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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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브뤼스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악마는 쓸모없군.”
그는 방금 오로블주의 소멸을 감지했다. 그것도 다른 누군가에게 [지배의 권능]을 넘겨주려다 실패한 소멸이었다.
그 상대가 누구인 것까지는 모르나, 매우 높은 확률로 악마 여왕 비토리야나일 터였다. 여왕을 상대로 권능 발동 조건을 만족했을 때만 그 능력을 쓰라고 오로블주에게 미리 명령을 내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비토리야나에게 권능에 저항할 능력이 있었던가?”
브뤼스만은 비토리야나를 잘 안다. 비록 여왕 본인을 권능으로 지배하지는 못했으나, 약점을 잡고 휘두르는 것은 가능했다. 그 덕에 그녀는 이제까지 그의 장기 말로 잘 활용되어 왔다.
오로블주를 비롯한 끄나풀도 지속적으로 여왕의 소식을 전해왔고 말이다. 여왕이 직접 신 가나안에 친정을 행할 셈이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아낸 것도 끄나풀 덕이었다.
이미 성장이 정체된 여왕이다. 그녀가 브뤼스만이 모르는 방법으로 [지배의 권능]에 저항할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시피 했다.
“야코프의 [불굴의 권능]을 얻어서 저항한 건가.”
이것 하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악마 여왕이 크루세이더를 싫어하는 건 고양이가 물을 싫어함과 같다. 아무리 그녀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 한들, 크루세이더가 시야에 들어온 이상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악마 함대까지 끌고 간 대공세다. 여왕이 크루세이더를 소멸시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왕이 전장에 직접 나서서 야코프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광경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아예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여왕이 야코프를 비롯한 크루세이더 12군단을 소멸시켰다고 봐도 되겠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고 봐야 할 성 싶었다.
원래 이번 계획은 백작 셋과 크루세이더 12군단, 그리고 이진혁이 삼파전을 벌이는 구도로 잡아놨었다. 그런데 크루세이더와 이진혁이 붙어먹더니, 여왕이 갑자기 자기 함대를 끌고 신 가나안으로 가는 예상외의 사태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브뤼스만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비록 꽤 유용한 말이었던 오로블주를 잃었고, 여왕을 지배하는 데도 실패했지만 그건 원래 계획에도 없던 일이다.
대단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계획대로는 되었다. 미리 준비했던 다음 수를 두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확실한 게 낫겠지.”
이번 계획의 진행 자체가 워낙 예상외의 요소가 많았던 일인지라, 혹시 모를 변수가 또 자신의 계획을 망쳐놓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브뤼스만은 생각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불안정한 요소를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그것을 위한 도구도 손에 넣었고 말이다.
브뤼스만은 옆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바닥의 먼지를 씹으며 나뒹굴고 있는 카자크의 모습이 있었다.
“으극, 으윽, 크으윽, 우으으윽.”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카자크의 모습에, 브뤼스만은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가 없는 힘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감당할 각오는 되어 있었어야지.”
“말씀, 대로, 입니, 우그극.”
“후후후.”
브뤼스만은 낮게 웃곤 앉아 있던 낡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라.”
브뤼스만의 명령에 따라 카자크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선 자세를 취했다. 여전히 혈관 여기저기가 부풀어 오르고, 근육이 멋대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지배의 권능]은 그로 하여금 고통보다 주인의 명령을 우선시하게 했다.
“좋은 때에 훌륭한 말을 손에 넣어서 기분이 좋군.”
“영광, 입니다.”
부그르륵. 대답을 마저 다 하지 못하고 거품이 입가에 새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브뤼스만은 다시 웃었다.
“크큭. 그래, 인스펙터. 아니, 구 인스펙터라 해야 하려나. 어쨌든 카자크. 네 본업과 맞닿은 임무에 임해줘야겠다. 이번에는 교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죽은 신들의 사회를 위해서도 아닌, 날 위해서 말이야.”
***
나는 일단 안젤라와 합류했다. 루시피엘라도 함께였다.
“선배! 그 여자 누구예요?!”
합류하자마자 안젤라가 외쳤다. 음, 그러고 보니 나도 루시피엘라에 대해선 잘 모른다. 자세한 사정은 전투가 끝나고 나서 말한다고 하기도 했고. 그러므로 내가 할 말은 이거였다.
“루시피엘라, 자기소개하시죠.”
“다시 루시라고 불러주시면요.”
“······루시.”
“네.”
루시피엘라는 활짝 웃었다. 그러자 안젤라의 표정이 구겨졌다. 두 사람의 표정이 대비되어 참 재미있었다.
“저는 루시피엘라라고 합니다. 타천사고요. 그리고······, ······안젤라 씨는 절 모르시겠지만, 전 안젤라 씨를 잘 압니다.
아니, 자기소개를 하다 말고 이게 무슨 소리래. 안젤라도 당황한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저는 원래 교단 소속이었거든요. 아니, 교단 소속이라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군요. 과거에 절 부려먹었던 브뤼스만 라이언폴드는 이제 정확히는 교단 소속이 아니니까요.”
브뤼스만 라이언폴드. 여러 번 보고 들은 이름이다. 크루세이더 군단장인 야코프의 입에서 듣기도 했고, 악마 여왕 비토리야나의 입에서도 나온 이름이었지.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그 이름을 인지한 건 [지배의 권능] 때문이었다.
그는 [지배의 권능]의 주인이다.
“하지만 루시피엘라. 당신에게 [지배의 권능]은 걸려 있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이제까지 몇 번 맞닥뜨렸던 브뤼스만의 끄나풀에게는 대체로 [지배의 권능]이 걸려 있는 상태였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케이나 테스카도 마찬가지였고.
“네, 브뤼스만은 제게 [지배의 권능]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게 루시피엘라가 제게 원하는 거랑 연결되어 있는 겁니까?”
“루시라고 불러주시면······. ······네, 맞아요.”
농담처럼 평소 입버릇을 덧붙이려다가, 결국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루시피엘라는 내게 그렇게 대답했다.
“제겐 약점이 있고, 브뤼스만은 그걸 휘어잡았죠. 그렇다고 [지배의 권능]에 걸리지 않은 저를 곁에 두기엔 껄끄러웠는지 만마전의 악마 여왕 비토리야나 에르제베트의 휘하에 파견하긴 했지만요.”
루시피엘라 본인은 담담히 말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가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교단에 강한 입김을 지닌 구 정치인 출신의 브뤼스만이 만마전의 악마 여왕과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니. 이건 큰 반향을 일으킬 이슈가 될 거다. 제대로 된 채널로 내보낼 수만 있다면 말이지만.
“제 주된 임무는 브뤼스만과 비토리야나 사이의 메신저였어요. 이미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비토리야나 에르제베트도 저와 비슷한 처지예요. 약점 하나를 잡혔고, 그것 때문에 브뤼스만의 말에 따라 움직였죠.”
예상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확실한 증인이 있고 없는 건 천양지차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토리야나가 브뤼스만을 배반했지요.”
“뭐, 저도 그렇지만요.”
루시피엘라의 눈동자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진혁 님의 존재가 저로 하여금, 그리고 그 악마 여왕으로 하여금 브뤼스만을 배신할 이유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 거예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했던가요?”
“네. 가능성.”
단순한 가능성일 뿐. 그러나 루시피엘라는 단호히 선언했다.
“동기로써는 충분하죠.”
브뤼스만을 배신할 동기로써는.
“그럼 이번에야말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대체 나한테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 건지에 대해서.”
***
루시피엘라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줄이면 다음과 같다.
“이진혁 님께서는 신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아주 황당무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를 섬기는 신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진혁교는 정식 종교가 되었다. 신자만 있다고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로부터 얻은 신성으로 나는 자격을 갖췄고 넥타르를 마셔 신성의 격도 명백한 신성까지 올렸다.
이대로 계속 신자가 늘고, 신성이 쌓이고, 신성의 격이 오르면 그 끝은 어디일까? 그 답은 자연스럽게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나 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모든 존재에게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저 칼을 오래 휘두르기만 한다고 절세의 검법을 손에 넣을 수 없듯, 주먹을 오래 뻗는다고 절세의 권법을 손에 넣을 수 없듯, 그저 신자를 모으고 신성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
루시피엘라가 그렇게 말했다.
“이진혁 님께서는 한계를 돌파하실 수 있으니까요.”
내 고유특성, 한계돌파. 중요한 것은 ‘고유’ 쪽이다. 한계돌파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건 이 세계에서, 적어도 플레이어 중에서는 나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루시피엘라의 소원이라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제가 신이 될 필요가 있는 겁니까?”
“네.”
루시피엘라는 단호히 말했다.
“왜 그런 겁니까?”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 소원에 대해 먼저 말씀드려야 합니다.”
루시피엘라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잿빛 날개를 펼쳤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타천사입니다. 천사는 신을 섬기는 존재고 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죠. 그에 비해 타천사는 신의 명령을 거부한 존재고, 그로 인해 타락한 존재로 낙인찍힌 존재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기이한 열기가 깃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이 죽었습니다. 제가 섬기던 신이요, 저를 창조한 신이지요. 저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았고, 제 죄는 영원히 사해질 일 없이 남았습니다. 그렇기에 제게는 무한한 세월을 타락한 채 살아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어질 이야기가 짐작되었지만, 나는 굳이 입을 열지 않고 잠자코 루시피엘라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단 하나, 새로운 주인을 섬겨 새로이 천사가 되는 것뿐이지요.”
새로운 주인.
즉, 새로운 신.
“그리고 제 좁은 식견으로 그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오직 한 분, 이진혁 님뿐이십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악마 여왕 비토리야나 에르제베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 또한 나를 통해 악마의 한계, 존재 이유를 극복하고자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내가 고개를 세 번 끄덕여 [유혹의 권능] 발동조건을 만족시키는 바람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 방법 또한 같을 것이다.
천사와 악마는 맡은 바 임무만 갈렸을 뿐인,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라 했으니까.
물론 비토리야나가 그저 내 고개를 세 번 끄덕이게 만들기 위해 루시피엘라의 이야기를 자기 사정에 맞춰 끌어다 썼을 경우의 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앞뒤는 맞네요.”
내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피엘라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제 말을 믿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무엇이든 할 테니 그저 곁에 놔둬만 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뭐? 또 루시라 불러달라고 하려고 그러나? 그러나 그런 내 예상은 틀렸다.
“부디 말씀 낮춰주세요. 이진혁 님께서는 제 유일한 희망이자 가능성, 그리고 제 소원이 이뤄졌을 경우 제 주인이 되실 분이니까요.”
루시라 불러주시면 더 좋고요, 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는 않았다는 점이 루시피엘라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