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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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키르드. 키르드, 어디 있어?”
그러고 보니 키르드를 먼저 봤어야 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아니, 테스카가 되살렸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을 해야지.
처음 생각으론 루시피엘라한테 자기소개만 시킬 셈이었는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길어졌다. 안젤라가 너무 다이나믹하게 루시피엘라의 정체를 묻는 바람에 그만.
“여, 여기 있습니다. 로드.”
게다가 키르드도 그동안 테스카 뒤에 숨어서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저러는 걸 보니 자기도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지.
“흐······.”
······뭐, 알았으면 됐다. 나는 이빨 사이로 한숨을 물어 부순 후, 양손으로 키르드의 머리를 쥐고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줬다.
“야, 야, 야.”
“읏, 네, 넵.”
이 녀석, 머리카락 부드럽네. 다음에 꼬투릴 잡아서 다시 헝클어줄까? 그런 생각을 애써 잠재우며, 나는 대범한 척 말했다.
“다신 그러지 마라.”
나는 이걸로 끝낼 셈이었다.
그런데 키르드는 아니었던지, 주저주저하면서도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그, 그치만······.”
어쭈?
“그치만?”
“저도 로드께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오.
마침 잘 됐다. 나는 다시 키르드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읏, 읏, 읏, 읏.”
이번엔 좀 세게 해서 키르드의 신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러는 키르드를 보곤 나는 픽 웃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네 목숨을 걸어서야 되겠냐?”
“그치만······, 목숨을 걸고서야 간신히 로드의 도움이 된 건 걸요.”
그치만, 그치만. 거참 말대꾸 오지게 박네. 그래도 내 시선을 피하며 우물우물거리는 게 귀엽다. 나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목숨을 안 걸어도 될 정도로 더 강해지면 되잖아. 강해질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린애가 뭐가 그리 급한지 모르겠다.
아니, 어린애라 그런가.
나도 어릴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 어른이 되고나면 혼자서 자립할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게 쉽지 않아서 꽤 고생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도 그랬다 보니 키르드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말이다, 나는 천애고아였지만 넌 나라는 뒷배가 있잖냐?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왠지 낯부끄럽기도 하고, 좀 꼰대처럼 보일 것도 같으니까. 게다가 인간은 늘 자기가 제일 힘든 법이지.
“으휴.”
나는 긴 말을 그냥 꿀꺽 삼키고 트림처럼 한숨을 내뱉은 후, 한 손으로 키르드의 머리를 붙잡고 흔들어주었다. 어쨌든 키르드의 희생으로 어려울 싸움을 더 쉽게 풀어낸 건 사실이었다.
“······고맙다. 그래도 이제 그러지 마라. 걱정하잖아.”
그러자 키르드의 큰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긴 제 딴엔 목숨까지 바쳐가며 날 도왔는데 돌아온 건 타박이니 서러울 만도 하지.
이래서야 어쩔 수 없군. 나는 키르드의 머리를 내 배에 박아주었다. 눈물이랑 콧물이 좀 묻겠지만 뭐, 내가 감수해야지.
“······저 여기 오길 잘한 거 같아요.”
그러고 있으려니 조용히 있던 루시피엘라가 안젤라에게 갑자기 속닥였다. 아니, 그게 무슨 뜻이지? 안젤라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또 무슨 뜻이지?
하지만 물어봐선 안 될 것 같아, 나는 그냥 못 들은 척했다.
***
악마 여왕 비토리야나는 아주 바빴다. 오로블주가 쿠데타로 점령한 악마 함대의 기함을 재점령하고, 제어권을 되찾고, 살아남은 배신자들을 모조리 처형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처형한 악마 군주들은 비토리야나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힘이 되었다.
비토리야나는 이 세계에 함대를 끌고 오면서 대부분의 가용전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번 일로 인해 그녀가 본 손해는 그야말로 막대했다. 그녀의 세력 자체가 와해되어 버렸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제는 만마전으로 돌아가도 그녀가 있을 자리는 없으리라.
하지만 비토리야나는 별로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악마왕들과의 세력 다툼에는 이미 질린 바였다. 교단이 패권을 가져간 큰 세력구도에서 만마전에서의 싸움은 그저 동네 건달들의 다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이 비토리야나는 고대 악마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아귀다툼에 익숙해져 있던 현대 악마들과는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세력을 키워 호령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랜 소원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꿈을 현실로 끌어오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있어서는 다른 그 어떤 일보다도 훨씬 중요하고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방님! 어디 가셨어요, 서방님!!”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비토리야나도 이진혁이 슬쩍 자리를 피하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냥 자신의 일을 우선시한 건 이진혁이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찾아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토리야나는 고대 악마로, 자신이 유혹하기로 점찍은 대상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종족 특성과 능력과 스킬을 지녔다. 설령 신화급에 이른 투명화 스킬이나 은신 스킬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능히 찾아낼 수 있었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자신감을 접어뒀어야 했다.
숙원 앞에 전함이 중요했는가? 배반한 악마들을 처분하는 게 중요했는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유일한 빛, 악마 식으로 말하자면 태양열 지옥의 유일한 그림자. 그게 비토리야나에게 있어서 이진혁이었다. [유혹의 권능]에 걸린 탓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절대 놓쳐선 안 되는 대상이었다.
다른 그 무엇보다 이진혁을 우선시해야 했는데, 같잖은 자신감으로 그를 내버려뒀고 놓치고 말았다.
비토리야나는 후회했고 절망했다. 이미 놓쳤음을 암에도 그녀가 이진혁을 찾아 헤매는 건 미련 때문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
그렇게 그녀가 악마 함대를 홀로 이끌고 그랑 란츠를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였다.
“······!”
세계의 격벽에 균열이 생긴 신호를 비토리야나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혹시 그 균열을 통해 이진혁이 이 세계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막대한 마기를 소모하는 단거리 워프마저 사용해 그 균열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녀가 균열에서 본 것은 꿈에도 그리던 이진혁의 모습이 아니었다. 균열을 찢고 나온 것은 교단 소속의 일개 천사였다.
비토리야나의 아름다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누구냐, 넌.”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는 꽤나 위압감이 있었으나, 균열을 통해 나온 자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고했을 뿐이었다.
“비토리야나인가. 크루세이더 12군단은 그분의 지시대로 소멸시켰는가?”
별거 아니면 함포를 쏴 소멸시켜 버리려던 생각을 품고 있었던 비토리야나는 그런 남자의 말에 생각을 바꿔야 했다.
“브뤼스만의 끄나풀이냐.”
악마 여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기가 그녀의 주변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라면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을 뿐,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감정이 담기지 않은 평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질문에 대답해라.”
필요한 만큼은 강한 녀석인가. 비토리야나는 경계 수준을 약간 올렸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낮게 나갈 필요는 없다. 그녀는 판단했다.
‘아니, 허세를 좀 부려볼까?’
오히려 더 세게 나가보기로 말이다.
“아직 신참이라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 나와 브뤼스만의 관계는 협력관계지 상하관계가 아니야. 브뤼스만이 내게 명령을 내릴 권한 같은 건 없다.”
“질문에······, 대답하라.”
비토리야나는 이 끄나풀이 [지배의 권능]에 당한 것치고는 꽤 인내심이 깊다고 생각했다.
‘지배당한 개체는 조금만 브뤼스만을 모욕해도 금방 이성을 잃고 마는데. 그 오로블주처럼.’
하지만 이 남자는 꽤 버텨내고 있었다.
‘브뤼스만에게 꽤 깊은 원한이라도 품고 있었던 모양이지?’
비토리야나는 남자에게 흥미를 느꼈다.
“너는 누구냐?”
“내 이름은 카자크다. ······중요하지 않다. 질문에 대답해라.”
아무래도 [지배의 권능]에 당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지능과 자아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비토리야나는 잠깐 들었던 흥미가 식는 것을 느끼며 성의없이 대답했다.
“크루세이더 12군단은 소멸했다. 내 함대의 절반과 함께. 대답이 되었나?”
“그렇군. ······직접 확인하겠다. 안내해라.”
카자크는 오연히도 말했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비토리야나는 짜증을 느꼈다.
‘그리고 안내하라니. 아까 브뤼스만과 상하관계가 아니라고 말한 걸 못 들은 체하는 건가?’
악마 여왕을 무시하다니.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비록 지금은 휘하에 아무도 거느리고 있지 않아 굳이 자존심을 챙길 이유는 없지만, 자존심이란 게 어디 꼭 이유가 있어야 내세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지금 그녀는 이진혁을 눈앞에 뒀다 놓쳐 마음에 꽤 큰 상처가 난 상태였다. 자신에게 무례를 저지른 상대를 그대로 둘 아량을 베풀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친다!’
그래서 비토리야나는 카자크에의 공격을 결심했다.
“······그 인면독사가 내 부하 중에도 끄나풀을 만들어 심어뒀더군. 그놈 때문에 내 함대의 절반을 잃었지. 잃어도 되지 않아도 되는 전함을······, 두 척이나!”
비토리야나의 말에, 카자크는 코웃음 치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분을 배신하는 건가?”
“배신은 무슨, 상하관계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더욱이······, 배신을 논하자면 놈이 먼저지!”
투쾅!
비토리야나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악마 전함 세 척의 주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
멀리서 포성이 들렸다.
“······뭐야?”
익숙한 포성이었다. 악마 전함의 주포가 발사되는 소리였다. 몇 번이고 들었으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나도 비토리야나가 날 찾아 함대를 이끌고 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알고 있었다. 하지만 홧김에 주포를 쏴버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으음?”
그게 내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포성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 간격은 일정했다. 감정에 치우쳐서 마음대로 아무 데나 포를 쏘는 게 아니라 전술적으로 포를 쏘고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포성의 사이사이에 다른 소음이 섞여 있었다.
“전투? 전투 중인가? ······누구와?”
비토리야나는 악마 여왕이다. 아군은 적고 적은 많으니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소리만 듣고 추측해 내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보다는 경우의 수를 떠올리는 편이 더 나으리라.
“브뤼스만의 끄나풀일 겁니다.”
내 혼잣말에 루시피엘라가 끼어들었다.
“확신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만, 정황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내가 루시피엘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변명하듯 그렇게 덧붙였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겐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더 적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브뤼스만과 비토리야나에 대해서 잘 알 테니까, 그녀의 유추가 더 정확하리라.
“안젤라. 포성이 들린 쪽으로 움직여 보자.”
“아, 네! 선배.”
처음 루시피엘라를 보고 덤벼들던 기세는 어딜 간 건지, 무슨 생각에 잠겨 멍하니 있던 안젤라는 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급히 대답했다.
***