 죽는 것이 낫기를 알기에 절망에 파묻힌 채라도 그렇게 싸우고 있는 거였다.
머리 위에 놓은 진은제 헤일로가 휘릭휘릭 돌며 내게 신성을 공급해 주고는 있지만, 역시 소모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언 발에 오줌 누는 격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은 신성이나마 끌어다 써야 하는 이유는 이미 충분했다.
나는 그들의 처절한 사투에 최소한도의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됐다. 비록 같은 인류라 할 수는 없는 상대고 어디까지나 임시의 협력 체제를 구축한 상대에 불과하나, 그래도 일주일간 침식을 같이한 전우다. 경의를 표하기에는 충분하지.
더욱이.
“이진혁! 무사했나?! 다행이로군!!”
“하!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상대도 내게 경의를 표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한데, 내가 스크루지 영감처럼 경의를 아끼고 있을 수야 없었다.
“물러서. 성지를 열겠다!”
[진리의 검] – [불꽃의 검] – [낙원의 수호자]나는 신성을 진리의 검에 불어넣어 빈사상태에 놓인 크루세이더 군단을 성지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크루세이더 군단의 영혼을 수확하기 위해 들러붙어 있던 작은 악마들이 성지에서 추방되었다.
“끼아악!”
“쿠아악!!”
개중에는 그저 성지에서 밀려나는 것만으로 온몸이 터지며 즉사하는 것들도 있었다.
“······오, 오오······.”
“역시 대단하군······.”
뒤에서 감탄사가 들렸다. 하지만 그 감탄사를 들으며 내가 품은 감정은 우월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런 파리 같은 것들도 죽이지 못하고 내쫓지도 못한 채 필사의 저항을 이어나가던 크루세이더 군단에게 나는 안타까움과 연민을 품었다.
바로 그때였다.
– 숨겨진 옵션 개방!
[진리의 검]의 마지막 숨겨진 옵션이 개방된 것은.
“······오.”
아무래도 조건이 빈사의 아군을 지키기 위해 성지를 여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상황에서 바라마지 않던 옵션이다. 나는 곧장 [파괴의 불꽃]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불꽃에서 츠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베어볼 게 없나, 하고 봤더니 [성지]로 인해 밀려난 작은 악마들이 성지 안으로 침입하려다 실패하곤 원인제공자로 보이는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너무 약한 상대라 직감이 아예 반응을 안 해서 눈으로 보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일단 가장 앞에 있는 작은 악마를 베어보았다.
퍽.
그러자 악마가 작은 종이풍선 터지는 소릴 내며 없어졌다.
상대가 너무 약한 터라 경험치는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신성은 10 정도 회복되었다. 회복량이 적어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작은 악마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이것들을 다 베고 나면 소모했던 신성을 거의 다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뜻하지 않은 파밍 타임이로군.”
[바즈라다라의 바즈라] [항마의 칼날] – 활성화시 [마]를 대상으로 300%의 추가 피해를 입히는 뇌전의 칼날을 뽑아낸다. 이 칼날로 [마]를 소멸시킬 때마다 근력, 강건, 신성이 영구적으로 1씩 상승한다.원래 [항마의 칼날]로 쌓을 수 있는 능력치 스택은 제한이 있으나, 내게는 [한계돌파]가 있다. [파괴의 불꽃]으로 신성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마의 칼날] 스택은 능력치 자체의 상승이기 때문에 밸런스가 중요하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르크 후작을 상대하느라 소모한 신성을 회복하는 게 더 중요하지만 말이다.
“이 놈들은 다 내 거야. 나대지 말고 뒤에 얌전히 있으라고.”
나는 야코프에게 그렇게 이죽거리곤, 대답은 듣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바즈라다라의 바즈라]는 아예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진리의 검을 양손으로 잡고 마구 휘둘러 작은 악마들을 마구 터트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회복하고 나면 또 스왑해야지. 그런 욕망에 찬 생각을 품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